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로마츠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방에 있던 카라마츠 이치마츠 등이 모두 기절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방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던 쥬시마츠가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즈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터무니 없이 눈부신 빛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가 말하길──

 "내가 저들을 재워놓았다. 너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딱딱한 말투에 묵직한 음성은 쵸로마츠에게 곧바로 꿈속의 인물을 떠올리게 했다.

 "쥬시마츠의 몸에는 언제 들어간 거야?"

 "네가 나를 피하기 위해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을 때 부터다."

 아벨이 대답하자, 쵸로마츠는 시선을 잠시 가로 돌렸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꼭 내 동생이어야만 했어?"

 "사과하지. 하지만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카인을 포함한 네 명의 기수가 모두 모습을 나타냈으니, 그들이 더 큰 재앙을 일으키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아벨에게 물었다.

 "카인은 왜 종말을 일으키려고 하는 거야?"

 그러자 아벨이 대답했다.

 "기존의 것들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려는 거겠지."

 "넌 이미 과거에 카인에게 한 번 죽임을 당했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네."

 쵸로마츠는 아벨의 정곡을 찌를 의도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때는 무방비상태로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만 지금은 다르다. 단언컨대 카인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나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 네 허락이 반드시 필요하지."

 쵸로마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벨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게 YES라고 말해라."

 "말하면? 카인과 함께 내 형제를 죽이려고?"

 쵸로마츠가 또 한 번 쏘아붙였다. 아벨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카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거다."

 "자유?"

 "나를 믿어라."

 또 한 번 정적이 흐르자, 아벨은 탁자 위에 엎어져 있는 쵸로마츠의 그녀를 넌지시 쳐다보고는 돌연 입꼬리를 씩 올렸다.

 "보아하니 그녀는 다시 오소마츠에게 마음이 돌아선 모양이군."

 "닥쳐."

 쵸로마츠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끼어들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녀를 네게 돌려줄 수도 있다."

 "네 관섭 따위 필요없어."

 아벨은 이전과 사뭇 다른 태도로 쵸로마츠에게 조롱의 시선을 보냈다. 그의 두 눈이 '넌 네 형에게 여자를 뺏겼어', '그리고 아직도 질질 끌려다니고 있지.' 하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현명해져라. 이대로 가면 모든 게 끝나버리겠지만, 내게 맡기면 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쵸로마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그녀가 흐릿한 초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힘겹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하면… 안 돼…"

 그러나 이미, 쵸로마츠에게 그녀는 단순한 마음의 상처이고, 멍에일 뿐이었다.

 "미안해."

 …

 …

 …

 "나는 네 곁에 없는 편이 나을 것 같아."

 …

 …

 …

 그 날 이후 우리는 빈번히 악마의 습격을 받았다. 아마도 카인의 부하들이었을 것이다. 오소마츠가 살아있는 이상 카인은 싫어도 그와 감정을 공유해야만 하기 때문에 오소마츠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카인도 그 그리움을 견뎌내야만 한다. 오소마츠의 '돌아갈 곳'인 우리를 없애버리는 것이, 카인으로서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생각을 할 녀석이 아니라고 믿었겠지만,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그는 그저 사악한 악마일 뿐이다. 어쨌든 나, 토도마츠, 쥬시마츠는 악마들을 피해서 멀리 여행을 떠났다. 남부지방에서 펜션을 운영하고 계시는 松野家의 외가친척에게 2주간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리고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처음 그들이 추진하고자 했던 대로 재난이 일어난 곳에 가서 카인과 아벨에 대한 단서를 찾아다녔다. 카라마츠는 어느덧 라틴어주문까지 외울 수 있게 되었고, 이치마츠는 더이상 꿈을 보는 것에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큰 성장을 한 두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들을 믿었다. 다만 그들이 오소마츠와 쵸로마츠를 구하는 것보다는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더욱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더이상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기에.

 . . . . . .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에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다. 창문을 열어놓아 이불을 덮고 있어도 한기가 느껴지고, 풀벌레들의 정겨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조심스레 눈을 떴다. 며칠 전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달빛을 받아 은은한 보라색을 띠는 붉은 눈도. ──카인,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는 차가운 손을 나의 이마 위에 올려놓은 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는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듯이, 그의 눈이 조금 안타까운 감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마침내 입을 연 카인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평범한 안부인사였다. 다만 그것은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가벼운 말투가 아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는 듯한 무거운 말투였다. 그래서일까, 그가 내 친구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필요이상의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괜찮아. 너는?"

 "보다시피 멀쩡해. ─나는."

 카인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가로 돌리며 말하고는 내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는 불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됐어?"

 "말로는 어려우니까 직접 보여줄게."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듯이 나를 한 번 쳐다본 뒤 가볍게 검지와 엄지를 부딪혔다. 딱─. 그 소리와 함께, 밤하늘보다 더 짙은 어둠이 나의 시야를 까맣게 뒤덮었다.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나는 자신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윽고 그리운 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오소마츠의 모습을 한 카인, 쵸로마츠의 모습을 한 아벨.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도 있었다. 카인은 검은 아우라 속에 말 없이 우뚝 서 있었고, 아벨은 칼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조금 전까지 악마사냥을 한 듯 피와 유황을 뒤집어쓴 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탁이야, 카인. 역병, 전쟁, 기근이 내 명령만 기다리고 있어. 이제 죽음인 형이 도와주기만 하면 돼."

 "미안, 아벨.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대답은 같아. 그럴 수 없어."

