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척주척 내리는 차가운 비를 빼고는 비마을에 대해 얘기할 수 없겠지. 그런데 요즘 들어서 비가 그치는 것을 자주 본다. 아예 내리지 않는 날도 있고, 얼마 전에는 하늘에 무지개까지 떴다고 한다.
그때는 여행중이었기에 직접 보지 못했지만 듣기만 해도 놀라웠다. 먹구름이 사이로 무지개가 떴던 그날 이후, 사람들은 머잖아 비마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비마을에서 무지개를 보는 것은 코난 씨의 꿈이었다. 아마 그녀도 마을사람들과 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의 꿈은 나의 꿈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집… 작은 정원에도 안개가 걷히고, 따스한 햇빛이 내리고, 예쁜 장미꽃이 피어날 거라 믿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온기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나 한기가 스며든 몸을 감싸며 일어났다. 내 옷 어딨지…? 토비의 자리가 비어 있다. 내가 늦잠을 자는 사이 나간 걸까. 더듬더듬 자신의 옷을 찾는다. 시간 감각에 둔해진다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의 단점 중 하나다. 별 것 아니지만 이럴 때는 조금 속상하려나. 그런데 갑자기 침대가 푹 가라앉으며 뒤에서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왔다. "드디어 일어났군, 잠꾸러기. 추우냐?" 토비가 나를 안아서 다리에 앉히고는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어제 내가 네 옷을 바닥에 던져 버렸는데. 기억나지 않나 보군." "…그러니까, 일어나자마자 옷부터 찾느라 곤란하다구." "내게 안겨 있으면 춥지 않을 거다." 언제나와 같이 우치하 일족의 복장을 하고 있다. 맨몸에 닿으니 차갑지만 그래도 좋다. 가면은… 나갈 때는 항상 쓰는데 지금은 만져지지 않는다. 덕분에 '좋은 아침' 키스도 받을 수 있다. 뺨에서 쪽- 하고 달콤한 소리가 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빠져들면 안 된다. 저녁까지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괜히 더 보내기 싫어지니까. "토비는 슬슬 나가야지." "나가도 특별히 할 일은 없다만." "요즘에는 임무가 안 들어오나 보네." "걱정하는 거냐? 안주인이 다 되었군." 나는 토비의 일부니까. 당연히 토비도 내게는 그런 존재다. 자신에 대한 일은 당연히 걱정하지 않겠는가. 만약 예전처럼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뿐이었다면 무엇이든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괜찮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아침에는 이렇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임무가 있다면 잠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그런 당연한 일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왜 이리 조용해? 늦잠 잔 벌로 뭐라도 해야지." "내가 늦잠 자는 건 너 때문이잖아… 뻔뻔한 남편아." "알았으니까 남편한테 애교 좀 떨어봐. 마음에 들면 선물 사줄게."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싫어… 나도 외출 준비 해야 돼." 마음 약해지니까 뽀뽀 그만해. 애교는 아니고 앙탈 정도는 될 것이다. 토비를 밀어내는 척하다 마지못해 안기듯이 기대었다. 넓은 어깨에 살포시 손도 얹었다. "어딜 가려는 거냐?" "요즘 무료한 기분이 들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뭐… 한동안 집에만 갇혀 지냈으니 좀이 쑤실 때도 됐지." "토니한테 상담했더니, '이참에 악기라도 배우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구. 그거 괜찮은 생각이다 싶었지. 나… 전보다 소리에 민감해졌거든. 그래서, 화류가의 언니들에게 배워 보려고." "안 그래도 위험한데 앞도 보이지 않는 네가 어찌… 절대 안 된다." "그치만 모처럼 토니가 안내견이 되어 주기로 했는걸." "토니가?" "지난번에 같이 다녀왔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랄까." 선뜻 허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고 하니 고민되나 보다. 토니는 개의 나이로 따지면 노견에 속하긴 해도 원래 닌자견 출신이다. 오랫동안 닌자 세계에 있었기 때문에 인법을 사용할 줄 안다. 유사시에 적과 싸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악기라면 다른 곳에서 배워도 충분할 터… 굳이 기악(妓樂)을 배우려 하는 이유가 뭐냐?" 지난날,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화류가의 여자를 안을 생각은 없지만 그곳의 유녀들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이따금씩 그리워진다'는 토비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은… 다시 갈지도 모른다는 거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든 남편이 화류가에 가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여자는 없다. 연주를 들으러 가는 것뿐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이래 봬도 나는 독점욕이 강하다. 