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이 떠난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평범한 나날들이 몇 달 째 계속 되고 있다. 창가에 앉아 햇빛을 쬐며 무심코 안심을 했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다시 긴장감을 되찾는다. 이 일상은 거센 바람 속에서 언제 깨져버릴지 모르는 유리창과도 같다. 깨진 유리조각을 다시 이어붙일 수 없듯이, 어느 순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 . .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는 이치마츠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그는 내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또다시 꿈속에서 미래를 보고 있을 것임에 분명했다. 마음같아서는 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꿈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윽…"

 이치마츠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작은 신음소리에 사념에서 벗어나 선명한 시야를 되찾았다.

 "또 같은 꿈이야?"

 내가 묻자,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썩을 장남만 봤고, 상대방의 얼굴은 못 봤어."

 "그렇구나."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슴이 초조해졌다.
 대체 언제쯤이면 보이는 걸까.
 언제쯤이면 알 수 있는 걸까.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

 "혹시 그 이름이 카인이야?"

 "응… 어떻게 알았어?"

 나는 끝내 결심을 했다. 이치마츠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좀 더 확실하게 도움을 구하기로 한 것이었다.

 …

 …

 …

 처음 이치마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에서 본 것들을 내가 알고 있다는 시점에서부터 무언가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는 기꺼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내 마음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여전했지만, 줄곧 올바른 사고를 유지하는 것을 방해해왔던 두려움이 사라진 듯했다.

 그 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캄캄한 복도를 지나서 형제들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돌연 문이 열리더니 이치마츠가 방에서 나왔다.

 "쿠소마츠가 안 보여."

 우리는 식구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인 채 온집안을 뒤적거렸다. 한참을 헤맨 끝에 결국 카라마츠를 찾은 곳은 옥상이었다. 그곳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카라마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혹시 벌써 아벨이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예감은 빗나갔다. 뒤를 돌아본 카라마츠의 눈동자가 선명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천사들 중에서는 그런 눈을 가진 자가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내게 능청스레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 목소리는 익히 알고 있는 악마의 것과 같았다. 카인이었다.

 "뭐야, 그 얼빠진 표정은. 카라마츠가 정답인 줄 알았어?"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 옆에 서 있던 이치마츠는 나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얼이 빠져 있었다. 카인의 눈, 도무지 자신의 형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의 목소리와 말투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넌… 꿈에 나왔던 그…"

 "안녕, 예언자씨."

 카인이 뒤돌아서 두 사람과 마주 섰을 때,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의 몸에는 또 왜 들어간 거야?"

 "그냥 장난이야. 인간들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을 보는 게 내 유일한 삶의 낙이거든."

 "여긴 왜 왔어?"

 예전의 나였다면 거기서 한 번쯤 웃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내게 카인의 시덥잖은 농담을 진지하게 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내 딱딱한 태도에도 카인은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너희가 감을 너무 못 잡는 것 같아서. 힌트를 좀 주려고."

 "………."

 그의 건방짐은 가히 나로 하여금 그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들게 했다. 하지만 힌트라는 솔깃한 말을 듣고는 그저 가만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설령 그것이 또 하나의 농담이거나 거짓말이라 해도, 궁한 처지에서는 가릴 것이 없었다.

 "도움을 줄 것 같으면 그냥 누군지 말 해."

 나는 카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눈 앞의 악마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우리 세계에서 적의 그릇을 미리 밝히거나 다치게 하는 건 반칙이야. 나니까 그나마 힌트라도 주는 거지."

 카인은 검지를 추켜올리며 '고마운 줄 알아.' 하고 덧붙였다. 그는 한 템포 쉬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릇이 될 인간은 악마든 천사든 빙의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몇 가지 징조를 보이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알아차리기 쉬운 것은 바로 상처를 입지 않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야. 반불사의 상태가 되는 거지."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의 입장으로서는 누군가 자신의 그릇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써둘 필요가 있을 테니, 충분히 납득이 되는 사실이었다.

 "나중에는 생각만으로 장소를 이동하거나, 물건을 던져서 부숴뜨릴 수 있게 될 거야. 아무리 둔한 너라도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

 내게 있어서 카인은 여전히 친구의 몸을 멋대로 차지한 재수없는 악마였고,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그에게 잘가라는 인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내게 알려준 것은 힌트 이상이었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가 일러준대로 확인을 해보면 형제들 중에서 누가 아벨의 그릇인지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1층의 주방으로 내려갔다. 싱크대 앞에서 노란 셔츠를 입은 쥬시마츠가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주머니께서 반찬을 만드시다가 잠시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밝게 웃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넨 그는 갑자기 배를 움켜쥐더니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쥬시마츠가 하고 있던 야채썰기를 마저 끝내려고 칼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그때 쵸로마츠가 나타나 내게서 그 칼을 뺏어들었다. 마침 방에서 오소마츠를 지켜보고 있던 이치마츠도 물을 마시러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쵸로마츠가 야채를 써는 동안 그릇을 준비하며 혹시라도 이상한 점은 없는지 그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야에 비친 선명한 붉은색.
 나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그릇을 놓쳐버렸다. 깨졌더라면 다쳤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쵸로마츠는 깜짝 놀라 내 손을 움켜쥐었고, 그제서야 자신의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언제 베었지?"

 그는 내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뒤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 상처에 붙였다. 살갗이 갈라졌다면 한 번쯤 눈썹을 찌푸릴만도 하건만, 그의 표정은 일절 변화가 없었다. 마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처럼.

 이치마츠는 사색이 되어 굳어버린 나를 보고 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갑자기 머리를 감싸쥐며 두통을 호소했고, 싱크대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세탁실 안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내게 확인사살을 해주었다.

 "기억 났어. 꿈에서 봤던 얼굴… 그거, 저 녀석이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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