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장보기가 필요할 때 외엔 항상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밖의 용무로 외출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들판에 홀로 서 있으니 바람에 풀잎의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지난 날 나를 납치했던 녀석들의 아지트. 지금은 비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긴장을 놓을 수는 없다. 나는 얼마 전 다시 수행을 시작했고, 내 주머니에는 수리검이 들어 있다. 여차하면 싸워야 할 수도 있겠지.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이런 일을 결심한 이유는 그냥 심심해서가 아니다.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나를 착각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 납득했으면서도 왠지 신경이 쓰였다. 이상한 녀석들이 헛소리를 지껄였을 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지만 아무래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마다라의 일기. 그때 토비가 들판에 던져서 어딘가로 굴러가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아지트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때 토비가 녀석들을… 그런 것은 이제 상상도 하지 말자.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되뇌인다. 심신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뒤적뒤적 수풀을 헤집고 다녀도 일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누군가 가져갔거나 빗물에 쓸려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포기하려는 찰나, 바위 밑으로 보일 듯 말듯 살짝 튀어나온 책의 모서리가 눈에 띈다.

  아, 처음부터 저기 먼저 살펴볼걸. 초원이니까 당연히 수풀에 가려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하니 저런 곳에 있을 줄이야. 허탈감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찾았으니 됐다.

  바위 밑에서 일기를 꺼내 펼쳐 보니 그때 생긴 핏자국이 선명하다. 알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안 된다. 심신안정, 심신안정. 이제 볼일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자. 일기를 가방 안에 넣고 서둘러 장소를 떠난다.

 (…)

  마다라는 불의 나라 역사 중 우치하-센쥬 냉전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되었다가 냉전이 끝나갈 때 즈음 일족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유는 '나라 안에 불화를 조장한다'라는 것인데, 세대가 교체되면서 센쥬에 원한이 깊은 구세대 보다는 평화를 바라는 신세대들에게 반감을 샀던 모양이다.

  초대 호카게 하시라마의 유일한 라이벌로 알려진 전설적인 닌자. 그것이 세간에 알려져 있는 우치하 마다라다. 초상화의 외모가 워낙 인상적이라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 안타까우나 설사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해도 나이가 거의 100살에 가까울 것이다.

  점심을 먹은 뒤 침대에 걸터앉아 일기를 펼쳤다. 방대한 양을 하루만에 다 읽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차분하게 천천히 읽기로 했다. 이것은 분명 우치하 마다라 본인이 쓴 일기다.

  자칫하면 찢어질 것 같은 낡은 종이. 쓰여 있는 날짜도 굉장히 오래됐다. 물이 흐르는 듯한 필체는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남자치고 매우 수려하다. 그밖에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마다라가 의외로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고 꼼꼼한 성격이라는 것 정도.

  옛날 문자가 심심찮게 나와서 조금 어렵게 느껴질 뿐, 계절마다 붙어 있는 작은 죽대를 이용하면 소설책처럼 원하는 부분을 찾아 읽을 수도 있다. 옛날식 북마크랄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일기 속 여자', 토우카에 대한─.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아예 소용돌이 가면으로 귀가인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기를 어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대로 놔두어도 되나. 아니면 숨겨야 하나.

  "~."

  우왕좌왕 하는 사이 토비가 2층으로 올라왔다. 아니, 생각해 보자. 말도 없이 혼자 위험한 곳에 갔던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일기 자체를 숨길 이유는 딱히 없지 않나.

 "~. 마이 앤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평소와 다른 박력이 느껴진다. 역시 알고 있구나. 그래도 다행히 크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토비가 옆으로 다가와 털썩 앉더니 뜻밖에 뒤통수를 쓰다듬어 준다. 손끝을 살짝 세워서 쓰담쓰담.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중간 톤의 목소리. 다정한 말투. 소용돌이 가면의 토비는 무섭더라도 익숙하기 때문에 괜찮다. 다른 쪽 보다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달까. 토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내가 무서워할까봐 일부러 변신한 것일 수도 있다.

  "으이그~."

  그래도 걱정시켰던 것은 분했는지 장난스레 뺨을 꼬집는다. 장난이라 해도 역시 곰발바닥의 파워는 남다르다. 데이다라 때부터 종종 있던 일이라 이것은 '사랑의 매'라 생각하고 있다.

  내 뺨이 고생을 많이 하는구나. 이제 끝인가 했더니 갑자기 토비가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포옹 역시 파워가 남달라서 거의 매번 와락 하는 느낌이지만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널 어떡하면 좋지~. 못 나가게 가둬 둘 수도 없고~~. 에효~~~."

  미안, 다음부턴 꼭 얘기하고 나갈게. 토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상태라 일단 속으로만 생각했다. 떨어지면 말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키스를 해온다. 부드럽게. 점점 진하게.