유녀들의 미려한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연주가 내 남자를 매혹시킨다는 생각만으로 뱃속에서 뜨거운 질투가 끓어올랐다. "무얼 그리 애절한 표정을 짓고… 지금도 남편을 조르는 게 이리도 능숙한데, 가서 더 위험한 재주를 배워 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악기 배우는 게 끝나면… 남는 시간에, 언니들이 이것저것 가르쳐 준대."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목적이기도 했다. 경험이 적어서 뭘 해도 안 되니까. 하다못해 조언이라도 받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남편한테 더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그런 질문을 그녀들에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니들이 반장난으로 가르쳐 줬을 때, 역시 일반인들과는 무언가 다른 구석이 있음을 느꼈다. 나는 발성부터 고쳐야 한다나… 갑자기 턱을 붙잡고 입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 통에 쇳소리가 나와서 흠칫 놀랐다. 그냥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감도 오지 않았다. "뭐…?"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 "가도 되지? 되는 거지? 아자, 허락 받았다!" "…나 원." 때아닌 민망함에 토비가 헛기침을 한다. 어쨌거나 나는 허락만 받으면 된다. "그렇게 좋으냐?" 기뻐하는 와중에 토비의 손이 턱 밑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피했다. "음…?"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토비의 품을 파고 든다. 방금 전에 일어나서 아직 세수도 하지 못했고, 자면서 이상한 자국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슬그머니 자고 일어난 눈을 손으로 부비적거렸다. "흐음……." (…) 오늘도 언니들이 짓궂은 장난을 쳐서 곤란했지만 악기를 배우는 것은 그런대로 즐거웠다. 여러 가지로 유용한 지식을 얻기도 하고… 흠흠. 어쨌든, 화류가에 다녀오면서 일전에 의뢰했던 점자책를 찾아 왔다. 이제 마다라의 일기를 이어서 읽을 수 있다. 하필이면 중요한 부분에 들어서기 시작했을 때 시력을… 읽을 수가 없게 된 탓에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물론, 망설이긴 했다. 남의 일기인데 멋대로 번역 의뢰를 맡기는 것은 엄연히 프라이버시 침해니까. 하지만 마다라는 이미 옛날에 죽은 사람이 아닌가. 나중에, 나~중에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사과하기로… 하하하. 두꺼운 종이 위에 돋아난 점들을 손끝으로 훑으며 천천히 읽어 나갔다. 역시, 공백이 있다. 처음부터 중간에 찢겨진 부분이 신경 쓰였다. 토우카가 센쥬에 돌아간 이후의 내용이 빠졌다. 그리고 하시라마의 뒤를 이어 취임한 2대 호카게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데, 토비라마에 대한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절 쓰여 있지 않다. 일부러 쓰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좀 더 읽고 싶지만 손가락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만 덮을까. 근처의 서랍을 열어 일기를 넣어 두었다. 그런 다음 조금 쉬려고 몸을 눕히는데 바깥에서 기묘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주오~ 내 사랑 ~." 설마 하면서도 침대에서 내려가 창가로 걸어갔다. "속았지롱~. 벌써 들어왔는데~." "꺄…!" 별안간 등 뒤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헉~. 우리 애기 떨어졌어~?!" 다리에 힘이 풀려 창문에 기대었더니, 그런 나를 보고 자기가 더 야단이다. "아… 아무도 떨어질 사람은 없지만… 놀라긴 했어." "에헤헤헷~. 무료하다고 해서 장난 좀 쳐본 거야~."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는 토비. 그동안 익숙해져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의 시공간 인술은 대단한 능력이다. 두루마리 같은 매개체도 없이, 말 그대로 자유자재… 현재 닌자 세계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라 말할 수 있다. 가끔은 그런 토비가 부럽다. 오늘은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하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돌아왔다. "토비, 어디 갔다 왔어?" "헤~?" "솔직히 말해봐. 요즘 주인이 계속 조용하잖아." 토비가 전투를 벌이면 내 가슴에 새겨진 주인이 반응한다. 통증은 숨도 쉬지 못했던 예전에 비하면 많이 약해진 편인데 그래도 열이 나기 시작하면 아프니까 알 수 있다. 임무를 수행했다면 벌써 몇 번은 적과 마주쳤을 텐데, 근래에 들어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오락실 갔다 왔어욤~.;;;" 소심하게 대답하는 철부지 남편. 화류가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으음, 아내로서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지." "돈이라면 걱정 마~. 나 돈 무지 많아~." "장난하는 게 아니라…" "진짠데~. 우리 애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 거야~." "그래, 얼마나 모아 놨는데?" 