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일 째 -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여전히 강한 바람이 불고 있다. 어두운 병실 안, 스탠드의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친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땀을 닦아주고 있다.
"오소마츠…"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 그를 부른다. 줄곧 초점이 흐릿하던 그의 눈동자가 이윽고 나를 향한다.
"나를 위해서 울어줄래…?"
그것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도, 사랑을 구걸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자신이 그에게 그 만큼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아니. 절대 안 울 거야."
"내가 죽는데 슬프지 않아…?"
"슬프지 않아. 화가 나. 미칠 듯이 화가 나. 이대로 가버리면 널 평생 원망할 거야."
"……."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뻐."
슬픔이든, 분노든,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설령 이 남자가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해도, 그것으로 만족한다.
적어도 49일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
…
…
…
고요한 응급실 안. 오소마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런 질문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죽으면 고민해도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에.
문득 병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쪽으로 걸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명이 함께 사용하는 곳이니, 그는 누군가의 보호자가 왔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소마츠는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카라마츠였다.
"여러명이 있으면 복잡하니까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했잖아." 오소마츠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카라마츠의 눈동자가 새빨간 피의 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눈동자를 가진 자를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지난 날 거의 매일같이 자신의 꿈속을 드나들었던 악마였다.
"당장 내 동생한테서 나가, 이 더러운 놈아."
오소마츠는 악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자 악마가 그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도저히 카라마츠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교악한 웃음이었다.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당초에 네가 너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나도 웬만하면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내 '진짜 그릇'은 어디까지나 '너'니까."
"너 같은 악마는 자기 그릇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내게 그렇게 끈질기게 졸라댔던 거 아녔냐고."
"당연히 들어갈 수는 있지. 하지만 완벽한 건 아니야. 진짜 그릇이 아니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거든. 이렇게 너와 마주보고 얘기를 하는 게 고작이랄까… 곧 부서지고 말 거야."
"부서진다니, 무슨 뜻이야?"
"죽는다고. 아주 서서히, 고통스럽게."
"이 자식─!!!"
"워─, 워─. 진정해. 여기 병실 안이야, 잊었어? 내가 모두 재워놓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하라고. 누군가 방해꾼이 뛰어들어오기 전에. 괜한 희생을 만들고 싶진 않잖아?"
악마가 능청스레 웃으며 말하자, 오소마츠는 이를 갈면서도 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세 번 말 안 해… 당장 내 동생한테서 나가."
"YES라고 말해. 그럼 있어달라고 해도 나갈 테니까."
악마가 그릇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대상, 즉 인간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YES'라는 짧은 대답을 얻어내기만 하면 그때부터 그 몸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오소마츠는 누군가와 자신의 몸을 공유한다는 것에 역겨움을 느꼈다. 악마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하면 악마를 죽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네 동생은 무사할 테니까 안심해. 아무리 나라도 패널티를 한꺼번에 두 개나 감당하기는 어렵거든."
"패널티?"
"인간계에서 멋대로 활보하는 악마를 신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잖아. 분명 사자를 보내서 나를 벌하려고 할 거야. 규칙을 많이 어길 수록 형벌도 무거워지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들으면 너도 솔깃해질걸? 사실 이게 내가 너에게 거는 최후의 딜이야."
"네가 어떤 소리를 지껄여대든지 간에 난 절대 YES라고 말 안 할 거니까 헛수고 하지 마."
"글쎄, 그럴 수 있을까? 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네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아주 많이 할 수 있어. 가령…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다던가."
"……."
악마는 오소마츠를 지나쳐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여성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잘 생각해 봐. 네 작은 희생으로 그녀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는 거야. 괜찮은 조건이잖아. 아니, 너에게는 최고의 조건이라고 해야 하나."
…
…
…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넌 알고 있지?"
"그럼. 그녀는 어렸을 때 어느 치한에게 목을 물렸어. 그런데 녀석이 수감중에 암으로 죽어버렸지. 그래서, 그녀도 죽게 됐어. 네게 편지를 남기고 떠났던 바로 그 날 말이야. 그녀의 묘는 줄곧 일본에 있었는데, 몰랐지? 그게 유언이었나 봐."
오소마츠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뭘 망설여? 이대로 그녀를 보낼 거야? 죽어서도 네 곁에 있고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너를 사랑하는데?"
"약속… 꼭 지켜."
"물론이지. 자기 그릇과 한 약속은 누구도 어기지 못 해. 이건 계약이거든. 어느 한 쪽이 깨고 싶다고 마음대로 깰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좋아… YES─…"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소마츠에게 바짝 다가서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이윽고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온갖 사물이 진동을 일으키고, 허공을 날아다녔다. 전등이 깜빡거리다가 터지기도 했다.
"후후후후훗─… 아하하하하핫─!!!"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가 스르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윽고 그의 입술 사이로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의 본체, 악마의 본모습이었다. 그는 돌연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그의 입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오소마츠의 입을 통해 그의 몸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연기가 모두 빠져나간 뒤 카라마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당분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
오소마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더이상 그가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는 목과 어깨와 팔을 차례로 움직여가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상쾌한 듯이 웃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래, 이거지─. 역시 자기 그릇 만큼 편한 건 없다니까─."
그때 즈음 (y/n)도 잠에서 깨어났다. 악마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이제 막 눈을 뜬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HI, DARLING─. 나 보고 싶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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