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밤이 되었다. 오늘은 내 옆자리에 토비가 없다. 아침에 늦어질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전혀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고, 잠들기 전에 한참 동안 가슴의 주인을 쓰다듬었다.
기다림에 지쳐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엎드려 잠들었다. 시트 위를 더듬거리며 이불을 찾는데 무언가 낯선 것이 손끝에 닿는다. 사람의 손. 그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시트가 푹 가라앉는다. 누군가 침대 위로 올라온다. 뒤에서부터 다가와 어깨와 등에 닿고 두 다리가 겹쳐진다. 방금 전까지 밖에 있었는지 차가운 밤공기가 느껴진다. 쪽-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찌릿찌릿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다. 무심코 어깨를 움츠린다. 감각이 곤두서며 섬유의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 보니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제 옷을 벗고 있다. 단단한 팔이 드러나자 본능적으로 긴장이 바짝 들어간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갑자기 검은 손이 입을 비집고 들어온다. "물어." 낮은 목소리에 등골이 쌔해졌다. 시키는대로 장갑의 끝부분을 살짝 물었더니 그대로 손만 스윽 빠져나간다. "돌아보지 마." 커다란 손에 시야가 가려지는가 하면 내게 고개를 아래로 향하게 한다. 얼굴의 절반을 베개에 묻은 채 영문 모를 야릇한 키스를 받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매끈한 혀가 닿을 때마다 민감한 피부에 짜릿한 쾌감이 번진다. 토비─. 자기 남편의 몸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뺨이 스치며 거친 흉터가 느껴진다. 지금 그는 가면을 쓰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왜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지도 알겠다. 갑자기 시작되어서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지만 실수로라도 보는 일이 없도록 눈을 질끈 감는다. "여보……."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아무런 예고 없이 시작해 버리면 아내는 보통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원래 토비에게 '갑자기' 같은 건 평범한 일이다. 덕분에 나도 그런 방식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오늘은 가면을 벗은 채로 하는 걸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단단히 각오해 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예전처럼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엄연히 남편인데 어째서 짐승에게 덮쳐지는 기분이 든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몸집이 너무 크고, 단단하고, 나로부터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딱히 도망칠 것도 아닌데 완전히 밑에 깔려 버렸다. 이젠 무서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예전과 같은 밤을 떠올리면 벌써 눈물이 찔끔 나온다. 이 세상에는 평범한 사람이 겪어본 적 없고 겪을 일도 없는 그로테스크한 방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상상도 못할 부분을 자극하는 것. 초심자에게는 구토증상이 있지만 익숙해지면 다른 어디 보다 기분 좋다든지. 농담이 아니라 나는 정말 토할 뻔했다. 실제로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 후에 의식을 잃고 기절했으니까. 다음 날 깨어났을 때 화류가의 여자들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잖아도 커다란 손에 가감이 없다. 한쪽은 맨손, 다른 한쪽은 여전히 곰발바닥이다. 양쪽으로 어깨와 팔을 더듬거리고 주물럭거린다. 지금 내뱉는 소리는 그냥 신음이 아니다. 아픔을 호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인다. 위험한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시작하는 건 그렇다 치자. 하다못해 마주안고 싶어서 무심코 고개를 돌릴 뻔했다. "보면 안 돼." 그가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굴을 봐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물론 보고 싶고, 이럴 때는 솔직히 토비가 원망스럽지만, 어쨌든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대로 가만히." 착하지, 나지막이 속삭이며 토비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남편의 품안에서는 나도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얌전히 받아들이자 그의 손이 다리 사이를 파고든다. 격정적인 쾌감. 눈앞의 세상이 뒤틀린다. 하잘 것 없는 욕망은 묘한 애증을 불러일으킨다. 왜 이렇게 늦었어. 왜 이제야 안아주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조금은 쉬게 해주면 좋을 텐데, 손을 거두자 마자 바로 들어오는 것은 너무했다. 가장 안쪽에 닿는 순간 거친 움직임이 반복된다. 귓가에 낮은 신음이 들려온다. 토비의 욕망은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나의 욕망과는 차원이 다르다. 알면서 거부할 용기는 없다. "토비… 토비……." 이것은 사랑을 나누는 행위. 본능과 쾌락,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리마저 모두 사랑의 증거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정말이지 뜨거워서─. "토비… 비…토……."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군." 지금 그런 것을 따지는 건 너무하잖아. 몸이 마구 흔들려서 혀를 깨물 것 같다고.