 "어째서? 왜 이 시궁창 같은 곳이 파괴되는 것을 꺼려하지?"

 "잘못 된 것은 시간이 지나면 고쳐질 거야."

 "우리가 저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아!"

 "네 말대로 우리에게 인간들을 도울 수 있는 여지는 없어. 왜냐면 그들이 우리보다 낫거든."

 "이해할 수 없군. 형이나, 아버지나!"

 두 남자의 말다툼이 서서히 끝을 보일 때 즈음, 나는 충격과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종말을 주도했던 사람은 카인이 아니라 아벨이었던 건가. . . .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카인은 진작에 오소마츠의 몸을 차지했는데 꽤 오랜 시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재앙이 닥쳐온 것은 오히려 그를 막겠다던 아벨이 등장하고나서부터니까. 그동안 일어났던 인과관계를 반전시켜보면 모든 것이 설명됐다. 수천 년 전, 현재, 카인이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도.

 "난 너를 바로잡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아벨. 그만 포기해."

 "아니."

 아벨은 오른발을 뒤로 빼며 옆으로 빗겨 서고는 칼을 고쳐잡았다. 그리고──

 "서로 뜻이 다르다면 싸우는 수밖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메랄드빛 두 눈에 끔찍한 살기를 띠었다.

 …

 …

 …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하늘과 까만 잿더미가 되어버린 땅. 내게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곳의 풍경은 치열한 싸움이 일어난 직후라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연기가 걷히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은색의 예리한 칼을 하나씩 손에 쥐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카라마츠와 이치마츠였다. 그들은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인과 아벨의 모습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승자는 형인 카인인 것 같았다. 카인은 쓰러져 있는 아벨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잿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왼손에는 자신의 동생을 영원히 잠재울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만둬, 카인!"

 카인은 외침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라마츠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적의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카라마츠…"

 그의 목소리 역시, 자신의 적이라기보다는 동료 혹은 친구를 부르는 듯했다.

 "아벨은 이미 전투불능상태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어. 네 동생이라고."

 카인은 카라마츠의 말에 잠시 움찔, 했지만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끝내지 않으면 몇번이고 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게다가 내게는 의무가 있어."

 "무슨 의무?" 이치마츠가 물었다.

 "…신과 약속했거든. 아벨, 그리고 그와 결탁한 자들을 벌하기로. 그러기 위해서는 신분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어. 죽음(사신)이라는 건 눈속임일 뿐이고, 내 진짜 일은 나쁜 놈들 중에서 더 나쁜 놈을 잡는 거야."

 "지옥의 경찰이라도 돼?"

 이치마츠가 묻자, 카인은 '비슷해'하고 대답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쵸로마츠는 이 일에 아무 관련이 없다. 그저 희생자일 뿐이야. 너도 알고 있잖냐."

 "미안해. 이게 최선이야."

 카인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카라마츠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이윽고 그는 아벨의 멱살을 붙잡고,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안 돼!!! 쵸로마츠!!!"

 "형!!!"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카인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래도 카인이 그들에게 주술을 건 모양이었다.

 "아벨…"

 카인은 마지막으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아벨이 작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뭘 망설여… 빨리 끝내."

 아벨의 체념이 담긴 그 말에는, 아무리 악마인 카인이라 해도 차마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넌 천사야. 아름답게 빛나는 천사. 그런데 왜 또 이런 짓을…"

 "난 처음부터 천사 따위 되고 싶지 않았어! 망할 네놈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서 이렇게 된 거지! 네가 날 망할 위선자로 만들었다고!"

 아벨이 카인의 옷을 붙잡고 소리쳤다. 내게는 그 모습이 카인의 망설임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난 신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알아들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카인!!!"

 카인은 마지막으로 아벨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이 카인에 대해 한참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평소의 능청스러운 웃음도, 악마의 사악한 웃음도 아니었다. 그저 동생을 향한, 형의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사랑한다, 아우야."

 마침내 카인의 칼은 아벨의 심장을 찔렀다.

 …

 …

 …


 "쵸로마츠… 쵸로마츠…!!!"

 아벨의 최후는 눈부신 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그 빛에 둘러싸이는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인을 보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켜, 그의 멱살을 잡고 온갖 저주를 퍼부어댔다. 그러나 목이 찢어지는 듯한 기침이 그것을 방해했다.

 "네가 어떻게…!!!"

 "진정해."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쵸로마츠는 어딨어!!! 어딨냐고!!!"

 "아벨이 심장을 찔리기 이전에 이미 죽어 있었어. 인간의 몸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야."

 나는 더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통곡을 했다. 왜 하필이면 내 소중한 사람이 천사의 그릇인 걸까. 왜 죽어야만 했을까. 끝없이 나를 괴롭혀왔던 그런 의문들이, 그 순간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살아 있는 쵸로마츠와 만날 수만 있다면 모두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싶었다. 카인은 자신의 옷에서 내 손을 떼어낸 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날개를 펼쳐 장소를 떠나려 했다.

 "기다려! 이제 그만 오소마츠를 놔줘!"

 "그럴거야. 하지만…"

 그는 내게 등을 보이고 선 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살아서는 네 곁에 돌아오지 못해."

 "뭐…?"

 "오소마츠가 종종 피를 원했던 건 내게 영향을 받아서 육체가 점점 악마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야. 악마가 된다는 건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거고."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성에 커다랗게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래."

 그리고 더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설령 쵸로마츠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미안해."

 …

 …

 …

 "너에겐 마지막까지 이 말만 하게 되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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