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하여금 '이 녀석은 나를 괴롭히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남자. 그런 토비이지만 이따금씩 그가 나에게 흥미를 잃을 때가 있다. 바로 그런 날이 며칠 동안 계속되면 영락없이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그의 뒷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무심하게 돌아선 채 온종일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 그것을 다시금 깨닫고 나는 별 수없이 인정한다. 그러면 그의 등이 내게 이렇게 말한다. '역시 너는 안 돼'. 지금까지 같은 말이 수십 번 내 가슴을 찔렀다. 생각했던 것보다 깊은 아픔이었다. 왜냐면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 옛사람과 즐거웠던, 행복했던 기억들. 그것이 하나하나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진다. 물론 괴로운 기억도 있지만 이제 더는 미워할 수도 없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꿈에서라도 닿고 싶다.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끝내 데이다라를 놓지 못했듯이 토비에겐 아직 그녀가 필요한 거겠지.

 창틀에 기대어 앉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던 토비가 문득 코트 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파란 천 위에 얇은 금속을 덧대어 만든 서클렛. 멀어서 문양이 잘 보이지 않지만 천의 색깔로 알 수 있다. 나뭇잎 마을 닌자의 것이다. 다른 마을들은 대부분 회색, 약간 푸른빛이 도는 회색인데, 유독 나뭇잎 마을이 저렇게 짙은 푸른색의 천을 사용한다. 초대 호카게 하시라마가 마을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던 마다라의 머리카락 색을 형상화해서 그렇게 정했다나 뭐라나.

 토비가 가진 서클렛은 꽤 세월을 탄 것으로 보인다. 나도 어렸을 때 이마에 하고 있었던 서클렛을 아직 보관하고 있다. 새것이라면 하얗게 반짝여야 하는데, 내것도 저것과 같이 약간 어두운 회색으로 변색되었다. 그만큼 오래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검은 장갑을 낀 토비의 손끝이 변색된 서클렛을 안타깝게 쓰다듬는다. 혹시 자신의 것인가. 아니, 그렇다고 보기에는 내가 자신의 것을 볼 때 느끼는 감정과 다르다. 그보다 짙은 안타까움. 그래, 저것은 토비가 그리워하는 '그녀'의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마지막 유품이겠지.

 솔직히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나는 꼭 내가 아니더라도 토비가 언젠가 그녀를 잊고 새로운 사람과 행복해졌으면 한다. 그래서 지난 번과 같은 일을 벌인 것이었고 더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토비의 입술이 손등에 닿았던 이후로 자꾸만 욕심이 난다. 결국에 나는 끝까지 '대신'으로 남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후회하게 되더라도 한 번 부딪혀 볼 것인가.

 나는 토비를 좋아한다. 당연히 '대신' 정도의 존재인 채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인데, 토비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의 눈빛이, 그의 말들이. 어쩌면 내게도 조금은 진심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다. 물론 토비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서 그냥 확 저질러 버릴까 하는 충동이 생긴다.

 지금 토비에게 '솔직히 나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봤자 그럴싸한 대답은 들을 수 없겠지. 보나마나 또 시덥잖은 애인놀이가 시작될 것이다. 나는 토비의 진심이 알고 싶다. 내가 정말 대신일 뿐인 건지, 그렇다면 하다못해 앞으로 나와 잘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확인받고 싶다.

 터벅터벅, 토비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예상했던대로 토비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는 듯 나를 외면한다. 토비에게는 마치 내가 이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 나의 손이 저절로 멀어진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온다.

 아니, 아니야. 그래도 한 번 해보자. 손을 꽉 쥐고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토비의 손에서 재빠르게 서클렛을 낚아챈다. 그가 당혹스러움을 느낄 틈도 없이 물러나서 등 뒤로 숨긴다.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던 토비의 눈동자가 점점 날카로운 빛을 띠는가 싶더니, 무슨 짓이냐 하는 것도 없이 내게 살기를 뿜어댄다.

