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일 째 -
눈부신 햇살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떠본다. 분명 꿈을 꾸었는데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잠에 드는 순간부터 깨어나는 순간까지, 그 짧은 시간에 대단히 슬픈 일이라도 겪었던 걸까.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이전에도 기억에 남지 않는 꿈을 몇번이고 꿨지만 언제나 이렇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눈물자욱을 아침 마다 보게 된 것은 약 2주 전부터이다.
커다란 의문속에서 나의 직감이 말을 해준다. 무언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작은 인간에 불과한 나는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 커다란 것이.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기분이 약간 우울하긴 하지만 그 뿐이다. 나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에 대해 체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이불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
…
…
아침식사를 하고, 양치를 하고, 뉴스를 보고…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분주하게 외출준비를 하는 형제들 사이에서 홀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별 의미 없는 생각에 잠긴다. 모두 현관을 나서고, 마지막으로 남은 오소마츠가 '다녀올게'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자 줄곧 초조했던 가슴이 욱씬거리며 요동을 친다. 어째서일까.
"오소마츠."
"응?"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듯이 오소마츠의 팔을 붙잡는다.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펴본다. 어째서인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시야가 위태로이 흔들린다. 그리고 새카맣게 물든다. 가슴이 들끓기 시작하는가 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목언저리가 갑자기 화상을 입은 듯이 뜨거워진다.
"왜 그래?"
무의식속에서 스카프를 풀고,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에 손을 얹어본다. 주륵─하고, 뜨거운 액체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뚝, 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선명한 붉은색의 피.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이게 도대체… 너 괜찮아…?"
"……."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 일어났던 것일까.
나는 무엇을 잊고 있었던가. 자신의 의식보다 한 층 더 깊은, 자신의 '넋'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건넨다. 줄곧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낡은 필름을 재생시켜본다. 영상이 흔들리고 심각한 잡음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기억이 떠오른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 안. . . . 내 입을 막고 있는 거친 손. . . . 그리고 커다란 아픔. . . .
"안 돼… 그만둬… 싫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오소마츠가 그런 나의 몸을 서둘러 받친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한 표정, 피로 빨갛게 물들어버린 손. 시야에 비치는 모든것이 되살아난 기억과 함께 내 안의 공포를 자극한다.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이야…!!! 아파…!!! 아파─…!!!!!!"
오소마츠의 이빨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반쯤 이성을 잃어버렸다. 나는 그를 있는힘껏 밀쳐낸 뒤 서둘러 구석으로 기어갔다. 피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해… 얼른 병원에 가자!"
"오지 마…!!!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아… 낡은 필름이 덜컥, 소리를 내며 끝에 다다른다. 이제 모든 게 다 기억이 난다. 그것은… 내가 5살 때였다. 나는 집밖으로 굴러간 공을 주우러 나갔다가 잠깐 한눈을 팔아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을 헤메이다가, 그 남자와 만났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창백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아저씨였다. 그는 나를 단단히 속박한 뒤 내 목을 물었다. 딱 한번,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순간이 영원한 지옥이었다.
나는 그 날로 병원에 입원했다. 나를 물었던 남자는 허무하게도 그로부터 6개월 후 수감중에 죽어버렸다. 하늘의 벌인지 뭔지, 사망원인은 미리 발견하지 못한 암이었다.
…
…
…
각인을 한 오메가는 그것이 자의적인 것이었든 강제적인 것이었든 자신을 물었던 알파의 곁에서 평생을 살아야만 한다. 그것을 외면한 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 - 2년 정도.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알파에 대한 형벌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몇몇의 오메가들은 그런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처럼 상대방이 죽어버린 경우에는… 그러한 선택지 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죽는 날만을 기다릴 뿐.
아빠는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엄마도 병을 얻어가면서까지 나를 간병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악몽을 꾸었고, 그 때 마다 커다란 두려움에 발작을 일으켰다. 그렇게 심각한 후유증을 견뎌내는 나날속에서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의 담당의사는 남은 시간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지낼 바에는 차라리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내게 퇴원을 권고했다. 그때 아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 땅을 떠나야만 해. 하지만 우리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도록 너무 멀리는 가지 않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일본이었다.
은사의 집에 머물며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내가 그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친구, 장난꾸러기이지만 상냥한 소년, 오소마츠였다.
"おはよう─."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마당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다고는 해도 갑자기 남의 집에 들어와서 말을 걸다니. 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던 나는 낯선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두려워서 무심코 방 안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러자 그가 마루에 걸터앉아 안쪽으로 고개를 쓱 내밀었다.
"君、優性オメガだよね?初めて見たよ─。道を歩いていたらここから匂いがして、つい入っちゃった。ヘヘッ─。"
그때만 해도 나는 일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말할 때, 내 머릿속에는 그저 '말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정도 경계심이 풀린 다음부터는 그 아이의 말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내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알아듣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쉬운 단어부터 하나씩, 하나씩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회화를 외우는데 매달리다가, 그 아이가 놀러오면 곧 입에 담곤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작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고,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오소마츠가 나를 위해 표정변화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제스쳐를 많이 사용해준 덕분에 부분부분 모르는 말이 들려와도 대충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그것을 피곤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죽는 날이 아닌, 그가 오는 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
…
…
"오소마츠형!"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쓰러지다니?"
삐─. 삐─. 익숙한 심장박동기의 소리. 반쯤 열린 눈꺼풀 사이로 하얀 빛이 들어온다. 흐릿한 시야속에 얼핏 형제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색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오소마츠와 놀란 표정의 쵸로마츠, 그리고 토도마츠. 내가 앰뷸런스에 실려갔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이 녀석 목이 왜 이래? 너, 설마!"
쵸로마츠가 오소마츠의 멱살을 잡고 소리친다. 오소마츠는 여전히 충격으로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아냐… 내가 아니라고…"
"그럼 누구야! 누가 이런 짓을!"
"나도 몰라… 정말 몰라… 내가 묻고 싶어…"
어느덧 내게 가까이 다가온 토도마츠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잡고, 나머지 한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또 한 번 가슴에서 욱씬거림이 느껴진다.
줄곧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내게 다가오고 있던 것, 그것은 죽음이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기에 확신할 수 있다. 나는 곧 죽는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모두와 헤어지게 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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