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을은 언제나 서늘하지만 습한 기후 때문에 이따금씩 더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었더니 뒷덜미에 땀이 맺혔다. 손을 뒤로 뻗자,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토비가 그것을 가볍게 저지한다.

  "무슨 책 읽는 거야~?"

  "육아 관련해서 미리 공부해 두려고."

  "후후~. 내가 닦아줄게~. 계속 공부해~."

  생각보다 땀이 많이 났는지 머리카락이 뒷덜미에 달라붙었다. 조금 부끄럽다. 그래도 토비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준다.

  휴일날임에도 일부러 소용돌이 가면으로 변신까지 하고, 딱히 무언가를 부탁하지도 않는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것처럼 단지 내 곁을 얌전히 지키고 있다.

  요즘들어 부쩍 상냥해진 것 같달까, 이럴 때는 보통 바람을 의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딱히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단지 '노력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더운 것 같은데 머리 묶지 그래~?"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묶는 게 싫은 거야~?"

  "싫다기 보다는 줄곧 그랬으니까."

  "이런 날에는 그냥 묶자~."

  "괜찮아, 내버려둬."

  "그러지 말구~."

  "괜찮다니까!"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는 뒤늦게 헉 했다. 어색하게 멀어지는 손. 나도 적잖이 당황스럽다. 토비는 단지 머리를 묶으라고 했을 뿐인데, 전혀 신경질을 낼 만한 일이 아닌데, 희한하게도 방금 무언가 울컥 하고 올라왔다.

  여전히 울렁거리는 게 두 번 건드렸다간 눈물까지 글썽일 것 같다. 내가 왜 이러지. 설마하니 아직도 린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 미안해… 토비… 나는…"

  "괜찮아~. 왜 그러는지 알아~."

  '왜'. 예전의 나는 왜 그렇게까지 오비토를 찾으려고 했을까. 다시 만난다고 해서 오비토가 나를 봐주는 것은 아니다. 좋아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의 옆자리가 아직 비어 있다면, 어쩌면, 나는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린이 되어서라도 오비토에게 사랑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네가 마음속으로 누굴 생각하든 상관없어~. 약속한대로 나한테 돌아와 줬으니까 그거면 됐어~. 조금 쓸쓸해도 참을게~."

  "아니야… 그런 거 싫어……."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어쨌든 토비와 내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겨나는 것은 싫다. 행여 멀어질까 토비의 품에 뛰어들어 꼬옥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싸온다. 마음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져서 지그시 눈을 감는다. 마치 이상한 병이라도 걸린 것 같다. 이렇게 행복한데 뭐가 부족한 걸까.

  "나는 노비타 씨의 대신이 될 수 없지만~. 적어도 너의 머리를 묶어줄 수 있어~. 그리고 '지금도 정말 이뻐'라고 말해줄 수 있어~.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

  토비가 나를 다시 의자에 앉힌다. 검은 장갑을 벗어 놓은 뒤 흐트러진 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모은다. 평소에 전혀 묶지 않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머리끈 같은 건 없다. 급한대로 서류를 고정하는 데 쓰는 끈을 가져다 묶었지만 그런대로 말끔한 포니테일이 되었다.

  "지난 번에 봤을 때는 '잘 어울리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어떡하지~.;; 귀엽다~.;;;"

  "이상하지 않아…? 역시 묶지 않는 편이……."

  "진짜 다~. 우와~. 뭔가 가슴에 찡 하고 왔어~.;; 위험해~.;;;"

  "?"

  두 손으로 가면을 덮은 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어쩐지 당혹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진정이 된 걸까. 토비가 뒤에서부터 나를 감싸안는다. 단단한 두 팔에 힘이 들어가며 내게도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그리움과도 같은.

  "오늘 밤에는 이 모습으로 있어줘~."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지만. 조용히 얼굴을 붉히며 토비의 팔을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갑자기 뒷덜미가 드러나서 어색한 기분이긴 해도 익숙해질 때까지 종종 이렇게 묶어야겠다. 남편이 원한다는데 그 정도를 못해줄까. 솔직히 말하자면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움과 더불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있잖아~. 이런 설정은 어때~. 마왕으로부터 도망쳐온 가 마침내 용사와 만나서 재회의 기쁨을 침대 위에서 나누는~. 오늘은 나를 오비토 씨라고 생각해도 좋아~. '오비토 님~ 아잉~♡'이라고 해줘~."

  나야말로 부탁이니까 두근거림만 느끼게 해줘. 거기까지가 딱 좋으니까 이상한 말 덧붙이지 마. 예전에, 그, 부끄러운 소리를 듣게 했던 건 미안하지만, 19살과 똑같이 유치한 농담을 할 필요는 없잖아. 하여간 남자들이란.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못 들겠다.

  "아무리 뭐래도 오비토는 내 첫사랑이야. 두 번 씩이나 그런 식으로 더럽힐 수는…"

  "첫사랑도 좋지~. 우리 나이쯤 되면 상당히 위험한 단어로 들리잖아 그거~. 마음 없는 결혼을 해서 불행하게 살고 있다가 뒤늦게 첫사랑의 남자와 불이 붙은 거야~. 꺄~~~."

  망상은 작작 하시지. 확 밀어내고 싶지만 신이 난 토비가 내게 딱 달라붙어 부비적거린다. 부비적부비적. 머리모양은 둘째 치더라도 변태의 취향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다.

  애당초 침대 위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즐길 수 있는 건가. 어째서 나는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짜릿한 기분을 느끼는 걸까. 이제 보니 나도 한참 갔다. 전부 토비 때문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나의 첫사랑이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변해버렸다면. 지금의 토비와 같다면. 꽤나 위험한 상상을 해버렸다. 역시나 떨떠름한 기분과 짜릿한 기분이 동시에 든다.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부 토비가 나쁘다. 토비의 사랑이 지나치게 강렬한 탓이다.

  "농담 아니야~."

  언제 가면을 비껴쓴 건지, 갑자기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닿는다.

  "조금 더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내 욕망, 전부 받아줘~."

  낮은 숨소리와 작은 중얼거림이 귀에서부터 야릇한 감각을 퍼뜨린다. 토비가 나를 원한다면 기쁘지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은 반칙이다.

  부드럽게 스치는 손길. 목과 귀언저리에 차례로 입을 맞춘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다.

  "너는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나만의… '나의 꽃'이야."

  언제나 하늘의 태양을 올려다 보는 여름의 해바라기. 과실처럼 이파리 밑으로 자라나 달콤한 향기를 퍼뜨리는 봄의 등나무. 두 개의 서로 다른 꽃이 머릿속에서 교차된다.

  나는 무슨 꽃일까. 어느 쪽을 더 닮았을까. 미래는 너무 눈부시고 과거는 너무 어둡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그래서 초조한 기분이 들 뿐,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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