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 숲길을 걷고 있었다. 오랜만에 비마을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유난히도 기분 좋았다. 한동안 너무 집에만 있었던 것 같아서 산책이 하고 싶었고, 혼자 나갔던 것은 토비에게 혼날 것을 각오하고 멋대로 정한 일이었다.
전쟁의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은 아무리 인적이 드문 숲이라 해도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기왕 사고치는 것 좀 더 걷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하더니 누군가 빠르게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자신이 노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거친 손에 목을 붙잡혔다. 몸이 높이 들려지며 두 발이 바닥과 떨어져서 피할 틈조차 없었다. "컥… 커헉…!" "첫대면부터 미안하군. 매번 조무래기만 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번에는 직접 왔다." 냉정한 목소리로부터 나는 그가 얼마나 이성적인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반면에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한편으로는 그도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마다라의 힘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부하들을 구슬리기 위해 만들어낸 핑계일 뿐. 나는 그런 속물들과 다르다. 평화를 어지럽히는 그의 잔재는 이 세상에서 깨끗이 사라져야 한다." 꽈아아악─. 목을 조르는 손이 짙은 살기를 품을 때 반대쪽 손은 푸른 전기입자를 일으켰다. 뇌둔 술법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어쩐지 달라 보였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느낌이 아니라 천천히 나의 눈에 다가왔다. 천둥과 같은 기세가 아니라 조용히 침식해 들어왔다. "네 몸에는 강력한 동술이 봉인되어 있다. 이번 생은 우치하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히 소용없는 듯하다만, 개안한 뒤 일족의 누군가 그것을 빼앗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금 눈을 망가뜨리겠다." 섬뜩한 뇌둔은 그것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푸른색 입자가 혈관을 하나하나 파괴하는 듯했다. "이타치를 닮은 사스케라면 타인의 힘 따위는 욕심내지 않겠지. 허나 다른 곳엔… 심지까지 검게 물들어버린 그 녀석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잔인하게 이용당할 바에야 차라리 빛을 잃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높이 올렸다. 구해달라는 나의 간절함이 전해진 것인지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 그러나 시야의 빛은 점점 줄어들었다. 빛이 나는 모든 것에 미련을 가질 틈은 없었다. 머잖아 나의 세상은 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평화를 위한 선택이었으니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와라, 악의 씨앗이여! 기꺼이 너의 손에 죽어주마!" 푸슈우우욱──. (…) 나는 의식을 잃기 전부터 이미 어둠속에 있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면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상처가 아물자, 통증마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이 되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로지 감각만으로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빛'에 대한 감각을 잃은 대신 세상의 모든 것이 피부에 직접 와닿기 시작했다. 쿵! "아야야얏…" 그래도 부딪히는 것은 일상다반사지만, 이제 보이지 않는 생활에 그런대로 익숙해져서 집안에서는 혼자 밥도 잘 해먹고, 청소도 한다. "괜찮은 거냐." 당연하지. 이번에도 씩씩하게 대답하려 했는데, 여지없이 토비는 나를 안아 올린다. 이럴 때는 스스로 갈 수 있다고 투덜거리고 싶지만 그것도 듣기 질렸을 것 같아 그만뒀다. "같은 곳에서 계속 부딪히는군. 가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 "아냐, 위치가 바뀌면 더 혼란스러워. 넋을 놓고 걷다가 부딪힌 거니까 신경쓰지 마." 이제 통증은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병자처럼 안겨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뻐서 능청스레 입꼬리를 올린다. 기왕 안긴 것 얼굴이나 한 번 더 만져볼까. 거리낌 없이 손을 뻗어, 약간 더듬거리면서, 오른쪽 뺨의 거친 흉터를 쓰다듬는다. 이마, 눈, 코, 입을 차례로 머릿속에 그린다. 역시 잘생겼다. 시원하니 잘생긴 미남형. 보이지 않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나는 다 알 수 있다. "내 가면을 벗길 수 있다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도 좋다고 했었지. 헌데 정말로 네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만지작만지작. 만지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빠져든다. 토비의 말처럼 그런 일을 당하고서 아무렇지 않게 웃는 것은 스스로도 이상하다 느끼지만 일단 그동안 못했던 일을 마음껏 하고 싶다. "하다못해 우는 시늉이라도 해라." 만지작만지작. 처음에는 은근히 피하더니 이제는 토비도 체념했나 보다. 틈만 나면 만져대서 귀찮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딱딱한 가면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의 얼굴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짜릿한 일이다.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지금 토비는 맨얼굴'일 정도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뭐가 좋다고 웃어." 내가 생각해도 조금 어처구니 없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않겠지. 무서워서 움찔 하면서도 뺨을 살짝 꼬집어 본다. "나 참." 