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의 떨림이 여러 가닥의 음을 내고 하나의 선율을 만든다. 아무런 요량도 없이 단순한 트레이닝을 반복한 탓에 손톱이 빠질 지경이지만 적어도 하나의 곡을 완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 열심히 연습했구나." 무난한 느낌으로 연주를 끝내고 유녀 언니에게 칭찬 받았다. "음이탈을 하지 않게 조심하는 것만으로 한계예요." 뒷덜미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하니 그녀가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를 다루는 듯한. 하지만 그건 아마도 몇몇의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 하하하. "막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정도면 잘하는 거야. 어려서부터 유녀로 길러지고도 악기에는 영 소질 없는 애들이 있거든. 이쯤에서 남편에게 들려 주는 게 어때?" "아… 아직은… 부끄러운데요……." "기뻐할 테니까 걱정 마." 한 번 정도라면 기쁘게 들어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낼 수는 없다. 이런 연주로 화류가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잊었으면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바람인 걸까. "이제 곧 해가 진다." 해질녁이 되면 토니가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알리고 나를 집까지 안내해 준다. "언니, 저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보자." 악기를 챙겨 일어나서 언니들에게 먼저 인사를 받으면 웃는 얼굴로 답했다. 오랫동안 정보수집꾼으로 활동해 오면서 유녀들과 친분을 많이 쌓았다. 이 시간에는 다들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웬만하면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녀들에게는 이제부터가 진짜 하루의 시작인 것이다. "오늘도 안내해 줘서 고마워, 토니." "고마워할 것 없다. 나는 네 남편에게 큰 빚을 졌으니 말이야." 가게 밖에서도 여기저기 분주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손님들에게는 아리따운 유녀들만 보이겠지만 가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유녀보다 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이렇게 복잡한 거리를 나 혼자서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토비한테 돈 꿨어? 얼마나 꿨길래 그래?" "그런 게 아냐. 일전에 우리 막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고 말했지? 실은 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망이 없었어. 그때 토비가… '특별한 힘'을 써서 삼도천 강바닥까지 잠겨 버린 막내를 건져 올려 준 거다." "특별한 힘…? 뭐지…? 어쨌든 살아나서 다행이다." "하지만 병까지 치료가 된 건 아니라서 요즘에도 가끔…" 꾸르르르─. "어라, 방금 토리 울음 소리 들리지 않았어?" "이런… 막내의 상태가 나빠진 게 틀림없어." "얼른 가봐!" "너 혼자 두고 갈 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토비가 구하러 와줄 것이다. 두 사람은 이어져 있으니까. 다만, 여느 인법들과 마찬가지로 시공간 인술에도 제약은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어 두어야 하는데… 그건 지금부터 고민하면 되고, 일단 토니를 보내 줘야 한다. 소중한 아기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서 상황을 보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오겠다." "알았으니까 서둘러!" 퐁─. 소환술이 풀리며 토니의 기척이 사라졌다. 급한 대로 보내긴 했는데 막상 혼자 남으니 주변의 공기가 쌔하게 느껴졌다. 거리 한가운데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어서 건물 벽으로 붙었더니 거기에 의자 같은 것이 있기에 슬쩍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때, 거리 쪽에서 와장창 하고 엄청난 소리가 났다. 아마도 나를 제외한 모든 이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을 것이다. "이봐,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무얼 그리 펼쳐 놓고 있는 거야!" 웅성이는 소리만 들어도 이목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싸움이 붙은 것 같으니 가만히 있자. 그로부터 잠시 후, 소란이 일어난 거리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바닥의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토니…?"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토니가 아님을 알아차린 나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경계했다. "아가씨, 앞이 안 보이는구나?" "……." 외상을 당한 게 아니니 겉으로만 봐서는 내가 보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소란을 알아차렸을 때 나만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들킨 거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야 했는데. "이런 곳에 혼자 있어도 되는 거야? 안전한 곳에 데려다줄까?"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괜찮으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곧 해가 질 텐데 무섭지 않아? 근처의 가게에 들어가서 기다리자." "괜찮다니까요… 친구가 데리러… 꺄…!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아무리 거부의사를 보여도 통하지 않았다. 무섭고 당혹스러웠다. 깨닫고 보면 더 가까워져서 화들짝 놀랐다. 심지어 그 낯선 남자는 나를 끌어안고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이런… 벌써 몸이 차가워졌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다니면 어떡해?"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는 유녀가 아니에요! 여기엔 다른 볼일이 있어서…" "그게 요즘 써먹는 수법이야? 으응, 식상하지 않고 괜찮네. 오늘은 나랑 놀자." "이거 놔요! 소리지를 거야!" 도망치고 싶었지만 팔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아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 뭘 원하는지 알겠어. 억지로 끌고 가 주면 되는 거지? 아가씨 재밌네. 하하하." "아니야! 아니라니까! 