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커져 가는 불안감 만큼이나 온세상이 흐릿하던 날, 나는 형제들에게 꿈에서 누군가 허락을 구해오면 절대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미리 당부를 해두었다. 카인이 수시로 오소마츠 뿐만이 아닌 카라마츠의 몸에 들어가고, 아벨이 끝내 쵸로마츠의 허락을 구하지 못하면 카인이 그러했듯이 그 대신 다른 형제의 몸에 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녁에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의논을 했다. 오소마츠, 쵸로마츠, 이치마츠, 나. 다섯 사람중에 카라마츠만은 외출을 하고 없었다.
"…수면제?"
알파들은 러트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종종 수면제를 복용하곤 한다. 내가 쵸로마츠에게 건네준 것은 오소마츠가 힘들어하는 카라마츠를 위해 직접 병원에 가서 처방 받아온 것으로, 복용시 거의 기절한듯이 잠을 자게 되는 강력한 수면제였다.
"천사들은 꿈을 통해서 인간과 소통하니까 그들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꿈을 꾸지 않는 거야."
'가장 좋은 방법이랄까… 지금은 이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덧붙이며, 나는 약 한 알과 물을 쵸로마츠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던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어?"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은 이치마츠였다.
"기껏해야 2-3개월 정도겠지. 그 안에 어떻게든 결착을 내야 해. 카인을 죽여서라도."
"카인은 죽음(사신)이잖아. 죽음을 어떻게 죽여?"
이치마츠는 눈동자를 가로 굴리며 손사래를 치더니 '나도 몰라…'하고 중얼거렸다. 이에 오소마츠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들어봐. 우리 모두 카인과 아벨을 묵사발로 만들고 싶지만 싸우는 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야. 일단 대화를 하자고. 나와 쵸로마츠가 그 녀석들과 다시 만나볼게."
형제들과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로 인해 방 안에 일시적인 침묵이 맴돌았다. 리스크가 큰 만큼 선뜻 동의를 하지는 못해도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막 외출에서 돌아온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나타나 이 생각을 부정했다.
"소용없을 거다."
그는 오소마츠의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카인은 내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어. 그 일이 종말이든 뭐든지 간에… 그건 어떻게든 자신의 뜻대로 하고 말겠다는 눈빛이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언제 카인과 만난 거야?"
"어제. 내가 녀석의 부하에게 성유로 화염병테러를 했지."
"하?"
나와 형제들은 하나 같이 말문이 막혀 카라마츠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진 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쵸로마츠였다.
"어쨌든 카인이 멈추지 않으면 아벨도 물러나지 않을 테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해."
한편 외출을 했던 쥬시마츠와 토도마츠가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 모여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쥬시마츠의 물음에 카라마츠가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너희에게 말해줄 생각이니 여기 앉아라."
두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말을 따라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그들에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을 설명하는 역할은 늘 그랬듯이 나였다.
…
…
…
걱정했던 것과 달리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는 끝까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인 만큼, 처음에는 분위기에 몰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전부터 쵸로마츠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듣기로는 약 한 달 전 토도마츠가 실수로 무거운 물건을 쵸로마츠의 발등에 떨어뜨렸을 때 그가 태연하게 그것을 주워주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쥬시마츠가 오소마츠의 손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난 뒤 토도마츠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천사와 악마는 그릇이 허락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몸에 들어갈 수 없는 거지?"
"응."
내가 대답하자,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소마츠에게로 향했다.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오소마츠형은 어째서 카인에게 YES라고 말한 거야?"
그 순간 모두의 관심이 오소마츠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고보니 그렇네. 왜 한 거야?"
토도마츠에 이어서 또 한 번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치마츠였다.
"전혀 기억 안 나."
오소마츠는 '전혀'라는 말을 강조하며 손사래를 쳤다.
"보나마나 다음 회차 로또당첨번호라던가, 그런 거에 넘어갔겠지."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는 '그랬던가…'하고 중얼거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울컥한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확실히 악마가 인간들을 유혹할 때 가장 먼저 사용하는 수단은 부(富)이지만, 그는 결코 카인의 시덥잖은 유혹 따위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아니야."
나는 그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소마츠가 카인에게 처음으로 빙의당했던 날을.
"나 때문이야."
그것에 대해 알리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두려 했지만, 오소마츠가 터무니 없는 오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오소마츠는…"
나는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죄책감의 무게를 견뎌내며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때 돌연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하고 약한 지진이 수시로 일어나는 일본인 만큼, 처음에는 모두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온갖 사물이 달그락거리며 떨어지고 깨지는 통에는 과연 그들이라도 당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더니 창 밖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 사나운 기세에 전등이 나갔다. 깨닫고 보면 어느새 천장과 벽에서 검은 점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불(유황)의 냄새가 진동했다.
"뭐, 뭐야… 그만둬…!"
혼란속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나는 오소마츠의 비명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방 안을 가득 채운 검은 연기가 그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바람을 뚫고 간신히 오소마츠에게 접근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스탑, 스탑─. 타임─."
카인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거짓말처럼 지진이 멈추고 바람이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 카라마츠는 카인의 후드를 멱살 쥐듯이 붙잡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를 위협했다. 은빛 날 위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작은 나이프였다.
"그런 위험한 물건으로 찔렀다가는 오소마츠도 다칠 거야. 내가 치료할 수 있지만 기분에 따라서는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있지. 난 그의 빈껍데기만 있어도 충분하거든."