아쉬움을 느끼며 손을 거둔다. 다른 곳은 몰라도 뺨만큼은 말랑말랑하니까 어린아이 같아서 귀엽다. 나를 소파에 내려놓고 토비가 그 옆에 털썩 앉는다. 잠시 침묵이 맴도는가 하면 '미안'이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하루아침에 빛을 잃어서 억울한 마음은 당연히 있다. '토비가 조금만 더 일찍 구하러 와줬더라면' 하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멋대로 외출했다가 미친개에게 물린 것은 내 탓이다. 과한 처사였다고 생각하지만 토비가 그 놈을 죽여 버려서 어쨌든 복수도 했잖은가. 한동안 단조롭게 흐르던 나의 삶에 갑자기 엄청난 과제가 생겨났다. '어떡하면 저것을 토비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을까?' 내게는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이전과는 다르지만, 훨씬 어렵지만, 나는 여전히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이 아직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긍정적인 생각도 지나치면 바보로 보인다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동시에 잃은 내가 이제 와서 빛을 잃은 정도로 다시 절망에 빠진다면, 그때야말로 내 삶은 암흑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다행히 시신경이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망막이식으로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어. 조만간 다시 볼 수 있게 될 거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해줄 테니까…" "필요 없어." 자신의 입으로 내뱉고도 조금 놀랐다. '괜찮아' 정도로 말할 생각이었는데, 방금 그것은 뭐랄까, 단칼에 거절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빛을 되찾고 싶지 않은 것인가. 아아, 내가 빛을 그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강함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는 이성적으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음은 조용하다. 소리 내어 반발하지 않는 대신 은근히 거부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게 뭐 어때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잖아. 혼자 밥 해 먹고, 청소도 하고,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 난… 이대로도… 괜찮아… 아니, 이대로가 좋아. 지금이라면 토비가 계속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도 되고, 나도 원하면 언제든 너를 만질 수 있고, 그러니까 보지 못해도 상관없어. 보기 싫어." 한때는 토비도 왼쪽 눈을 잃어서 볼 수 없었지. 그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빛을 잃음과 동시에 부질없는 욕심도 버렸다. 단지 토비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눈을 고치겠단 생각보다는 어떡하면 지금의 관계를 잘 이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너도 봤잖아, 나 혼자서도 잘해. 절대로 너한테 짐이 되지 않을게." 빛을 잃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그림 그리는 것에 능숙해졌다. 머릿속으로 저기엔 뭐가 있었지, 저기엔 뭐가 있었지… 그리고… 여기 잘생긴 토비가 있지. 나를 보고 있겠지. 계속, 계속, 그리면서, 행복을 느끼고, 기분 좋게 잠들고, 깨어나고, 그런 하루가 반복되었다. 깨닫고 보면 검은 도화지가 자신의 그림으로 가득해졌다.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볼 수 없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토비는 지켜주지 못했던 것을 자책하고 있다. 그래서 괴로운 듯하지만 머잖아 익숙해질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 편하게 느껴지겠지. 이제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 혹시라도 내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 더는 할 필요가──. 스으윽─. 소리가 들린다. 토비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기대어 온다. 곁에 있어달라는 부탁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 침묵 속에 힘겹게 숨을 삼킨다. 손이 닿아 있지만 차마 잡지 못한다. 안타깝게 떨린다. "울어…?" "……." 어깨가 뜨겁게 젖는다. 눈물이다. 억울하게 실명한 나는 바보처럼 좋아하고 도리어 토비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섭다는 사람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던 것일까. 내가 그의 두려움을 다 없애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말만은 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불행이 닥쳐도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만약 죽는다면 그것도 좋아. 물에 빠지든, 불에 타든, 바위에 깔리든, 같이 있을게. 지금보다 훨씬 큰 도화지가 생기는 셈이니 질릴 때까지 그림이나 그리지 뭐. 그거 알아? 내 그림에서 너 오비토랑 무지 닮았다. 짙은 눈썹,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날렵한 턱선, 그리고 아직 어린아이 같은 뺨. 진심으로 말하는데 완전 내 이상형이야. 그것은 빛을 잃은 내가 다시 눈을 뜨지 않는 이상 평생 변하지 않아. "사랑해, 토비." "역시 천사구나,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피식 웃으며 토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머리카락이 사르르 넘어간다. 우치하 일족만이 가진 신비로운 흑요석. 다시 한 번 색칠해 볼까. 그리고 돼지꼬리 내 사랑 토비. 으히힛. "완전히 정화되어 버렸어… 어떡할까, 진짜 다 때려치울까." "잘 모르겠지만 때려치워. 우리 애기 낳고 행복하게 살자." "응… 그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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