 "~. 혹시 펜던트가 보고 싶어~? 그런 거라면 줄게~. 그냥 너한테 완전히 돌려줄게~. 그러니까 그거 이리 줘~. 나한테 소중한 물건이야~."

 "……."

 나는 토비를 좋아한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러한 생각이 다시 한 번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상처 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 같은 건 없다. 토비도, 나도, 언젠간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러니까 토비, 우리 더는 이러지 말자.

 툭─. 치이이익──.

 변색된 금속을 떼어내 바닥에 던지고, 토비가 보는 앞에서 푸른색 천을 갈기갈기 찢는다. 내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토비의 손이 내 목을 덥석 붙잡아도 딱히 억울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꽈아악 조여오는 힘에 숨이 끊어질 것 같지만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다음에 아직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면, 그리고 토비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내 펜던트도 기꺼이 부숴뜨릴 것이다.

 "컥…! 커헉…!"

 "네가 감히…"

 토비의 사륜안, 검은 눈동자에 피가 가득찬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 그의 심장에서 나는 피겠지. 내가 괴로운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역시 견디기 힘들다. 일순간 자신의 행동에 약간 후회가 되기도 한다. 나까지 죽어 버리면 누가 토비를 달래주지. 점점 숨이 부족해져간다.

 나는 이대로 토비에게 허망함만 남긴 채 떠나게 되는 걸까. 솔직히 가슴 한편으로는 설마 나를 죽이기까지야 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의식이 멀어진다. 눈앞이 캄캄하다. 내 생각이 틀렸다. 토비는 이렇게 내 목숨을 쉽게 끝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나마 내게 상냥했으니까 한때 토비를 몸서리치게 두려워했던 기억을 잠시 잊고 있었다.

 창밖에 내리는 비, 그리고 천둥소리가 토비의 존재감을 더 강하게 만든다. 내가 체감하기로는 거의 폭풍과 다름없다. 살고 싶어 발버둥 쳐보지만 벗어나는 것은 무리다. 젠장, 정말 이게 마지막인가. 어차피 죽일 거라면 얼굴 한 번만 보여주지. 가면속에 가려진, 그늘 속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무섭다.

 아아, 역시, 그동안 나는 그녀의 대신일 뿐이었구나.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내가 죽으면 토비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털고 다른 여자를 찾을 것이다. 꼭 내가 아니어도 된다. 그저─. 그저 약간의 따뜻함만 가지고 있다면──.

 "토… 토비…"

 끔찍한 살기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걸까. 아니, 다행히 전해졌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까딱인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꽈아아악─. 몇 분, 몇 초 정도 남았을까. 이대로 가다간 분명 죽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을 짓누르며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한계라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없는 비명을 내지른다. 그래도 나는 토비에게 해야 될 말이 있다.

 "ㅅ… ㅎ……."

 10초? 5초? 딱 한 마디면 된다. 1초도 안 걸리는 짧은 말이다. 듣기 싫은 목소리라도 좋으니 나와라. 제발.

 "사…랑해……."

 제대로 말했나. 토비에게 전해졌나. 설마하니 이상하게 웅얼거리는 것으로 들린 것은 아니겠지. 뭐가 어쨌든 끝이다. 이미 무거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를 점점 더 깊은 지하로 이끈다.

 데이다라 듣고 있나. 너 죽으면 내가 평생 너만 그리워하며 살 줄 알았지. 천만에. 큰 오산이야. 사실 난 진작부터 토비를 좋아하고 있었어. 어때, 약 오르지. 열받지. 쌤통이다.

 뭐, 그래도 너는 분명 내 조강지부야. 그러니까 빨리 마중 나와. 여긴 너무 추워. 너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언제까지 이런 곳에 방치해둘 셈이야. 나 지금 차여서 무지 쪽팔리거든? 맘 같아선 당장 울며 뛰쳐나가고 싶거든? 토비가 있는 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어. 마지막으로 듣게 될 토비의 말이 잔인한 거면 어떡해.

