집안일을 끝낸 뒤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나는 형제들의 방에 들렀다가 곧 외출을 하려는 듯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토도마츠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혹시 옷을 갈아입으려는 중이었나. 방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벌컥 문을 열었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 아츠시군이랑 한 잔 하기로 했는데, 너도 갈래?”

 토도마츠가 내게 물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픽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어차피 술도 못 마시고.”

 “그거 말인데…….”

 토도마츠는 시선을 창가 쪽으로 돌리더니 귀밑을 긁적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오소마츠형이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에?”

 그대로 두 사람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어제 어쩌다보니 너와 아츠시군에 대한 걸 쵸로마츠형에게 들켰거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형이 오소마츠형에게 그냥 말해 버리라고 해서…… 또 어쩌다보니 형에게 알려지고…… 그렇게 되고나니까 오소마츠형이 ‘아 그래? 그럼 같이 가서 마시고 와.’ 라고 하더라고.”

 그의 말을 차근차근 듣고 있던 나는 발끈하여 소리쳤다.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 뭐야?!! 이 배신자!!!”

 조금 전의 당황했던 표정은 이것 때문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노라면, 토도마츠가 인상을 쓰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 미안. 나도 나름대로 끝까지 숨기려고 애썼는데, 형들 눈치가 좀 빨라야지.”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오소마츠에게 숨기는 것에 대해서 줄곧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오해를 풀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에 반해 내 가슴은 조금씩 위태로운 떨림을 더해갔다. 어째서 상관없다고 말한 걸까. 내가 술을 마시는 걸 그렇게나 싫어했으면서, 어째서.

 “오소마츠 지금 집에 있어?”

 “아니, 아까 나갔어.”

 “어디 간다고는 말 안했고?”

 “그냥 바람을 좀 쐬고 싶다던데.”

 “그래…….”

 토도마츠는 고개 숙인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너도 이렇게 집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랑 같이 나가자. 뭐가 어쨌든 적당히 마시고 놀다 오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냐.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얼른 준비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나는 속으로 그를 원망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그 후 우리 두 사람은 커다란 상가가 즐비해 있는 중심가로 나왔다. 토도마츠를 따라 길모퉁이를 몇 번 돌아가니 어느 훈훈한 분위기의 선술집이 나왔다. 기다랗게 늘어진 일체형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안주를 먹고 있노라면, 머지않아 슈트차림의 아츠시군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회사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퇴근길이라 차가 좀 막혀서…….”

 내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토도마츠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됐으니까 얼른 거기 앉아.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아츠시군은 내 옆에 앉았고, 점원에게 도수가 약한 술을 한 잔 주문했다. 토도마츠와 같이 마셨을 때 취해 있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꽤 강한 주량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서인가 그는 술을 그다지 마시지 않았다.

 우리는 음식을 주문해놓고 뜨거운 술로 목을 축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토도마츠가 전화를 받으러 잠깐 밖에 나가고, 나와 아츠시군 둘 만이 남게 되었다. 주변이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나는 홀로 사념에 잠겼다. 그런 내게 아츠시군이 물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아츠시군은 반 정도 비어 있는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이해합니다. 만약 당신이 현관을 나섰을 때 누군가 당신의 팔을 붙잡았더라면 오늘 당신은 이곳에 오지 않으셨겠지요.”

 “…….”

 내가 그렇게 알기 쉬운가.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자신의 주량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객기를 부려 독한 술을 주문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곧 취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시면 솔직해지는 쥬시마츠처럼 내 감정도 조금씩 스스로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가 당신을 붙잡지 않았군요.”

 “붙잡기는커녕 잘 다녀오라던 걸요.”

 딱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내가 토도마츠에게 실제로 전해들었던 말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게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두고 나왔으니까요.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내 곁을 떠나갈 정도의 것이라면 어차피 언젠가 그렇게 되기 마련입니다. 정말 내 것이라면 설령 내가 멀어지려고 하더라도 나를 따라오는 법이죠.”

 “아츠시군은 무엇을 두고 나오셨나요?”

 “아버지요.”

 “네?”

 나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아츠시군을 돌아보았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엄격한 환경에서 자라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른이 되기 전까지 제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었죠.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도망치듯이 본가를 나온 것이 이제는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연애 하나…… 제 맘대로 하지 못 하니까요.”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실은 얼마 전에 아버지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얼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라는 말씀이셨죠. 물론 제가 아닌 아버지께서 선택한 여성과요. 전 신물이 났습니다. 바쁜 척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계속 고민을 하다보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날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수속을 밟고 토도마츠군과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에 당신을 처음 보게 된 겁니다.”

 “그럼…… 저를 만나고 싶어하셨던 건 아버지에 대한 저항심 때문이었군요?”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때 당신을 보고 호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솔직히 스스로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냥…… 당신에게라면 내가 먼저 다가가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런 자리를 만든 것도 사실 토도마츠군보다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어요.”

 “…….”

 그때 토도마츠가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통화를 좀 하느라. 그런데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왜냐니…… 그야…… 술 때문이지…….”

 “이제 반 잔 마셨는데?”

 “내가 술이 좀 약하잖아.”

 “흐응─.”

 토도마츠는 얄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어쩌다 친해졌어요?”

 내가 묻자, 아츠시군이 대답했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부활동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토도마츠가 말을 이었다.

 “당시에는 농구가 학교에서 가장 자유로운 부활동이었지. 우리 학교는 본래 축구부가 유명한 곳이라 농구로는 그다지 주목을 못 받았거든. 당연히 코치 같은 건 없었고, 학교 뒤켠의 작은 농구코트에서는 우리가 뭘 하든지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어.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몇 명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다들 사이가 좋았던 거구나.”

 “아아, 지금까지 연락하는 건 그때 같이 부활동을 했던 녀석들 정도야.”

 “저 마다 뿔뿔이 흩어졌지만 가끔 그때처럼 모여서 농구를 하곤 합니다.”

 “네, 저번에 뵈었었죠.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았어요.”

 한 가지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들 모두 키가 컸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토도마츠나 아츠시군이 상당히 큰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토도마츠의 친구들 중에는 두 사람보다 큰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잔이 비었네. 한 잔 더 마실래?”

 토도마츠가 내게 물었다.

 “음…….”

 나는 자신의 잔을 내려다 보며 고민했다.

 오소마츠가 걱정하겠지……. 아니……. 과연 걱정할까……?

 문득 며칠 전 아츠시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떠한 관계가 당신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거기까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마실래.”

 “그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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