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맨얼굴로 있어 주는 게 기뻐서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흉터가 스칠 때마다 짜릿한 흥분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네 흉터가 좋아.' 그때의 말은 토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좋아함을 넘어서 욕망하고 있다. 짙은 그림자에 가려진 곳, 나 외에 다른 여자에겐 결코 허락하지 않는 금단의 장소. 토비에게는 여전히 감추고 싶은 치부일지 몰라도 내게는 의미가 다르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이 두꺼운 가면 너머로부터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비…토……." "한 번 더 틀리면 아파질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 섭섭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아래쪽이 기뻐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이제 뭐가 앞토씨고 뒷토씬지도 모르겠다. '토비'를 부르다 숨이 부족해지면 틈이 생기며 '비…토'가 된다. 거기서 '오…' 하고 말꼬리가 늘어져서 자꾸 '오비토'처럼 들린다. "오…비토……." 앙탈스런 교성과 함께 엉뚱한 이름을 울부짖는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틀렸다. 어떻게 들어도 그건 오비토를 찾는 소리였다. 고의가 아니었는데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뜨거운 숨결이 어깨와 목덜미로 떨어진다. 이보다 부드러운 애무는 없다. 문득 토비의 손길도 같은 느낌으로 변한다. 가감 없던 곰발바닥에 힘이 절반은 빠져나갔다. "너… 일부러냐……." 들릴 듯 말 듯한 토비의 중얼거림을 깊이 새겨들을 여유는 없었다. 어쨌든 이참에 한숨 돌리려는데 갑자기 꽉 움켜쥐며 나를 강하게 속박해온다. 행위가 거칠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치 보복이라도 하는 것 같다. "아… 아냐… 아니야… 토비… 토비…!" 변명할 틈도 없이 절정이 왔다. 이번에는 남편의 이름을 똑바로 불렀다. 하지만 팔을 붙잡혀서 몸을 맘껏 움츠리지도 못했다. 머리에 독약을 끼얹은 것처럼 점점 의식이 마비되어간다. 눈물이 흘러나와 베개를 적신다. "이 체위 싫어… 계속 눈 감고 있을 테니까… 절대 안 뜰 테니까… 매달릴 수 있게 해줘……." "……." 토비가 가면 안쪽을 허락한 사람은 현재 나뿐이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섭섭함이 커진다. 부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감추고 싶은 거냐. 울컥 해서 확 돌아보려는 순간 토비의 손에 저지당했다. 대신 천천히, 조심스레, 토비가 나를 정면으로 돌아눕힌다. 눈을 질끈 감고 있으니 비로소 자신의 두 팔로 소중히 안아준다. 귓가에 키스를 하며 천천히, 다시 거칠게 움직인다. 이 쾌감은 사뭇 다른 느낌이다. 달달한 신음을 흘리며 토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늘 천에 감싸여 있기에 뒤통수는 오랜만에 만져본다. 잔디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삐쭉삐쭉한 곱슬이라 사랑스럽다. 지금이라면 토비의 귀도 만질 수 있다. 그가 했던 것처럼 살며시 쓰다듬자 간지러우니 하지 말라는 듯 내 품을 파고든다. 눈을 감으면 여러 가지 감정을 놓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굳이 보지 않아도 전부 알 수 있다. 오히려 더 분명하게 전해지는 것 같다. 토비의 거친 숨결,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 작은 중얼거림까지─. "…" 이 순간이 끝나면 토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가면을 쓰겠지. 조금이라도 더 만지고 싶어서 더듬더듬 그의 뺨을 감싼다. 내게는 사랑스러운 흉터지만 이것 때문에 토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20년도 넘게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부부가 되었지만 내가 그의 흉터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누구보다 답답한 사람은 토비 자신일 것이다. 식사할 때, 씻을 때, 심지어 잠들 때까지, 토비라고 좋아서 그렇게 하고 있을 리가 없다. 흉터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토비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다만 이렇게 가슴을 졸인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가면 너머의 그를. "모처럼 좋은 날 먼저 잠들지 마… 내 전부를… 네 안에… 품으라고……." 도저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두 팔로 매달려 애원한다. 몸이 부서질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대한 열망이 겉잡을 수 없이 부풀어오른다. 언제나처럼 뜨겁게 내 안에 흘러들어와서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하아… 하아……." 거친 행위가 끝나고 자신이 바라던 대로 되었다. 뜨겁게 타오르던 욕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잔잔한 물결이 인다. "하루 종일… 네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어……." 나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토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그에게 마음껏 부비적거리며 애정표현을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더듬더듬 뒤통수를 쓸어내리고 귀를 쓰다듬는다. 기분 좋은 건지 간지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피식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 나는…" 마찬가지로 나를 쓰다듬어주는 커다란 손에 심장의 고동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의 전부를 품은 채 잠들 것만 같다. "꿈을 꾸고 있는 너를… 영원히 지켜보고 싶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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