어디 들어나 보자. 장난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단단히 팔짱을 꼈다. "으음… 너는 전쟁 자금에 얼마 정도가 들 거라고 생각해~?" "전쟁 자금? 글쎄… 나 같은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만큼 큰 돈 아닐까?" "맞아~. 그 정도로 많아~. 우리 여보는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지금이라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방금 전의 얘기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귀여운 얼굴 보여주면 선물 잔뜩 사줄게~. 헤헤헷~." 멍하니 있다가 토비가 다가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는데─ "이쪽이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낮게 가라앉은 토비의 목소리. 그에게 턱을 붙잡혀서 억지로 고개가 들려졌다. 거친 손길에 놀라긴 했지만 그다지 힘이 실려 있지 않아서 괜찮다. "역시, 일부러 피하는 거지~? 남편이랑 얼굴 마주하기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매, 맨얼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맨얼굴~?" "거울… 볼 수 없으니까… 어떤 상태인지… 화장도 못하겠고… 부끄러워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침묵이 찾아오나 싶더니, 머잖아 토비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하아~. 너도 겉모습을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나야말로 부끄럽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계속 가리고 있을걸~. 우리 여보의 머릿속에 나는 얼마나 괴상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까~." "전혀 괴상하지 않아." "그치만 내 몸의 절반은 하얀색이고~, 얼굴의 절반은 울퉁불퉁한 느낌이고~…" "하얀색이라면… 귤 꽃의 색이잖아. 울퉁불퉁한 느낌은 귤의 껍질도 그렇지만… 나는 좋아하는걸. 알맹이가 맛있으면 껍질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헤에~. 내가 귤이야~?" "그런 느낌이지. 이제 가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 부탁이야." "응~. 알았어~. 나도 여보의 맨얼굴이 좋아~. 언제 봐도 이쁜걸~." 아아,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토비가 커다란 손으로 쓰담쓰담 만져 준다. 그런 다음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키스하면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살며시 까치발을 들었다. (…)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마다라의 일기를 다시 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에서 뻐근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그냥 저리기만 했는데 무리한 탓에 뼈마디가 시큰거렸다. 일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토비가 내 손을 주물러 주며 말했다. "혼자 뭘 그리 열심히 읽는지 궁금해 죽겠다. 야한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 잠깐의 침묵이 수상하게 들렸으려나. 아무래도 일기의 핵심 주제가 연인과의 사랑이다보니, 이따금씩 야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자신의 상상력에 얼굴이 뜨거워졌을 뿐, 일기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읽힐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글이다. 마다라가 자신의 일기에 무슨 내용을 썼든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뭐, 나로서는 알 수 없군. 애초에 그런 걸 외워 둘 필요가 없으니까. 예전의 너에게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거냐." "단순한 호기심 외에 무슨 이유가 있었겠어. 설마하니 이렇게 실제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 어쨌거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외우기 시작했다면 훨씬 어려웠을 테니까,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단순한 호기심… 내 경험으로는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더군. 가령,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애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여자는 고작 '사랑' 하나에 자신의 평생을 바쳐도 좋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걸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지켜보기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그럴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어졌던 거다." "내 얘기 하는 거야…?" "……." 