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슬슬 정보 수집을 다시 시작해야겠는데. 오늘따라 몸이 무거워서 외출은커녕 집안일 조차 잔뜩 미뤄두었다. 나의 생활패턴은 어제와 오늘 그다지 다를 것이 없지만 이따금씩 별다른 이유 없이 몸이 피곤해질 때가 있다. 아니,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휴일이라며 아침부터 내게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토비 녀석 때문인가.
"~. 놀아줘~." "……." 난 지금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책에 집중하는 척 대꾸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토비가 말하는 '놀아줘'는 열이면 아홉 '하자'라는 뜻이니까. "놀아줘~. 놀아줘~." "……." 포기할 때까지 버텨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토비가 그 커다란 몸집으로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짓눌러 온다. 허억. 심지어 꽈아악 하고 두 팔에 힘도 준다. 긴장을 놓았다간 질식해 버릴 것 같다. 하지만 섣불리 저항하면 오히려 더 불리해진다. 내게 거부 당해 삐친 토비를 달래주어야 하는데, 결국 그 방법은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곰에게는 죽은 척이 답이다. 괴롭지만 참자. 조금만 더. "쳇~. 재미없어~." 끝내 포기했는지 토비가 작게 투덜거리며 내게서 멀어진다. 어휴,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는다. 사람을 진지하게 곰으로 취급하는 것은 내가 봐도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오빠나 데이다라 같은 여리여리한 미소년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180은 족히 넘는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짐승남 토비는 곰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개 '곰'에 대한 대처법은 토비에게도 들어맞는다. 가령 조금 전처럼 죽은 척을 하면 흥미를 잃고 가 버린다든지. 이제 무서운 짐승도 없겠다, 계속 책이나 읽자. (…) 토비 : 요즘따라 밤일에 상당히 팍팍해진 기분이 드는데~… 어째서지~…? 토비 : 며칠 전부터 계속 재미없는 책만 읽고~. 대체 뭘 읽는 거야~? 언제 이렇게 책을 많이 사 놨어~? 수납장 한 칸이 가득 찼네~. (뒤적뒤적) 으음~. '성에 대한 남녀 인식의 차이'~? 뭐야 이게~. 설마하니 책으로 성교육을 대체하려는 건가~. 말하면 내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털썩─. 토비 : 에효~~~. 별로 흥미 없지만, 할 일도 없으니 잠깐 훑어 볼까~. 으음~. 으으음~. 토비 : (성욕이 낮은 '여자'는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해야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이는 분노를 야기하고, 성욕을 더 떨어뜨린다.) 토비 : ……. 조용────. 토비 : 에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토비~. 는 나랑 하는 걸 좋아해~. 언제나 엄청난 반응을 보여주잖아~. 하고나면 귀여운 얼굴로 잠들잖아~. 괜한 걱정은 필요없… 없… 음……. 토비 : (혹시 내가… 남자로서 별로 매력이 없는 건 아닐까…?) (…) 남자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라면서도 여자가 너무 많은 것을 쉽게 내어 주면 부담을 느끼고 뒷걸음질을 치거나, 한 번 자신의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것에는 머지않아 흥미를 잃는다. 오히려 줄 듯 말 듯 애를 태우는 것이 남자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핀다. 여자에 대한 정복욕이라든지, 소유욕 같은 것을 자극해서, 이쪽에 관심을 두게 만들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다. 나는 수동적인 성격이다. 사랑받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따른다. 하지만 내 방법은 틀렸다. 혹시 데이다라도 이런 내게 질려서 나를 떠난 것 아닐까. 이제 와서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가슴이 아프다. 지금 토비에게 이용되어지는 자신의 신세도 어찌 보면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별 볼일 없는 여자지만 나도 상대방에게 존중받고 싶다. 싫을 때는 싫다고 말하고 싶다. 다만 토비와는, 앞으로 남은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끝까지 참아 보자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애정 욕구와 성적 욕구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페이지를 넘기다 그런 문구를 읽고서 한동안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책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내 중심을 찌른 것 같다. 그래, 데이다라는 정말 자기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욕구가 해소되면 그것으로 그만인 듯이 떠나 버렸다. 어쩌면 죽음을 앞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파트너가 당신에게 충분히 헌신적이지 않다고 여긴다면 다음 사항을 의심해보라. 혹 그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당신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 있지 않은가? 쉽게 말해, 자신의 욕구는 이미 충족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미래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여자는 언제나 '미래'의 꿈을 꾼다. 그러나 남자는 '현재'만을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트너에게 거부당했을 때 여자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당장의 욕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는 귀찮음이 생기니까. 남자를 접한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적어도 과거에 데이다라와 토비는 나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내게 애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해 왔다. 언제나 욕망 뿐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수십 번,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하아─." 이제 알고 있으니까, 더는 착각 따위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떠나기 전까지는 참자. 토비가 원하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자. 그렇게 해서 추억 하나라도 더 가져가고 싶었는데. 