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개질이나 TV를 보는 것 외에 뭔가 시간을 떼울 만한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어느 인형 가게 앞에 붙은 전단지를 보게 됐다. 인형 만들기 무료 강습. 그다지 손재주가 없는지라 고민이 되었지만, 경험 삼아 한 번 해보는 건데 뭐 어때 하며 수업을 받고 돌아왔다.
그리하야 내 첫작품 '오비토'가 기적과도 같이 온전한 모습으로 탄생하였으니.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의 천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나마 비슷한 남색으로 대체했다. 그래도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나 옷의 디테일 같은 부분은 꽤 훌륭하게 재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토비, 이거 봐. 누군지 알아 보겠어?" "……." "귀엽지, 귀엽지!"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서툰 솜씨로 만든 인형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만족하고, 이 인형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이걸 품에 안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이어져 있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달까. "(끄응)" 아니, 근데 토비 이자식은 아까부터 뒤에서 왜 이렇게 들러붙는 거야. 무거워 죽겠네. 또 삐칠까 봐 대놓고 떨어지란 말은 못하겠고, 덩치가 곰 같아서 팔 한 짝만 올리고 있어도 숨이 턱 막힌다. 아이고, 오비토가 이 녀석 대신 내 옆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지금처럼 오히려 내 쪽이 꼬옥 끌어안고 놓지 않을 텐데. 뽀뽀하고, 부비부비 하고, 아주 그냥, 아유우우우, 생각만 해도 귀여워라. "~." 달콤한 꿈을 깨뜨리는 듯한 부름에 대답을 하지 않자 토비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어어억, 숨 막힌다고 이 자식아. 원하는대로 얌전히 안겨줬으면 됐지 또 뭐가 필요한 거야. 설마하니 부족했던 건 아니겠지. 할 거 다 해놓고 왜 또 부비적거려. 진작에 해 떨어졌는데 연애 놀이는 내일 하면 안 될까. 난 지금 오비토와 시간을 보내고 싶단 말이야. 저리가, 훠이, 훠이. "~. ~." "zZZ…;;" 곰이 내게 흥미를 잃게 하려면 죽은 척이 답이랬지. 지금은 쥐 죽은 듯이 자는 척을 하자. 내가 생각해도 좀 티나는 것 같지만 계속 반응이 없으면 토비도 포기하고 잘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으어어어억! 이불이 들썩이는가 하면 토비가 내 위로 올라온다. '이런 짐승'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게감은 물론이고 단단한 몸이 나를 덮치며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진다. 토비 녀석 때문에 오비토 인형을 손에서 놓쳤다. 침대 밑으로 떨어져서 당장에 줍고 싶은데, 맙소사,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시모네타가 또 다시 나를 괴롭힌다. 스윽, 토비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린다. 아까 했던 게 부족했구나. 아저씨 주제 참 건강도 하셔라. 곰의 발정기인가. 이렇게 되면 역시 체념하는 수밖에 없겠지. 기력이 딸려서 더는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된다. 더욱 짓궂게 몸을 밀착해 오는 토비를 두 팔로 감싸안으며 눈을 감는다. 그런데, 토비가 갑자기 가면을 살짝 벗는가 싶더니─. "후우─." 뜨거운 입김을 내 귀에 불고는, 가면을 다시 고쳐 쓰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큭큭큭 웃는다. 발끝에서부터 저릿한 느낌이 확 올라와서 막을 틈도 없이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갔다. 아무리 뭐래도 어째서 몸이 이렇게,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거지. 생각해 보니 토비의 숨이 직접적으로 내 피부에 닿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처음일 수밖에 없다. 그 동안 토비와 관계를 가질 때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키스를 하지 않았고, 하물며 가면을 벗는 일도 하고나서 딱 한 번, 그 이후로 없었으니까. "~. 너, 언제나 선배나 내게 나쁘다, 나쁘다, 말했지만~. 너도 만만치 않은 거 알아~?" "무, 무슨 소리야…" "대체 네 마음 속에 남자가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선배도 좋아, 나도 좋아, 심지어 꼬맹이까지~. 아하하하핫~. 적어도 난 다른 누군가에게 '좋아' 같은 감정은 갖지 않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나보다 더 잔인해~. 알아~? 응~?" "……." 방금 토비의 말, 들리는대로, 내 멋대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토비는 더 이상 하늘의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토비는─. 그 동안, 토비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던 모습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뒷모습, 쓸쓸한 눈빛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을 지켜봤던 나 또한 할 말은 많다. 솔직히 그녀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녀만 없었음, 토비도 평범하게, 우리도 이렇게까지는─.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언제나 한 명 뿐이야." "그게 누군데~? 