이어진 손으로부터 안타까운 떨림이 느껴진다. "토비, 지금 울고 있지?" "바보 같은… 보이지도 않으면서 어찌 안단 말이냐?" 몇 번이고 되뇌이는 것이지만, 나는 다 알 수 있다. "자꾸 울면 카부토한테 너 울보라고 얘기해 버릴 거야." "그만둬… 녀석에게는 얕보이고 싶지 않아." "부끄럽긴 하나 보네. 그러니까 괜히 자책하지 마. 보이지 않는 삶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지금은 보이지 않아서 더 행복해." 진심으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무작정 손을 뻗었다. "이쪽이다." 내게는 너무나도 상냥하게 들려오는 한 마디. 바보처럼 허우적대고 있으니 곰발바닥이 내 손을 덮쳤다. 내가 닿고 싶었던 곳, 토비가 자신의 뺨으로 직접 가져갔다. 토비도 나의 뺨을─ 손이 커서 귀까지 덮어 버렸다. 야릇한 감각이 찌르르 올라와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했다. 피식, 웃음 소리.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쪽- 하는 느낌으로 사랑스러운 키스를 계속하며 말했다. "토비… 이제…" "아아, 할 일 하고서 잘까." 귀까지 뜨거워져 오히려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나도 토비를 만지고 싶었다. 일단 적당히 아래쪽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이건… 굉장히 단단하다. 허벅지인가. "이쪽." 이번에도 곰발바닥이 손을 덮쳐와 기꺼이 원하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이쪽은 아직 별로 단단하지 않… 푸훗,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거기까지가 딱 여유였다. 토비가 내 옷을 어깨까지 내리고 매끄러운 혀로 애무했다. 나를 끌어안고 다리에 앉혀서 옆을 향하게 했다. 그 다음은… 잘 모르겠지만, 움직임으로 봐서는 장갑 한쪽을 벗는 것 같았다. 이윽고 차가운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오른손……." "오른손은 싫으냐?" "시… 싫…" 들어온 뒤에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장 민감한 곳을 곧바로 찾아가서 순식간에 이성을 마비시킨다. 달콤한 현기증 같다. 신체의 모든 감각들이 그저 아찔한 쾌감으로 느껴진다. "지… 않… 윽……." 말은 끝내게 해줘야 될 거 아니야. 토비가 손을 빼려는데 속으로 투정부리며 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솔직히 말하면 절정의 여운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일부러 놓지 않았다. 토비에게 이런 속사정은 훤히 보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기다려 줬다. 숨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뒤에도 현기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멍한 상태로 손을 뺐다. 더러워졌겠지. 토비가 나때문에 더러워지다니. 문득 애틋한 기분이 들어서 가슴 앞으로 가져왔다. "거긴 핥아 봤자 소용 없는데." 그 말에 스스로 토비의 다리에서 내려갔다. 토비가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앉고, 나는 자세를 낮추어 그에게 받은 것을 나름대로 돌려 주었다. 만지거나, 핥거나… 내가 하고 있지만 덩달아 민감해진다. 이미 그런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토비가 귀를 만지려 하기에 몸을 움츠렸다. "토비는 만지면 안 돼." "왜지?" "내가 토비한테 집중할 수 없으니까." "무얼, 이 손에 기뻐하면서도 내게 집중하기 위해 애쓰는 너의 얼굴이 나는 보고 싶은 것이다." "……."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것을 입안에 머금었다. 이제 완전히 단단해졌다. 어째선지 토비의 손이 멀어진다. 살짝 자세를 바꾸는가 싶더니 다른 손이 반대쪽 뺨을 감싸왔다. 장갑을 벗지 않은… 침대에서는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정겨운 느낌이었다. 털의 질감이 포근하고 기분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곰발바닥……." 토비도 자기 손이 큰 건 아나 보다. 내 중얼거림을 듣고 피식 웃으며 쓰다듬어 준다. "그래, 곰이다." 스윽, 뺨에서 귀로, 토비가 손을 조금 뒤로 옮겼을 뿐인데, 이번에는 일부러가 아니라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도 참 어쩌다 털 난 짐승의 발에 이리도 푹 빠졌는지. 그다지 돌이키고 싶지 않지만 예전에는… 장갑도 벗지 않고, 다시 말해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나는 엄밀히 말해 '당했다'. 전혀 와일드하거나 터프하다고 칭찬할 만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사랑에 빠졌다는 게─ 토비의 손끝이 어깨선을 천천히 훑으며 내려온다. 마지막까지 강한 쾌감을 남기는 그의 움직임은 얄미울 정도로 짜릿하다. 어쩌면 애증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것도 사랑이기 때문에 싫다고 해서 거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점점 이끌려서 이성을 빼앗겨 간다.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지 말해 봐라." "어제처럼… 아니면 엊그제처럼……." "어제? 엊그제? 뭘 말하는 거지?" "모르겠어… 토비가 알아서 해줘… 그게 제일 좋으니까……." "그렇다면야." 토비가 팔을 잡아당겨 몸이 일으켜지고 그대로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린 모양새가 됐다. 