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부채는 여자도 쉽게 다룰 수 있도록 토비가 특별히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볼 때마다 뿌듯해서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어진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할 수 있지만 애인에게 액세서리를 선물받는 기분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주군에게 무기를 하사받았습니다'라는 느낌이랄까. 맞춤 제작이라 해도 아직은 버겁게 느껴져서 가벼운 목검부터 수련을 시작했다. 목검이라 해서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처음에는 몇 번 휘두르는 게 고작이었는데 단련이 되어갈수록 점차 나아지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수련을 하고 있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자니 자신이 한심스럽고 계속하자니 힘에 부쳐서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쏟아지던지 말던지 상관없었다. 수련하는 동안 신체적인 감각에 더 집중하고 싶었던 나는 일부러 눈을 가리고 있었다. 땀에 젖은 안대를 벗고 바들바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먹구름으로 가득한 비마을의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륜안을 이식 받았다 해서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 어둠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애당초 이전의 자신에게 무엇이 어떻게 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빛을 되찾는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뜬 기분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 모두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것이라 생각하며 소중함을 되새기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약해져 버린 내가 뭘 할 수 있지? 힘을 보태긴 커녕 체력까지 바닥나서, 정직하게 말하면, 이대로는 간단한 정보 수집조차 그럴싸하게 해낼 수 없다. 뭐, 나가면 며칠 외박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토비가 허락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뭐라도 좋으니 하고 싶다. 다만 쓸모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정말 무리인 걸까.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노력하면 강해질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계속 무력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욕심이라 해도 좀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 "고민이 있는 모양이네." 카부토의 목소리.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너한테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내가 사소리 오빠와 지내던 시절 카부토는 오빠의 부하들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영락없는 아저씨지만 당시만 해도 미성년자 꼬맹이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린 녀석을 챙겨 주는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겉으로는 굉장히 영특해 보이고 성격도 싹싹해서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런 부류의 인간에게는 절대로 약점을 잡히면 안 된다.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속마음은 카부토에게도 빤히 보인단 말인가. 정말이지 최악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카부토를 돌아보았다. 양쪽의 사륜안으로 녀석을 보니 이전에는 몰랐던 미세한 표정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현재로써는 내게 악의가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사륜안으로 모든 것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토비도 그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지는 못한다. 애당초 우치하의 태생도 아닌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왠지 그런 기분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토비의 말에 따르면 사륜안의 소유자는 개인마다 발현되는 능력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언제나 혼자만 속마음을 내보여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했으니까, '어쩌면…' 하고 약간 기대는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나도 이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걸까. 서로 잘 알고 있다면 딱히 상관없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중이야. 나도 정보수집꾼 같은 게 아니라 그럴듯한 닌자로 활약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좀 더 나은 길이 있었는지도 몰라. 정보를 캐러 다니는 것보다 수련을 하는 데 시간을 썼더라면… 이런 약해빠진 여자가 되지는 않았겠지. 나는 닌자라고 할 수도 없어." "내가 기억하는 당시의 너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해 보였어. 하늘의 색이 변하니 그것을 올려다보는 마음도 변한 거겠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보호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 내 몸은 스스로 지키고 싶어. 그리고…" "그 남자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 "애절하네, 정말. 나로서는 이해불가야." 카부토 같은 녀석은 보나마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겠지.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 만도 하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혼자 고민하고 있는 내가 녀석에게는 오히려 더 한심해 보일 것이다. 찾아보면 분명히 좀 더 쓸모 있는 고민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늘'이다. "…너 말야, 예전처럼 그 남자, 그 남자, 하는 건 그만둬. 굳이 따지자면 이 관계의 중심은 토비잖아. 엄연히 너의 보스라구." "너까지 까다로운 요구를 하지 말아줘. 그래봤자 우리 '보스'께서는 누구도 믿지 않으시거든. 워낙 의심이 많으신 분이라서 말이야. 처음부터 굽히고 들어갔으면 도리어 나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카부토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그러면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이용되다가 버려질 테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동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언제라도 등을 돌리고 떠날 수 있도록.