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면 근처의 누군가 달려와서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화류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어느 싸늘한 공간에 이르러 남자가 발버둥치는 나를 들쳐업었다.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듯이 뛰어댔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다른 것은 생각치 않고 오로지 자신의 고동에 집중하려 애썼다. 토비… 빨리 와… 무섭단 말이야……. 아무것도 안 보여… 여기가 어디야……. "이 골목만 빠져나가면 내 단골 가게가 나와. 거기서 한 잔 하고 더 좋은 곳으로 가자. 아예 우리 집에 가는 건 어때? 나 얼마 전에 이혼해서 무지 외로운데 같이 살아 주라." "웃기지 마! 나는 유부녀란 말이야!" "유부녀? 남편은 어디 갔는데? 마누라를 이런 데 놔두고 사라지는 건 '아무나 데려가세요' 하는 거랑 똑같잖아. 버려진 거 아니야?" "내려줘! 내려달라고! 제발!" "위험한 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그건 곤란한데……." 갑자기 멈춰선 남자가 나를 바닥에 내려놨다.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옛날 같았으면 이를 악 물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어딘가의 귀한 따님처럼 보호받으며 지내왔기에 갑자기 찾아온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아가씨, 옷 내려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싫어!"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안 돼! 하지 마!" 찢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남자는 가감 없는 힘으로 내 앞섬을 확 벌렸다. "잠ㄲ… 이 문신은 뭐야? 몸 전체로 퍼지고 있잖아!" 두려움에 휩싸인 와중에도 나는 남자의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가슴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통증이 일어나 차갑게 식은 몸을 녹였다. 마치 내게 '괜찮다', '숨을 쉬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뭐, 뭐야!!! 대체 뭐냐고 이건!!! 저리 가!!! 그만둬!!! 아아아아악!!!" 카부토가 나를 죽이지 못했던 이유는 주인이 열리는 순간 도리어 자신이 환술에 걸려 미쳐 버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내 눈을 멀게 만든 남자는 상당한 고수였던 셈이다. 그런 사람이 대체 뭘 위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대로 평생 빛을 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했다.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 집에 가자." 이 목소리는─. "토비…?" "안아줄 테니까 이리와." "싫어…! 목소리만으로는 못 믿겠어…!" "……."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다. 이 남자는 적어도 내가 싫다고 하면 멈추어 준다는 것. 이윽고 무언가 다른─ 나도 모르는 사이 뇌리에 깊이 새겨진 소리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들려왔다. 끈을 잡아 당겨 매듭을 푸는 소리, 가면을 벗어서 내려놓는 소리… 남자는 내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세상에 이런 얼굴 가진 남자 나 말고 본 적 있어?" "(도리도리)" "그렇지? 네 남편밖에 없어." "토비……." 주인의 뜨거운 통증이 없었다면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상냥한 아픔이다. 처음에는 나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주고 있다. 토비에게 안기자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던 온기가 임무를 끝낸 듯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제 눈 깜짝할 사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 "말해두겠는데, 나는 이게 처음 배운 악기야." "아아." "초보자인 나를 화류가의 언니들과 비교하면 곤란해." "알고 있다." "정말, 정말, 서투니까… 여, 역시 그만두자!" "어허, 앉아라. 여기까지 힘들게 왔잖아. 같은 패턴을 몇 번 반복하는 거냐." 토비 앞에서 연주한다. 처음에는 내 남자가 유녀들의 연주를 그리워하는 것이 분해서 오기로라도 꼭 능숙해지고 말겠다 각오를 다졌지만, 유녀들이 몇 년 동안 피나는 연습을 거듭해 터득한 연주 솜씨를 의지만으로 따라할 수 있을 리 없다. "실수해도 괜찮다. 나를 위해 열심히 배운 것만으로 감동이라고." "그럼… 시작할게……." 마음을 가다듬은 뒤 떨리는 손을 현 위에 올렸다. 머리로 외운 음계는 순간적으로 잊어버릴 수 있지만 내 몸은 반복된 연습에 의해 손가락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리듬에 몸을 맏기니 마음이 편해졌다. "뭐야, 제법이잖아." "(삐끗)" 여유로운 미소도 잠시뿐. 토비의 말을 의식하고는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는 편이 좋겠군." 실수하면 안 돼!! 실수하면 안 돼!!! "잠깐만. 네 표정이 너무 재밌어서 연주에 집중이 안 된다." 토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더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궁극적인 목적은 토비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마지막까지 집중하는 거다. ─────. 긴장해서 몇 번인가 박자를 놓쳤다. 원곡은 빠르고 경쾌한 느낌인데 본의 아니게 편곡을 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연습 때 언니들의 귀를 아프게 했던 끔찍한 음이탈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썩 훌륭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었다. "어, 어땠어?" "나는 천상의 음악을 모른다만 과연 행복한 기분이 드는군." "놀리지 마… 다음에는 좀 더 그럴싸하게 연주해 보일 테니까……." "기대하고 있겠다. 허나 화류가에 가는 것은 그만두어라.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면… 그때, 어디든 가도 좋다." "(끄덕)" "착하지." "그리고…? 나름대로 애썼는데 답례 같은 거 없어…?" 뽀뽀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나. 몸을 베베 꼬며 수줍어하고는 살며시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의 어설픈 유혹에도 토비는 기쁘게 반기며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무엇을 바라는지 상상이 되었기에 능청스레 그에게 매달렸다. "…방으로 가자." 평소처럼 안아 올려 얼굴이 가까워지자 토비가 피식 웃으며 가볍게 키스해 줬다. 꿈을 꿀 때처럼 헤실거리는 내 표정이 보기 좋은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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