궁금해~. 가르쳐줘~." 스윽, 그 와중에도 허리를 천천히 움직여 나를 농락하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내 대답 따윈 아무래도 좋으면서. 구태여 입 밖에 내기 힘든 것을 묻는 그가 얄밉다. 하지만 좋아하기 때문에 얄밉다는 생각도 드는 거겠지. 그리고… 그래서, 여전히 같이 있는 거겠지. "토비, 난 아니란 걸 알지만 보통 상대방이 이런 식으로 관심을 보이면 자기를 좋아한다거나,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여자도 남자 만큼이나 착각을 잘 하는 동물이거든." "아하하하하하핫~.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 너에겐 그저 웃긴 얘기겠지. 그러니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했잖아. 적어도 난, 너에 대해서 만큼은, 착각 같은 거 하지 않아. 더 이상. "나 지금…" 문득 토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가라앉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살며시 움켜쥔다. 내게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토비. 가면 속에서 울리는 숨소리는 직접 피부에 닿는 것 만큼이나 나를 자극한다. "질투하는 거 맞아~." 이런 거짓말 같은 속삭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잠시 의식이 멈춘다. 그 빈틈을 노려 토비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결국엔 또 하는구나. 아까 했던 것으로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어째선지 괴롭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는 내가 어딜 가서 뭘 하건, 누구와 붙어먹건, 관계 없다는 듯이 무관심했잖아~. 내 앞에서는 온갖 청승 다 떨면서, 뒤에서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그 녀석에게 모든 걸 내어줬잖아~. 안 그래~? 아하하하하핫~." 정말 나를 놀리고 싶은 건지, 상대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여유도 없이, 내 기분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예전처럼 그는, 나와 이어진 채 멋대로 자기 허리를 움직인다. 비뚤어진 마음이 내게 전해져서 나까지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니, 나도 이미 비뚤어질대로 비뚤어졌나. 토비의 말대로 그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부정해 왔다. 걱정 되어도 아닌 척, 화나도 아닌 척, 좋아도 아닌 척, 그리고… 그리고… 아마도 그게 토비에게는 '무관심'으로 보였던 거겠지. 내 감정 따윈 얼굴에 훤히 드러난다고 데이다라가 말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애당초 나는 토비와 그다지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한 쪽이 고개를 들기 힘들 만큼 지쳐 있었으니까. "아~. 젠장~. 그래도 네 몸은 언제나 따뜻해~. 하하핫~." 언제나와 같이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지만, 오늘은 왠지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다. "따뜻해… 따뜻해……." 서서히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가만히 멈추고, 숨을 고른다. 그가 고개를 모로 돌려 침대 옆의 바닥을 응시한다. 그곳에 떨어져 있는 인형을 보며 눈썹을 찌푸린다. 그리고 내 쪽을 다시 돌아보는데, 왠지 모르게 눈빛이 차가워졌다. 불안을 느끼는 순간 그의 손이 내 입을 덮친다. 두 개, 세 개의 손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와 내 혀를 농락한다. 키스는 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마구 괴롭히고 싶은가 보다. "음음… 윽…" 덥석,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토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뜻밖에 그가 순순히 손을 거두어 들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 보는 그의 눈이다. 나를 비웃는 듯했던 차가운 눈동자가 다만 나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친다. 그리고 이제는 토비도 괴로움을 느낀다. 나처럼 숨이 막히고, 답답하고, 그리고─. "아아~. 기억났다~." "?" "이 따뜻함~. 그렇구나~. 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떠올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더니, 토비가,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싼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 마치 그리운 무언가를 어루만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랬구나~… 아하하하핫~……."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가 내뱉었던 만큼의 숨을 들이쉬며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리고 조금 차가운, 쓸쓸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 너, 지난 번에 당장이라도 나를 떠날 듯한 말투로 말했었지~. 미안해라든가, 고마워라든가~." "……." "어디 마음대로 해 봐~. 하하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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