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밤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는 딱히 악몽을 꾼 게 아니다. 좀 더 평범한 이유. 토비가 깨지 않도록 그의 팔을 조심스레 치운 뒤 방을 나왔다. 볼일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다.
좋아, 성공이다. 요즘 여자들에겐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저 뭔가를 은밀하게 해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문득 벽에 기대어 있는 토비의 부채가 눈에 띈다. 열린 문틈으로 토비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까치발을 들고 다가간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마치 거대한 부채처럼 생긴 이것은 옛날에 우치하 일족이 쓰던 전통 무기다. 이름은 나도 잘 몰라서 편의상 부채라 생각하고 있다. 부채의 테두리를 만져보면 칼처럼 날카롭다. 세간에 그리 잘 알려진 무기는 아니지만 우치하-센쥬의 냉전시절 우치하 마다라가 이 무기를 귀신처럼 잘 다루었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의 전설이 내려온다. 불의 나라 역사관에 가면 우치하 마다라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외모도 레전드급이어서 거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허어──. 일단 사소리 오빠 보다 위. 데이다라 보다 위. 가끔 토비가 변신해 주는 나의 이상형 오비토 보다 위. 꿈에 나오는 백발의 남자 보다 위다.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부끄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억한다. 거기에도 분명 이것과 똑같이 생긴 부채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금속으로 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부채를 어떻게 무기로 쓰지?(어리둥절)' 했는데, 이 정도 날카로움이면 사람의 목은 가볍게 날아간다. 그리고 마다라의 부채에는 없었지만 토비의 부채에는 사슬이 달려 있다. 키사메가 잠시 이 집에 머물렀을 때 들은 바에 따르면, 현존하는 닌자들 중에 토비 만큼 쇠사슬을 잘 다루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대체 이 정도 크기의 금속은 무게가 얼마나 될까. 잠깐 들어 보는 건 괜찮겠지. 허어억. 내게는 기대어져 있는 부채를 똑바로 세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이렇게 무거운 걸 자유자재로 휘두른단 말인가. 우치하 마다라는 레전드라 쳐도 토비는, 내 남자지만 정말 대단하다. 낑낑거리며 겨우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으려는 순간 힘이 빠져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구구. 부채에 사슬 무게까지 더해져서 나라면 아무리 단련을 한다고 해도 절대 무리다. 달밤에 괜히 힘만 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호기심은 채웠으니 아주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기왕 손댄 것 사슬 부분도 조금 살펴 보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사슬을 붙잡는다. 금속의 부딪히는 소리가 철렁, 내 심장도 철렁 내려앉았다. "미안… 난 그냥… 신기해서 구경 좀 하려고…." "괜찮아~. 근데 불은 좀 켜지~. 캄캄한 데서 만지면 위험하잖아~."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뒤에 서 있던 토비가 그대로 나를 끌어안는다. 내 어깨에 기대며 '겁먹지 마~.' 하고 나지막이 투덜거린다. 화났다기 보다는 서운함을 느끼는 것 같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나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토비가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줘도 마음속 한 구석으로는 그를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이따금씩 두려움이 고개를 내밀 때면 정말 오한이 서린다. "다치면 어쩌려고~. 자, 나한테 줘~. 조심조심~." 토비가 '이렇게 잡는 거야'라고 알려주려는 듯이 내 앞에 사슬을 펼쳐 보인다. 그냥 잡기만 해도 금속 특유의 무직한 힘이 느껴진다. 이건 이것대로 맞으면 뼈도 못추릴 것 같다. 그런데 사슬로 어떻게 공격하는 거지.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감이 잘 안 온다. "잘 들어~. 대부분 마찬가지지만…" 스르르- 사슬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손에서 가까운 부분일수록 먼저 움직이기 때문에 그쪽에 집중하기 쉽지만 다른 부분도 그냥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슬의 첫마디부터 끝마디까지 분명하게 토비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이 사슬을 쥐고 있을 때는 특히 뒤를 잡히지 않게 조심해야 돼~." "왜…?"