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몸에 기운이 없고 으슬으슬 떨리는가 싶더라니. 오늘 새벽, 무언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잠에서 깨어나보니 열까지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리 심하지 않은 미열이지만, 과연, 열이 나는 것과 나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 동안 집안일이 꽤나 밀렸는데, 좀처럼 몸을 일으켜 움직일 수가 없다. 어제 카린의 도움으로 1층을 청소했으니, 그녀에게 이 이상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은 미안하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지난 날 토비가 주었던 두루마리를 펼쳐 토니와 토리를 불렀다.

 "미안해, 갑자기 불러서 곤란하지는 않았어?"

 "아아, 신경쓰지 마라.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냐?"

 "이마에 수건이 뜨거워져서 불쾌해. 갈아줄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부탁하자, 토니가 내 이마 위의 수건을 물어다 양재기 안에 떨어뜨린다. 납작한 앞발로 차가운 얼음물 속에 수건을 첨벙첨벙 담그고 있다가 꺼낸 뒤, 놀라울 정도의 발놀림으로 물기를 짜낸다. 수건을 다시 내 이마 위에 얹어주는 일은 토리가 한다.

 종종종 다가오는 새의 발걸음이 문득 나의 애조를 떠올리게 해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살다 살다 동물들에게 보살핌을 받게 되다니, 이보다 이색적인 경험이 또 있을까. 정작 내 애인이라고 떠드는 토비는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 토비는 내게 임무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장기 임무가 있을 때는 미리 알려주는데, 이번에는 그런 얘기가 없었다. 물론 아카츠키의 방식이 원래 임무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돌아오는 날짜가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다.

 어쩌면 뜻밖의 일로 임무가 길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쩌면 근처의 화류가에 들러 푹 쉬고 오는 건지도 모르지. 주인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일단 무사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거면 됐다. 더는 바보처럼 누군가를 목빠지게 기다리며 속을 끓이지 않을 것이다.

 "토니는 토비랑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꽤 오래 된 것 같던데."

 "녀석이 24 쯤 되었던 때부터였다. 저래 봬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친구 같은 건 한 명도 없었으니, 내가 인간들 대신 녀석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지."

 토비 같은 살가운 성격이라면 사람과 사귀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토니의 얘기가 조금 의외라서 놀랐다. 그야 토비도 닌자 마을과는 관계 없이 활동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탈주 닌자와 같은 것이고, 사회 밖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주로 어떤 얘기를 했어?"

 "그 나이 쯤에는 뻔하지 않냐. 여자 얘기다."

 아아, 그럼 그렇지. 그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토비라면 이 세상 모든 여자를 그런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으니까. 남자에게 여성편력 같은 건 나이에 딱히 관계 없다. 오히려 그때는 더 날아다녔겠지. 등에 젊음과 활기라는 날개가 달려 있는데 어딜 못 가랴.

 "너는 어떠냐?"

 "?"

 "토비와 알고 지낸지 얼마나 되었지?"

 "난 토비가 아카츠키에 들어왔을 때 처음 만났어. 아직 1년도 안 된 거지."

 "그렇다면 녀석에 대해 잘 모르겠군. 다행히 아직 희망이 있어."

 "희망이 있다니…?"

 "네가 그리 어리석은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 말이다."

 "……."

 "그래도 연애까지 할 정도면 충분히 느꼈겠지. 혹시라도 녀석에게 평범한 행복 따위를 기대하고 있다면 포기하는 게 좋다."

 멍하니 토니를 바라보다, 조용히 시선을 돌린다. 토니의 눈에 토비와 내가 연인으로 보이기는 하는 것인가.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다. 한때 바보가 될 뻔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토비에게 애인이라 불리고 있다 해서, 결코 잊어 버리지 않는다. 그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평범한 행복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내게도 꿈은 있지만 그것을 토비와 이룰 수는 없다.

 "걱정해주는 거야?"

 "나는 언제나 인간들을 걱정해왔다. 너희들은 너무 복잡하거든."

 "고마워, 하지만 토비와 나는 사실 연인 같은 게 아니야."

 "실제로 사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너의 마음이 그 관계에 영향을 미치긴 하는 거냐?"

 "내… 마음……."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뻔한 것이다. 토비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 마음이 중요했던 적은 없었다. 있다고 해봤자 친구처럼 지냈던 짧은 시간 정도.

