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쵸로마츠는 흐릿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떠들썩한 형제들의 방에 무거운 적막이 맴돌고, 따뜻하고 편안하던 바닥이 차갑게 식어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던가,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꿈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밤하늘이나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그의 어깨너머로 환한 빛이 일어났다. 그 빛은 수면 위로 동그랗게 물결이 일듯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하루만이라도 좋으니까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래?" 쵸로마츠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빛이 사라졌던 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카인이 종말을 불러올거다."
"그래, 그 얘기 백 번도 더 들었어. 그리고 난 내 머리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지."
쵸로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진지하게 정신병원에 갈까 고민중이야.' 하고 덧붙였다.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한다만, 카인은 종말을 주도하는 네 명의 기수들(죽음, 역병, 전쟁, 기근) 중에서도 가장 강한 녀석이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세력을 넓혀나가겠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 녀석들을 막는데 왜 내 몸이 필요한 거야? 60억 인구중에서 왜 꼭 나야만 하냐고."
"그릇은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대대로 이어져온 것이다. 혈통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아무나 될 수는 없다."
빛의 목소리, 아벨은 쵸로마츠가 얼마나 불평을 하든지 찰나의 망설임 없이,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이에 쵸로마츠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터무니 없다 한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꿈. 꿈이라면 그 빛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수 많은 것들 중의 하나, 즉 자아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괴로웠고,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이것이 단순한 꿈이라면, 왜 그냥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 거냐."
아벨의 그 물음은 쵸로마츠의 허를 찔렀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는 어떤 황당한 일을 벌이든지 아무런 책임도 뒤따르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현재를 외면하려는 자신의 모습은 또 하나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벨에게 허락을 하는 것만이 이 지긋지긋한 꿈에 결말을 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넌 그저 내게 YES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좋아… 말할게."
쵸로마츠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설령 꿈이라 해도 누군가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면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 입을 떼려던 그가 멈칫 할 만큼 그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쵸로마츠! 말하면 안 돼!"
"일어나! 당장!"
…
…
…
"안 돼!"
"안 돼!!!"
…
…
…
캄캄했던 시야가 하얀 빛으로 둘러싸이는 순간, 쵸로마츠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한편 조금 전부터 떠들썩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대던 친구와 동생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인과에 대해 그에게 일러주었다.
모든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쵸로마츠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한 마디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자신의 부끄러운 망상으로 마무리 될 거라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 현실은 그의 뜻대로 원만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자신이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사실들을 두 사람이 알고 있다는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었다. 때문에 더이상 고민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다음에 아벨이 또 꿈에 나오더라도 절대 허락하면 안 돼."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쵸로마츠는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종말이 찾아올 거랬어."
그리고 또 한 번 뜸을 들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진심으로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때 누군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친구, 아니, 그의 연인이었다.
"쵸로마츠."
그녀는 쵸로마츠의 손을 붙잡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야."
"응…"
"우리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알았어."
쵸로마츠는 이어진 손으로부터 연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위태로이 떨리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도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지기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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