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콱- 사슬이 숨통을 조여온다. "이렇게 바로 목을 감을 수 있거든~." 단단한 사슬에 토비의 힘이 들어가니 생각했던 것 이상의 압박이 느껴진다. 날만 서지 않았지 칼을 들이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문득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떨어지더니 토비가 내 귀를 잘근거린다. 야릇한 쾌감이 몸속에서 찌르르 울린다. '사슬이란 건 어딘지 좀 야한 무기 같다…' 속으로 무심코 생각했다가 고개를 홱홱 젓는다. 토비의 장난 때문에 머리가 잠깐 이상해진 건가. 그러고 보니 점점 멍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힘조절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지만, 숨 쉬기가 괴롭다. 내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토비가 못내 아쉬운 듯 나를 놓아준다. "마음에 들면 가르쳐줄게~."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사슬은 꼭 배워야 한다. 방금 전의 복수도 할겸 토비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거다. 내가 숙련자로 거듭나면 이보다 더한 짓을 해줄 테다. -라고 짐짓 짜릿함을 느끼기 무섭게, 토비가 손에 쥐고 있던 사슬을 놓고 대신 내 가슴을 움켜쥔다. 만지작만지작. 잘 때는 만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이 틈에 원 없이 만지려나 보다. 하여간. 화를 내려다가도 피식 웃음을 내뱉는다. 이럴 때는 또 귀엽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어쩌다 한 번이라면, 토비에게 위로가 된다면, 이 정도 아픔쯤은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조금 곤란하려나. "그렇게 만지고 싶었어…? 내 가슴이지만 솔직히 별로 볼품없잖아…" "나는 납작쿵이 싫다고 말한 적 없어~. 어딘가의 가슴 바보랑 똑같이 생각하지 마~." 싫어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데이다라는 애당초 나에게 '납작쿵'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적어도 평균이하로 보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을 수 있다. 반면에 토비는 워낙 굉장한 여성들을 많이 봐 와서… 이쪽이 좀 더 씁쓸한 것 같다. "봐~. 아무리 납작해도 난 이렇게…" 한손도 아니고 양손으로 움켜쥐다니. 아파서 움츠러 들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토비가 내 몸을 자신에게 밀착시키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결국 하는 건가. 이제 아무래도 좋지만 부채를 좀 더 차분하게 구경하고 싶었다. 어쩐지 몸이 점점 뒤로, 방이 있는 쪽으로 끌려간다. 무심코 부채로 손을 뻗자 토비가 덥석 붙잡아 저지한다. "위험하다니까~." 지금은 네가 더 위험해. 알아서 갈 테니까 억지로 잡아끌지 마. 조금만 더 구경하자. 조금만─ 조금만──. 토비의 팔이 허리를 감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심지어 이렇게 단단히 손목을 붙잡혀서 뭘 할 수 있을까. 체념과 동시에 고개를 떨어뜨린다. 우치하 마다라가 썼던 부채, 솔직히 말하면 탐난다. 이건 토비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우치하 일족은 부채로 바람을 일으킨 뒤 호화구의 술과 같은 화둔 계열의 술법을 사용한다. 불꽃을 더욱 커다랗게 만들거나 불꽃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다. 풍둔을 무기로 대체하다니 멋지지 않은가. 아까는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열심히 근육을 단련해서 언젠가 나도 부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싶다. "토비… 오늘은 그냥 자자……." "나를 쓸쓸한 침대에서 깨어나게 한 벌이야~. 밤은 둘만의 시간이니까 다른 것에 한눈팔지 마~." 두고 봐. 내가 부채를 휘두를 수 있게 되면 제일 먼저 너부터 날려줄 거야. 물론 사랑하니까 평소에는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고 알콩달콩 하겠지만 나도 화나면 꽤 무섭다고. 그러고 보니 정확한 호칭을 말하면 '우치하 토비' 씨였던가. 너와 결혼해서 기필코 우치하가 되겠어. 왜냐면 부채의 정확한 사용법은 우치하 일족만 알 수 있으니까. 지금은 내가 참는다. 이런 와중에도 달빛이 비춰서 섹시하네. 무결점 몸매에 어깨에서부터 푸른색 조명이 떨어지며 아찔한 선을 그린다. 뭐라 해도 좋은 건 좋구나. 젠장,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기필코 우치하가 되어주겠어! 내 새로운 목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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