카인이 말하자, 카라마츠는 이를 갈며 그의 옷을 놔주고 나이프를 거두었다.
"눈의 색이… 대체…"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가운데 쵸로마츠가 중얼거렸다.
"저게 카인이야."
거기에 이치마츠가 대답했다.
"모두의 앞에 서는 것은 처음인가? 다들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아줘. 긴장되서 내가 왜 여기 왔었는지를 까먹을 지경이야."
"시덥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꺼져라." 카라마츠가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무섭네, 카라마츠는─. 아무리 내가 밉기로써니 보자마자 무기를 들이댈 것 까지는 없잖아─."
아무리 불사신의 악마라고 해도 약점은 있다. 은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악마의 살갗에 닿으면, 그것이 염산처럼 천천히 그들의 살과 뼈를 녹여버린다. 카라마츠는 카인에게 몸을 빼앗겼던 날부터 줄곧 엑소시즘에 대해서 공부를 해왔다. 어떻게 하면 오소마츠를 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홀로 조용한 싸움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당시만 해도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뭐 하러 온 거야."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내 불안함이 이미 직감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인도 길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벨이 인간계에 내려왔어. 수천년만의 형제상봉을 위해서 나는 준비해야 할 게 아주 많거든. 미안하지만 오소마츠는 이만 내가 데려갈게."
"기다려!!!"
나는 또 한 번 불어닥치는 거센 바람에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카인을 향해 소리쳤다. 정확하게는 오소마츠의 모습을 한 카인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야만 했지만 바람이 그의 발밑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기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작별인사정도는 해야겠지."
카인은 단 한 번의 날개짓으로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 내게 진하게 키스를 했다. 그런 다음에는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벨을 조심해. 천사라 해도 그다지 상냥한 남자는 아니니까."
…
…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우리는 오소마츠가 사라진 것에 대해 그의 부모님께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고 둘러대는 것 외에는 달리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라디오를 통해 전세계에서 온갖 흉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의 걱정은 날이 갈 수록 커져만 갔다. 우리는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직감했고, 매일 방에 둘러앉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의논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내린 결론은 집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야. 일단 밖으로 나가자. 이 사단의 중심에는 카인이 있으니까, 재해가 일어난 지역에 가보면 녀석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동아시아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그 와중에 일본이 예외가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말할 것 같으면 남쪽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로 나라 전체가 상당히 어수선하고 우울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모두 자연재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난 이치마츠의 말에 동의한다."
카라마츠는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큰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었다. 오소마츠가 카인에게 허락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나였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 또한 그 못지 않게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서서 예배당에 갔고, 정오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어느덧 그의 목에는 은으로 빛나는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것이 단순히 종교에 의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저돌적으로 오소마츠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쥬시마츠는?"
반면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와 달랐다. 그는 아벨의 그릇으로서 자신이 현재 주요인물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태도로 하여금 갈등을 빚게 된 것이 우리의 관계가 멀어진 결정적인 계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이었다. 쵸로마츠는 종말을 멈추고 오소마츠를 구할 통로가 아벨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 생각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아벨을 조심하라는 카인의 충고가 신경쓰이기도 했지만, 당초에 천사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이타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한때 내가 그 집단에 속해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윗선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고, 그 밖의 사사건건한 일들은 깨끗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형이 아벨의 뜻대로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쥬시마츠의 대답을 듣고 가슴이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 말대로, 그는 내가 아닌 쵸로마츠의 편에 서 있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고 있는 본래의 쥬시마츠라면 결코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쥬시마츠는 오소마츠가 사라진 뒤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그것이 쥬시마츠의 겉모습 뒤에 감춰진 진짜 그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달라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그의 눈과 입은 더이상 웃지 않았고, 상냥했던 말투는 차갑고 딱딱하게 변했다. 조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다가오는 미래를 깊이 실감하고 있는 예언자이자 내 편에 서 있던 이치마츠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재해들이 카인의 짓이라는 거 다들 알고 있잖아. 이대로 가다간 어차피 모두 죽을 거야. 오소마츠형 한 사람의 희생으로 멈출 수 있다면 그게 최선 아닐까?"
아무리 실리를 따진다고 해도 '최선'이 반드시 옳은 선택지가 될 수는 없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니. 그런 식의 말을 듣고서는 친구로서 쥬시마츠를 아끼는 나라도 과연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심코 경멸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대신 말로서 같은 감정을 드러낸 사람은 토도마츠였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소마츠형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해도 우리는 그러면 안 돼. 형제니까."
그것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옳은 선택지였다. 그러나 쥬시마츠는 내 눈빛에도, 토도마츠의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쪽이 아름답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사치를 부릴 여유도, 자격도 없어."
그는 반론하려는 이치마츠를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대로 종말이 계속 진행되면 우리는 모두 죽게 돼.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
나와 형제들은 하나 같이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쥬시마츠를 쳐다보았다.
"쥬시마츠… 너… 요즘 왠지 이상해."
그의 마지막 말에 한해서는 같은 편이었던 쵸로마츠도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정말 쥬시마츠가 맞는 거야?"
"……."
쥬시마츠는 시선을 쵸로마츠에게 둔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때 돌연 그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것은 강한 바람이 불어닥치듯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우리의 의식을 멀리 날려버렸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