어쩐지 높은데… 아, 토비는 시트에 무릎을 대고 앉았구나. 체중이 자연스레 밑으로 쏠리면서 제일 깊은 곳까지 매끄럽게 들어온다. 경험이 많다는 것은 특별히 티가 나는 게 아니다. 이런 것을 '능숙하다'고 말하는 거겠지. "어이, 여자." 아프다.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예쁜 인간 여자."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진다. "나한테 안겨서 나중에 곰돌이가 나오면 어쩔 거냐?" 농담하는 건가. 지금은 맞장구를 치고 싶어도 무리다. "곰돌이가 나오면 어쩔 거냐고 묻고 있잖아." 그렇잖아도 악당처럼 들리는데 더 낮게 내리깔고 말하니 오싹하다. "곰돌이라도 예쁘게 키울래……."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조급해진다. 얼른 움직여 줬으면. "과연, 내 신부 될 자격이 있군." 정말 못말리겠다. 토비가 비로소 나를 눕힌다. 이제 긴장해야 한다. 아픔이 가실 때까지 견뎌야 하니까… 쿵, 부딪히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픔 뒤에 묵직한 쾌감이 따라왔다.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비집고 들어온다. 기가 막히는 집요함이다. 시작부터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랫쪽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가슴을 움켜쥔다. 꽈악, 꽈아악. 만지는 건지 망가뜨리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아파서 손이 저절로 향한다. 하지만 토비는 다른 뜻으로 이해했다. 그 애처로운 손을 다정하게 잡고 다른 쪽 손으로는 잔인하게 가슴을 계속 주물럭거렸다. 근육 하나 없는 부드러운 지방 덩어리를 무슨 부채 휘두를 때 처럼… 아니, 그것도 아니다. 내 체감으로는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아…!" 사납게 밀어닥친다. 아픔과 함께 쾌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천천히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토비가 손등에 살며시 키스하고는 손을 놔줬다. 이런 것에 속아서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 다리를 휘어잡고 다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움켜쥐는 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토비도 나를 사랑하고 예전에 비하면 두 말 할 것 없이 상냥해졌지만 자극적이고 난폭한 방식은 여전하다. "울 정도로 기분 좋으냐." 맞는 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우는 소리로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곰이 쥐고 있던 내 한쪽 다리를 반대편으로 넘기고 오므려진 두 개의 다리에 제 팔을 두른다. 한 마디로 나는 몸의 절반이 들렸다. 하반신 무게만 해도 상당할 텐데 곰에게 그런 건 노프러블럼이다. 평범하게 짊어지고 한다. 상반신이 바짝 긴장되어서 아래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그러다보니 더 민감해진다. 결국에는 이 몸도 뻔하다는 게 분하기까지 하다. 바람둥이 자식, 하지만 사랑해. "아…!" 후배위로 체위를 바꿀 때는 더 굉장하다. 괴물 같은 팔로 허리를 감아서 들어올리다시피… 안 돼, 설마. 겁을 먹기 무섭게 토비가 자신의 앞으로 향해진 내 둔부를 꽈아악 움켜쥐었다. 반드시 곰돌이를 낳겠다는 집념이냐 뭐냐. 이건 안기는 게 아니다. 곰한테 잡아먹히는 거지. "아흑… 토비…!" 너무 힘주지 말라고 뒤로 손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잘못 전해졌는지 토비가 내 양팔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이게 아닌데. 토비는 잠자리에서의 모든 제스츄어를 '더 거칠게'로 이해한다. '상냥하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아기가 생기기 전에 몸이 다 망가지지 않을런지 모르겠다. "하아……." 토비가 팔을 놔주더니 더는 주물럭거리지도 않고 다만 내게 커다란 손을 올려놓은 채 거칠게 움직였다. 여러 가지 충격에 상체가 자꾸만 힘을 잃고 늘어져서 내 몸은 저절로 굴곡을 그렸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까. 아픈 허리를 뒤에서 다시 감아온다. 토비에게 안긴 채 일으켜졌다. 짐승 같은 숨소리에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곰이 침대 아래쪽으로 먼저 눕고는 내게 말했다. "이쪽으로 돌아. 이쪽이다." 보채지 않아도 알아. 하반신에 힘이 전혀 안 들어가는 걸 어떡해. 속으로만 겨우 투덜대면서 남은 힘을 짜냈다. 힘들게 반대로 돌았더니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내 안을 들쑤셨다. 나쁜 곰 때문에 상체가 기울어졌다. 점점, 점점 앞으로. 깨닫고 보니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키스하고 싶으냐." 숨도 쉬기 벅찬데 그럴 리가 있냐. 그만둬. 곰발바닥으로 뒤통수 감싸지 마. 키스하지 마. 내 안에 절규가 울려 퍼진다. 입을 막고서 혀까지 얽어오는 곰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몸이 망가진다. 곰돌이고 뭐고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 "나는 이제… 무리야……." "무슨 소리냐. 마지막까지 나랑 같이 가야지." 가긴 어딜 가. 시야가 휙 미끄러지며 위아래가 바뀌었다. 