 지금 내가 토비의 곁에 있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유는 그냥 혼자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내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온다면, 그것으로 이유가 사라지고, 나는 토비를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까? 애당초 사랑 따위 갖지 않았던 토비가, 그 동안 애써 길들여놓은 나를 쉽게 놓아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이따금씩 나는 토비가 나를 통해 다른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만약 죽은 그녀에 대한 집착이 내게로 향해진다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떡해야 하는 거지.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이 관계가 그리 오래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무슨 얘기 해~?"

 벽에서 불쑥 나타난 토비가 스스스 빠져나와 이쪽으로 걸어온다. 별 것 아니라는 토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내 안색을 살핀다.

 그만 돌아가도 좋다는 토비의 말에 토니와 토리가 사라지고, 두 사람 뿐인 방에 정적이 찾아온다. 그 속에서, 토니가 했던 말이 계속 나의 머릿속을 맴돈다.

 '실제로 사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갑자기 토비가 나타나서 대화가 끊겼지만 결국 토니가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는지는 분명히 알 것 같다. 그는 내게 '토비와 헤어져라' 라고,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가르쳐주었다.

 토니의 말대로 이 관계에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좋든 싫든 토비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할 뿐이니까. 더 늦기 전에, 자신을 위해, 이 관계를 좀 더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토비… 있잖아……."

 "미안해~."

 우리 헤어지자.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토비가 뜻밖에 내게 사과를 한다. 이유가 뭘까. 일단 그것을 듣는 것이 먼저겠지.

 "좀 더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어째서 말문이 막혀버린 거지. 무언가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다. 그 동안 토비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왠지 모르게, 진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처리해야 될 일이 너무 많아서 늦어졌어~. 이제 괜찮아~."

 토비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지치고, 피곤하고,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미안한 마음이 전해진다.

 "화류가에서 여자들이랑 놀다 온 거 아냐…?"

 "아……."

 잠시 침묵이 흐른다. 문득 가면 너머로 피식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토비가 뒤통수를 긁적인다.

 "들켰어~? 너무 티나나~? 아하하하핫~."

 머지않아 웃음이 사라지고, 그가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내게 등을 보인 채 문쪽으로 걸어간다.

 어째서 그냥 나가려는 거지. 벌써 얘기는 끝난 것인가. 오랜만에 마주했기 때문인지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든다.

 "토비."

 "(멈칫)"

 "오늘은 같이 자지 않는 거야?"

 "에… 에에… 같이… 자도… 돼…?"

 무얼 새삼스레 묻고 있어. 속으로 생각하며 몸을 뒤로 빼고, 이불을 살짝 들춘다. 토비도 오늘은 적잖이 피곤한 것 같으니, 머리 아픈 것은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같이 있어도 돼…?"

 고요한 방안에 토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언가를 물었으면 이쪽을 돌아봐야지. 흘끔흘끔 쳐다보기만 할 뿐 좀처럼 돌아서질 않는다. 혹시 감기 따위가 옮을까봐 걱정되나.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쩐지 어깨가 조금 경직되어 있는 것 같다.

 "이리 와, 토닥토닥해줄게."

 "……."

 비로소 그가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아이처럼 품을 파고드니, 정말 습관처럼, 당연한 것처럼, 그를 두 팔로 꼬옥 끌어안는다. 조금 전에 헤어지겠단 생각을 해놓고, 아무리 뭐래도 이건 좀 우습다.

 토니가 모처럼 걱정해줬는데, 그래서 마음 단단히 먹기로 했는데, 어쩌면 지금 나는─. 어리석은 여자가 되어도 이제는 딱히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어떤 여자였어? 기분 좋았어?"

 "나도 몰라… 기억 안 나……."

 "아무리 뭐래도 잊어버리는 게 너무 빠르잖아. 떠나기 전에 나랑 했던 건 이미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거 아냐?"

 "그거… 한 번 더 하고 싶어……."

 "어라, 그건 기억나?"

 "(끄덕끄덕)"

 푸훗, 웃음을 내뱉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쓰담쓰담. 토비의 코트도, 가면도, 머리카락도, 뜨거운 열을 식혀주는 듯해서 기분 좋다.

 그래, 기분 좋으니까 됐어. 어차피 갈 곳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같이 있자. 바람피우는 건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그냥 봐줄게.

 "깜빡하고 말하지 않을 뻔했네. 어서 와, 토비."

 "네애~. 다녀왔습니다아~."

 부비적부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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