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다가 혼자 남겨졌을 때의 심정은 녀석도 나만큼 잘 알고 있다. "난 지금도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 번 배신자는 언제든 다시 배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뭐… 눈의 치료를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게." "망막 이식 정도야 간단한 일이지. 그 정도로 너에게 감사를 받다니 민망한걸. 설마하니 내 능력을 평범한 의료인술 정도로 여기는 건 아니겠지. 필요하다면 그보다 더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까 언제든 말만 해." "더 큰 도움이라… 예를 들면 어떤 건데? 네가 카부치마루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나도 죽은 사람과 합체시킬 거야?" "샘플은 많을수록 좋아. 사전에 최대한 위험을 줄여 두어야 내가 안전해지거든. 치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원래 그게 내 일이야. 그렇다고 해서 너에게 '합체'까지는 바라지 않아. 하하핫. 죽은 녀석의 세포를 너에게 이식하는 것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카부토가 무지한 내게 일부러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미안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깨끗하게 납득이 되는 건 아니다. 합체든 뭐든 정신나간 학자 놈의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좀 더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세포를 이식한다고?" "네 남편도 초대 호카게인 하시라마의 세포를 이식 받아서 목둔의 능력을 갖게 되었지. 그걸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야. 힘들게 얻은 혈계한계의 DNA인데 오로지 예토전생만을 위해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 처음부터 내 목적은 이거였어. 언제든 필요할 때 그들의 능력을 이용할 수 있는 것 말이야." "혈계한계……." "어디 보자─. 너에게는 어떤 능력이 어울릴까? 하쿠의 빙둔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데이다라의 폭둔은 어때? 참고로 녀석의 손은 혈계한계와 별개야. 바위마을의 금술 중 하나로 소환술의 일종인데 그것도 내가 가지고 있어. 좀… 많이 고통스러울 테니까 미리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냠냠쩝쩝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필요 없거든. 모를 리가 없잖아. 그리고 웬만하면 'D 씨'라고 해줄래? 내 사랑은 끝난 게 아니라 망가진 거야. 도중에 멈춰 버렸다고. 깨끗하게 잊고 싶어도, 끝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잠깐 기다려봐. 흐애애애애앵──. 응, 됐어.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겉보기에는 귀엽지만 양팔이 잘려나가도 무덤덤한 데이다라가 두려워했을 정도다. 살과 뼈를 우걱우걱 씹어대는 건 둘째치고 차크라까지 몽땅 먹어치운다.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버티지 못하겠지. 그러나 강해질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어떻게 할래? 고민할 시간을 줄까?" "그럴 필요없어." "결정이네." 어떤 방식으로든 시련은 주어지기 마련이다. 내 사륜안도 원래의 눈을 잃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거다. 평범한 닌자가 비슷한 정도의 힘을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할까. 어차피 대가는 반드시 치뤄야 한다. 잠깐의 고통은 하물며 평생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고 해도 좋다. 지금의 자신이 아닐 수 있다면. "토비한테는 비밀로 해줘."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그 남자… '보스'가 알면 나를 가만히 놔두겠어?" "아마도 너한테 환술을 걸어서 지옥부터 맛보게 한 다음 자를 수 있는 곳은 다 자르고 마지막에 머리를 날려 버릴걸." "듣기만 해도 소름끼친다." "(빤히)" "왜 그렇게 쳐다봐?" "동료로 두자니 불안하지만 적으로 두기에는 더 불안한 녀석이구나- 하고." "아주 잘 알고 있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카부토와 마주섰다. 민망해서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는다. 배신하면 죽을 줄 알아. 그렇게 생각하며 쳐다보자 녀석이 피식 웃더니 내 손을 잡았다. 배신자 따위 꼴도 보기 싫었는데. 이렇게 다시 한 번 녀석과 하늘을 올려다보니 묘한 기분이다. (…) 약속했던 날. 혼자서 카부토를 찾아왔다. 들어올 때만 해도 무덤덤한 기분이었는데 연구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누워 있으니 과연 불안함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누웠던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아마도 죽었겠지. 주변의 음침한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어쩌면 저기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야, 카부토." "왜?" "이따가 마취 풀리면 많이 아플까…? 눈을 치료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때…?" "고통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져. 의지만 확고하다면 아마도 괜찮을 거야." "그, 그야, 당연히 나는 괜찮지. 딱히 무서운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ㅇ…" "시작한다." 푹─. 주삿바늘을 깊숙이 찔러 넣는 순간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카부토 이 자식, 예고라도 해주면 어디 덧나냐. 의사로서 기본 자세가 안 되어 있잖아. 아니지,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내가 바보다. 푸욱─. "히익…!!! 왜 또 찔러…!!! 방금 마취 했잖아…!!!" "무슨 소리야? 마취는 아직 하지도 않았어. 방금 건 차크라의 흐름을 막기 위한 주사였거든." "차크라의 흐름을 어째서 막아야 하는데…?" "주인을 무력화시키는 거야. 네가 여기 있는 동안 그 남자로부터 너의 존재를 숨기는 거지. 일전에 네가 직접 나한테 얘기했잖아, 들키면 끝장이라고." "그, 그랬지… 아아아악!!!" "네 목소리 때문에 들키겠다. 이제 마취한다." "말해 두겠는데!!! 난 네 실험체가 아니야!!! 만만하게 보면 곤란ㅎ…으으으으…" 스르르─. 몸에서 힘이 풀려 나간다. "내가 새로 제조한 마취제야. 오늘 처음 쓰는 건데 아주 잘 듣네. 큭큭큭."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 들려오는 짓궂은 웃음 소리.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카부토 녀석부터 한 대 때려 주겠노라 결심했다. "……." 토비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나름대로 궁리해 봤지만 이렇다할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분명히 화낼 것이다. 울지도 모른다.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져서 가슴이 아팠다. 토비… 너무 속상해하면 안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해져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난날 토비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럽고 치사해도 이해해 주면 안 될까. 그때의 심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말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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