토비가 내 몸을 끌어안고서 더 거칠게 움직였다. 이대로 끝내려는 거다. 정말 나를 죽일 셈인가. 점점 팔에 힘이 들어간다. 꽈아아아악. "토비… 토비…!" 엄청난 게 왔다. 뜨겁다. 아아,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기분 좋을지도. 그러고 보니 바깥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 관계를 갖는 동안 빗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제야 들린다. 땀에 젖은 시트의 냄새가 여운으로 남았다. 숨을 고르며 내게 쓰러진 토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의식이 멀게 느껴진다. 오늘도 내가 먼저 잠들어 버리는 건가. 어쩔 수 없다. 더는 숨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 깊은밤. 뒤척이며 신음하는 나를 토비가 흔들어 깨웠다. ", , 일어나." "오비토 군…?" "……." 당연히 잠에서 깨어나도 무언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남편의 존재감을 느끼고 안심했다. "토비……." "으, 응~. 나야~.;; 아니, 나밖에 없지만~.;;;" 후후, 나른하게 웃으며 토비의 뺨을 만져 주었다. "나 말이야… 오비토에게 고백했던 날의 꿈을 꿨어……." "아휴, 그놈의 오비토~.;; 깜짝 놀랐잖아~.;;;" "너무 긴장해서… 숨을 못 쉬겠어서… 미안… 걱정했어…?" 쓰담쓰담. 상냥한 손길로 달래자 토비가 내게 다가와서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장가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 여보가 긴장했구나~. 어떻게 고백했는지 물어도 돼~?" 토비가 알고 싶다면. 신이 나서 두 손을 움직여가며 얘기했다. "이렇게… 선물을 앞으로 내밀면서… '저와 사귀어 주세요!'라고… 어때? 굉장하지?" "응, 그렇네~. 굉장히 귀여워~." 부비적부비적. 자다 일어나서도 기승전 애정표현이다. 얘기하고 나니 부끄러워져서 널찍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이런 소녀 감성이라니. 그래도 토비는 나를 이해해 준다. 첫사랑, 게다가 짝사랑이었으니까. 뭐 어떠냐는 반응이다. 무심코 데이다라의 얘기를 꺼냈을 때와는 다르다. 전남편이라는 말만 꺼내지 않으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문득 목을 감싸오는 따스함을 느꼈다. "토비… 손이 떨리고 있어." "……." "왜 그래…? 혹시… 그때의 일이 떠올라서 그래…?" 지금은 사라졌지만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목을 졸렸던 흔적이. 토비는 정말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때는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편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뭘 어떻게 해도 안 되잖아', '너 같은 건 지긋지긋해', '사라져 버려'라고. "괜찮아…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너 때문에 아팠지만, 네 덕분에 다 나았어. 토비에게 부비적거리며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그런데 반응해 주지 않는다. 나는 정말 괜찮은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 너는… 어떻게 나를 항상 용서할 수 있는 거야…?" 귀여운 토비로 돌아와. 그건 오비토의 말투잖아. 이번에도 마법의 주문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다음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었다. 내일도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좋은 아침'의 키스를 하고, 계속, 계속, 러브러브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니까……." 한 번 잃은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상처는 언젠가 낫는다. 용서 또한 마음만 달리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 토비 너는 바람만 안 피면 돼! 속으로나마 후련하게 외쳤다. 토비가 과거에 내게 했던 일들보다는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고 싶다. 그래야 두 사람 모두 행복할 수 있다. 토비도 알고 있기에 나를 위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좋아하는 아이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다고, 얘기한 적 있었지…? 그때의 모든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네 덕분에 제일 간절했던 걸 이뤘으니까 나는 만족해… 아니, 꿈으로 흘러넘칠 정도로 행복해. 지금은 나도… 내가 더,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많은 것을 잃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꿈을 이뤘다. 그리고 내 꿈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현실속에도 꿈 같은 일들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이것을 '평범'이라고 말하겠지. 두 사람은 그런 일상으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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