 "……."

 아, 토비가 나를 부른다. 나 아직 살아 있구나.

 "……."

 잠깐! 이거 뭐야! 점점 뜨거워지는 거 뭐야! 설마하니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너무하잖아! 염라대왕 잠깐만! 죄송합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죄송합니다! 불은 좀 봐주세요! 불에 타는 고통만은! 으으으으!

 이대로 떨어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꽈아악─. 무언가 나를 다시 끌어 올리듯 잡아당긴다. 타오를 듯이 뜨거웠던 것은 불 따위가 아니다. 다름 아닌 슬픔의 눈물. 차갑게 식으면 그 위로 다시 뜨겁게 스며든다.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필사적으로 알리는 것 같다. 나 아직 여기 있다고,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아, 토비, 너구나.

 작은 빛 한줄기가 어둠속에서 나를 부르는 듯하더니 점점 커지며 나의 시야를 확 뒤덮는다. 조금씩 돌아오는 감각. 아직 늦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발버둥쳐 보자. 나의 간절함에 답하듯이 정겨운 풍경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난다. 익숙한 천장, 창밖으로 내리는 비, 천둥소리,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냄새.

 "헉…!!!"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비집고 들어와 가득 채운다. 살았구나. 그런데 무겁다. 저도 모르게 하늘로 뻗었던 손을 떨어뜨리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진다. 단단한 남자의 몸. 반대쪽 손에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가면이 만져진다. 이럴 수가. 지금 토비 녀석 맨얼굴인 건가.

 "ㄱ면… 가면…!"

 "응…?"

 "가면 써…! 빨리…!"

 "아… ……."

 살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리고 처음 내뱉은 말이 '가면 써'다. 이렇게 갑자기 얼굴이 보여지면 토비가 상당히 곤란할 것 아닌가. 얼굴은 나중이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소용돌이 가면이라도 좋으니까, 눈을 떠서 그를 제대로 보고 싶다.

 당황해서 안절부절하던 토비가 황급히 가면을 쓴다. 마침내 그와 눈이 마주친다. 푸훗,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눈물 때문에 그렇잖아도 붉은 사륜안의 눈동자가 더 붉어 보인다. 자식, 막상 내가 쓰러지는 걸 보니 후회가 되었나 보구나.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어. 있을 때 잘 해. 너도 내가 없으면 외롭잖아. 슬프잖아.

 "자… 토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선택해… 나야 그년이야……."

 누군지 몰라도 분명 독한 기지배다. 쉽게 밀어낼 수는 없겠지. 그러나 이젠 나도 만만치 않다. 죽다 살아나니 더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까짓거 미친 척하고 날뛰어 보지 뭐.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잘 생각해… 그년이라고 대답하면 다시 꼴까닥 죽어 버릴 테니까……."

 가, 제발 가버려. 죽었으면 그만이지 뭐가 더 필요해. 토비는 내 거야. 내 거라고. 절대로 너한테 안 뺏겨. 나쁜 기지배야. 오늘 내가 살아난 덕분에 너도 산 줄 알아라. 만나면 머리끄댕이를 확 잡아채 버릴 거거든. 다시는 내 남자 주변에 얼씬거리지 마. 캬아악 퉤! 퉤퉤! 귀신은 물렀거라! 물렀거라!

 "……."

 토비가 내 이름을 부른다. 손이 이어진 채 서로의 존재감을 느낀다. 꼬옥 힘이 들어가며 더 분명하게. 거의 삼도천 끝자락까지 다녀와서 나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토비가 아직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싶다. 가뜩이나 차가운 손이라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데, 이 듬직한 느낌이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그래… 지금은 토비 너도 정신이 없겠지… 조금만 더 시간을 줄게… 날 선택한다면 내게 키스해……."

 나도 참 키스에 어지간히 집착하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겠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해두는데… 토비……."

 나는 너를 이렇게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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