무엇이 정말 두 사람을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토비가 바라는 것이 하늘의 '그녀'에 대한 욕망을 나로부터 해소하는 것이라면, 끝내 그것뿐이라고 한다면,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어떤 일을 해 주어야 할까. 아직 토비의 상처는 완전히 낫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내가 부족한 탓인지도 모른다. 뭐가 어쨌든 언젠가는 토비에게도 다른 좋은 여자가 생길 것이다. 가슴 아프지만 조금만 더 고민해 보자. 먼저 화류가에 발을 끊게 만들자. 모든 여자가 나처럼 수동적인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바람 같은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니까, 이 나쁜 버릇부터 고쳐 주자. 탁─. 책을 덮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 그 동안 함께 지낸 시간이 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토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갈 자신이 없다. 토비도 내가 사라지면 조금은 허전함을 느끼겠지. 다른 것은 몰라도 나에 대해 '원하면 얼마든지 대신이 되어주는 착한 여자'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겠지. 나는 먼저 그 믿음을 깨뜨렸다. 내가 싫어하면 억지로 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을 이용해서, 애가 타다 못해 화가 날 정도에 이를 때까지 토비의 '밤일'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 곧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찾아 다시 화류가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었다. 토비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일단 나는 그냥 지켜보았다. 정말 화류가에 다녀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외박을 한 다음 날의 아침마다 토비는 기분이 썩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가면 안으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는 없어도 저 가면을 건드리기만 하면 내 손목을 확 부러뜨릴 것 같은 아우라가 그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신변을 위해 그만두는 편이 좋을까 하는 생각이 일순간 들기도 했지만, 다행히 토비가 내게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한 번, 그와 내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왜 나랑 하지 않으려는 거야~?"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럼 지금까지는 날 사랑해서 했어~?" "이제 더는 싫어." 그때 내 말이 충격적이기는 했는지, 한동안 우리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토비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토비가 내게 직접적으로 화를 낸다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나는 안심하고 다음 계획을 생각할 수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늦은 저녁, 나는 토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토비에게.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은 진심이었어. 너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자를 성적으로밖에 보지 않는 너에게는 필요없겠지. 나 역시 그런 남자를 도저히 사랑할 자신이 없어.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방에 선물 두었으니까 받아줘. 너에게 필요할 것 같았어.」 (…) 덜컥─. 터벅터벅──. 토비 : (선물이라니… 뭐야…….) (이불 속에 뭔가…….) 꿈틀─. 토비 : ?! ??? : 이제야 오셨군요. 토비 : 너, 넌, 뭐지? ??? : 어라, 얘기 못 들으셨어요? 씨가 오늘 밤 당신의 잠자리 파트너를 제게 부탁하셨는데. 토비 : 뭐? ??? : 정말 대단한 여자친구네요. 그녀는 유곽의 여자들보다 더 파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아요. 토비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 : 뭐랬더라, '추운데 멀리 나갈 필요없다'고 했던가…? 후후후……. 토비 : ……. ??? :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요. 풀썩─. ??? : 옷 벗어요. 토비 : 그냥 놔 둬. ??? : 왜요? 오늘은 그런 기분인가요? 토비 : 기어오르지 마. 창녀 앞에서는 원래 안 벗어. ??? : 어머나, 그런 말을 하면 아무리 기녀라도 상처받는다구요. 뭐, 저는 더 좋지만요. 토비 : 그녀에게 얼마나 받았나? ??? : 꽤 두둑하게요.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그만큼 당신을 극진히 접대하라는 거겠죠. 토비 : (헛웃음) ??? : 어떻게 하면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도 자세히 가르쳐 줬어요. 토비 : 세심한 배려에 몸둘 바를 모르겠군 그래. ??? :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토비 : 어떤 것 같나. 얼굴도, 몸매도, 목소리도, 심지어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까지, 어느 것 하나 내 애인은 너에 비할 것이 못된다. ??? : 그런데도 어째서 그녀는 모르는 걸까요. 이상하군요. 왜냐면 나는 당신의 한쪽 눈만 봐도 알 것 같거든요. 토비 : ……. ??? : 이렇게 쓸쓸한 눈을 하고 있는데… 무심한 여자친구네요……. 토비 : (창녀 따위에게 속을 내보이다니… 내 꼴이 말이 아니군… 그 영감탱이가 알면 얼마나 나를 비웃을까…….) ??? : 일단 담배 한대 피울래요? 토비 :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뭘 찾는 거냐고, 이제 고장난 물건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는 거냐고, 그렇게 물어 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야.) ??? : 자, 여기. 좋은 거예요. 특별히 당신에게 줄게요. 그러니까 입 좀 보여줘요. 스윽─. ??? : 어머나-. 토비 : (나한테 손 대지 마…….) ??? : 당신, 굉장히 미남이었네-. 굳이 가려진 부분까지 보지 않아도 알겠어-. 토비 : (너 따위가 감히… 보지 말라고…….) ??? : 굉장히 예쁜 입술이야-. 하지만 걱정 말아요, 당신이 바라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런 것을 욕심내지 않으니까. 키스만큼은 애인하고만 하는 게 좋잖아요. 토비 : (애인…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반복했던 나 자신도 심각하게 고장난 물건이었군…….) (그저 대신일 뿐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창녀라도 딱히 상관없었을 터인데…….) (어째선지 그녀는 특별했어…….) (아니… 그보다는…….) (유일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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