  그렇잖아도 두근거리고 있건만. 가슴이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닌가. 부드러운 입술로 모자라 매끄러운 혀가 얽혀온다. 계속 더 강한 것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토비에게 해야 할 말이 분명 있었을 터인데,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

  토비 덕분에 오늘도 기절한 듯 잠들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너무 일찍 눈이 떴다. 무의식중에 일기의 내용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히 일어나 토비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까치발로 방을 나와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다시 일기를 펼치자 여지없이 토우카(トウカ)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름이 그냥 가타가나로 쓰여 있어서 복숭아꽃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쭉 읽어 보면 등나무꽃이 맞다. 토비는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치하 일족이니까 어쨌든 나보다는 마다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토우카는 마다라의 연인이었다. 본명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일기 안에는 나오지 않는다. 계속 '나의 토우카', '나의 토우카' 하는 걸 보면 마다라가 일부러 그녀의 본명을 쓰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지은 별명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 읽혀질 것을 염려해 숨기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계속 그런 느낌을 받았다.

  왜 숨기려 했을까. 답은 일기 안에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걸 언제 다 읽나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단숨에 절반이나 읽어 버렸다. 어린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슬픈 일과 기쁜 일을 번갈아 겪으며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너무 절절한 로맨스라서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아, 그래서 토우카라고 불렀구나.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불의 나라에는 '등나무 지옥'이라 하는 지명이 있었다. 말 그대로 등나무가 많이 서식해서 거대한 동굴과 같은 형태를 이룰 정도였다. 봄이 아니면 언제나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조용해서 쉬었다 가기 좋은 곳. 마다라와 토우카가 처음 만난 장소였다.

  등나무 꽃이 만개해 있던 어느 봄날, 마다라는 토우카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외모, 목소리, 몸짓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이미지가 딱 그려졌다.

  대단한 미인까지는 아니여도 나름 예쁘고 귀여운 소녀. 주위 사람들의 멸시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강인함. 마다라는 한 마디로 그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토우카는 마다라와 같은 우치하 일족이다. 여기서 반전이 있는데, 그녀는 당시에 우치하의 숙적이었던 센쥬 일족의 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치하 일족, 어머니는 센쥬 일족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아이러니한 관계 속에 탄생한 아이였던 것이다.

  토우카가 태어나기 전 그녀의 아버지는 우치하를 배신하고 센쥬에 투항했다. 충성의 맹세를 하며 그 증거로 센쥬의 여성과 혼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배신이었고, 사실은 우치하와 긴밀히 연통하며 스파이 노릇을 했던 것이라고 적혀 있다.

  토우카의 아버지는 임무를 마친 뒤 우치하로 귀환했다. 목숨 걸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10여년을 버텼으니 영웅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러나 우치하 일족은 그를 믿지 않았고, 같은 이유로 토우카는 어린 시절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마다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족의 아이들은 토우카를 '배신자', '더러운 센쥬의 자식'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도 토우카는 절대 울지 않았다. 나중에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바로 그럴 때 토우카의 곁에 있어 준 사람이 마다라와 그 동생이다. 마다라는 후일 누구보다 센쥬를 적시하는 인물이 되지만 어렸을 때는 오히려 반대였다. 마음속으로는 전쟁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고, 하시라마와의 우정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는 토우카에게 아무런 편견이 없었다. 일기에는 토우카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영웅이라 생각한다고 썼다.

  마다라는 당시에 우치하 일족의 수장이었던 우치하 타즈마의 장남이고 여러 명의 동생이 있었다. 토우카는 반드시 그중 한 명과 혼인해야 했는데 막내 이즈나가 그녀의 약혼자로 결정되었다.

  당시엔 마다라에게도 약혼자가 있었기에 마다라는 타즈마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타즈마도 토우카의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나 보다. 타즈마는 장남인 마다라가 토우카와 혼인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형인 마다라를 잘 따랐던 동생 이즈나는 그의 진심을 알아 주었다. 원래 센쥬라면 질색하는 이즈나였지만 형의 영향으로 토우카만은 절친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즈나는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랐고, 마다라에게 자신은 평생 토우카의 벗으로 남으리라 단언했다. 동생의 이런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마다라는 그날 일기에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솔직히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라고 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

  일기에 집중하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토비가 아이처럼 품에 안기더니 쓸쓸해 오라를 마구 뿜어대며 부비적거린다. 부비적부비적.

 "그건 낮에 봐도 되잖아~. 나랑 자자~."

  하는 수없이 책을 덮고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토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러고 보니 슬슬… 후하암, 다시 졸음이 밀려온다. 이제 금방 날이 밝을 것 같지만 아침에 토비를 배웅하려면 조금이라도 자 두어야 할 것 같다.

 "밤은 두 사람만의 시간이야~. 더는 한눈팔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너무해~."

 "미안, 미안. 쓸쓸했구나 우리 토비. 얼른 방으로 돌아가서 자자. 잠들 때까지 토닥토닥해줄게."

 "먼저 뽀뽀해줘~. 아님 안 일어날 거야~."

  예이, 주인어른. 쪽쪽쪽. 이젠 나도 토비와 전혀 다르지 않은 걸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애기짓이나 닭살돋는 애정표현을 속으로 부끄러워 하면서도 눈앞의 남자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마다라의 일기는 낮에 다시 훑어보기로 하자.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아직 나와의 관계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일기가 적힌 페이지를 우연히 펼쳤더니 이런 문구가 있었다.

  '그녀는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무슨 뜻일까. 일기를 끝까지 읽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기심을 떠나서 꼭 알아야만 할 것 같다. 일기를 읽는 내내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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