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했을 뿐인데 주책이라니 너무하네~."
"시끄러웟! 보지 마!" "네애~." 하여간 대답은 잘해요. 속으로 투덜거리며 널찍한 치마를 끌어모은다. 더 이상 밑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애당초 닌자가 숲에 가면 나무 위로 올라가기 마련이잖아~. 어째서 그런 치마를 입고 온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옷이 다 헐렁해져서 맞는 게 이것 뿐인걸!" "사람 찾을 시간에 옷이나 사입지~. 으이구~." 아니 근데 저 아저씨가. 빠직 하고 혈압이 치솟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조심스레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는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온지라 좀 더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싶지만 일단 조금 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고요한 숲.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사실 토비에게는 이미 몇 번씩이나 알몸을 보였으니 속옷이 보인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이제 와서 화를 내는 것도 우습겠지. 하지만 그가 능청스레 던지는 시모네타가 내게 일일이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날렵한 새처럼 순식간에 절벽 아래서 내가 있는 곳까지 올라오는 토비. 가볍게 도약하는 것까지는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대뜸 내 무릎을 베고 눕는다. 집에 있을 때와 똑같이 아주 스스럼없다. 누가 와서 보면 속으로 욕할 텐데, 정말이지. "저리 가!" "모처럼의 데이트니까 화내지 마~. 이런 건 오랜만이잖아~." 떼어내려 해도 무릎을 꼭 잡고 버티니 소용이 없다. 이제는 화를 내는 자신이 오히려 바보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어차피 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될 뿐인데. "주책이야, 주책!" "언제는 귀엽다고 그러더니~. 벌써 사랑이 식은 거야~?" 누가 널 사랑한대. 그렇게 반박하고 싶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문득, 데이다라와 사귀고 있을 때 그가 얼마나 어른스럽고 좋은 애인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 그립고도 서글퍼졌다. 고개를 모로 향한 채 녹색 풍경에 시선을 던진다. 그러자 뜻밖에도 토비가 스스로 몸을 일으켜 나와 마주앉는다. "~. 나는 이 세상을 딱히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도 상관없어~." 의아한 표정으로 토비를 돌아본다. 두꺼운 가면은 평소와 다름없지만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상당히 차분해진 느낌이다. "지금의 내가 싫다면 성격도 말투도 바꿔줄게~. 넌 어떤 남자가 좋아~?" "……." 갑자기 어떤 남자가 좋냐고 물어도, 뭐라 답해야 하는 거지. 애당초 토비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다. 어떻게 사람이 쉽게 변한단 말인가. 누군가 원하는대로 한순간에,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글쎄… 난 그냥… 토비 네가 조금은 진지해졌으면 좋겠어……." 만약 토비가 나를 위해 노력해준다면. 딱히 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장난스런 놀이에 시덥잖은 농담 뿐인 그런 관계가, 약간, 아주 약간만이라도 변했으면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진지하게라~. 단순한 듯하면서도 어렵네~. 뭐 어쨌든 한 번 해볼게~." 토비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눈을 감는다. 그는 명상을 자주 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렇게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자기가 충분하다고 여길 때까지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토비…?" 말도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변할 리가─. "토비… 무슨 말 좀……." "잠깐이면 된다. 기다려라."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중저음으로 바뀌어서 흠칫 놀랐다. 설마하니 정말 변하는 것인가. 닌자에게 그 정도는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단순히 목소리 뿐만이 아니다. 아예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정적과 침묵이 흐른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 토비가 눈을 뜬다. 아까는 그림자에 가려졌어도 그의 눈이 동그랗고 맑았는데 지금은 반대다. 그림자의 일부처럼 날카롭고 흐릿하다. "오랜만에 바람을 쐬는 것이다. 좀 더 들떠 있어도 좋지 않나." 토비가 입을 여는 순간 또 한 번 흠칫 놀라 어깨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의 말투가 생각보다 부드러워서 뭐랄까, 조금 안심이 된다. "가만히 있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내가 어떻게 변했으면 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마치 다른 사람 같지만 기본적으로 나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비슷하다. 원하는대로 바꿔주겠다는 의사도 그대로. 어쨌든 토비임에는 분명하구나.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놀라움과 불안함이 사그라들자 이제는 호기심이 나의 머릿속을 채운다. 토비는 의외로 뛰어난 닌자일지도. 어쩜 이렇게 간단히 분위기를 바꿀 수가 있지. 만약 여기서 변신술까지 쓴다면 이 남자가 토비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와……." 바닥에 손을 짚고 토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얼굴 중에 내놓은 곳이라고는 눈 하나 뿐인지라 본의 아니게 계속 눈에 시선을 맞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싸와서 깜짝 놀랐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내린다. 나는 당황해서 지금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다. 이윽고 평소와는 다른 중후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온다. "너는 내가 다가가면 피하려 하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다가오는군." 머리카락을 빠져나간 손이 그대로 어깨를 감싸오는가 하면 토비가 나를 품에 안는다. 워낙에 듬직한 몸이라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상냥하게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딱히 처음도 아닌데 분위기 때문인지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있어라. 너무 내 눈치 볼 것 없어." 쓰담쓰담. 지금은 여러가지로 생각해야 할 타이밍인데, 그의 손이 너무 기분좋아서 그런 것은 다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 토비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이따금씩 느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이런 토비라면 정말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처럼이니 오늘은 내가 응석을 부려볼까. 토비의 허리를 끌어안으니 듬직함이 그야말로 한몸에 느껴진다. 넓은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씁쓸하면서도 달달한 토비의 냄새를 맡는다. 정말 토비가 맞는데 아닌 것 같고, 무섭지만 부드럽다. 그래선지 더 아찔한 기분이 든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토비가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준다. 넋을 놓고 있다가 그의 손이 귀를 스치는 순간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젠장, 아무리 뭐래도 토비인데. 전부터 줄곧 느꼈던 것이지만 그의 손은 위험하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 같은 것이다. 지금은 상냥한 손길로 달래주고 있어도, 언제 또 나를 아프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 기분 좋은 것은 아프고, 아픈 것은 기분 좋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은 위험하다.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지 않으면. 이제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토비, 원래대로 돌아와줘." "어째서. 벌써 질렸나." "그런 거 아냐." 오히려 너무 빠져들까봐 무서워서 그래. 너는 결코 내게 당근만 주는 녀석이 아니잖아. -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토비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그 동안 정말 괴로웠고 속으로 욕도 참 많이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나의 본래 모습이 그리워진다. 어쩌면 차라리, 그냥 익숙한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어떡하면 좋은지 가르쳐줘~." 어느덧 본연의 말투로 돌아온 토비.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끌어안는다. 이번에는 나로부터, 늘 그래왔듯이 그가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도록 한다. 아니나 다를까 부비적부비적.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언제나 나의 일이다. "토비 너도 앞으로 계속 그렇게 있어. 내 생각 같은 건 너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안 그래?" 자신의 입으로 말하니 씁쓸하기 그지없지만 딱히 아프지는 않다. 왜냐면 그게 사실이니까. 토비는 내게서 원하는 것을 얻고, 나는 토비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다. 단지 그 뿐이다. "맞아, ~." 어쩐지 토비의 목소리가 나른하다. 그 사이 지친 것일까. "하지만 내가 너한테 줄 수 없는 게 있다면… 미안해……." 아니, 나른하다기보다는 쓸쓸하게 들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알수 있다. 분명 토비에게도 닌자의 능력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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