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떠나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어제 도착한 장소에서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마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언덕만 지나면 도착인가. 저 멀리 비마을 특유의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기하학적으로 얽히고 설킨 배관과 전깃줄. 과거에는 여느 마을 보다 기술적으로 발달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계기에 의해서 발전이 멈추고 말았다. 지금까지 어둠에 감춰져 왔던 비밀이지만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어둠 속에서 성장해 왔다. 설마하니 페인 씨와 코난 씨가 그렇게 되실 줄이야. 그들이 어떻게 비마을을 지배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나뭇잎 마을을 치는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동안 아카츠키가 많은 것을 부수긴 했어도 불의 나라와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테러행위를 벌인다고 하는 것은 과연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 닌자들의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 왔다. 물론 그 틈에도 아카츠키와 같은 어둠의 세력은 존재했지만 하루에도 수천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에 빗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이 변하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라면 좋겠지만 바람의 느낌이 좋지 않다. 5개국이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나라의 군사 체계를 재정비하고 있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폭풍에 대비하는 것처럼. 출입이 통제되어 어느 곳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지금 더 이상의 정보 수집은 무리다. 오비토를 찾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부딪혀서 암담한 심정이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구태여 거스를 생각은 없다. 사실 나도 추억은 추억인 채로 남겨 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다름 아닌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곁이다. (…) 끼이익─.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거실의 풍경이 생각보다 삭막한 분위기로 다가온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그렇고 여기저기 먼지가 쌓여 있는 걸 보니 한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토비는 다른 곳에서 생활했던 건가. 설마 화류가는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제 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은가. 무엇보다 토비는─ 그는 떠나려는 나를 붙잡으며 내게 키스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내가 없는 집이 허전하게 느껴져서 일부러 비워 두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나의 흐뭇한 상상일 뿐이지만.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집안을 깨끗이 닦고 청소했다. 여행하는 내내 숙박시설을 전전했기에 '내 집'이라는 마음만으로 힘든 줄도 모르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 오비토에게는 미안하다. 그러나 나도 평범한 여자들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토비도 엄연히 데이다라와 같은 테러리스트의 신분이지만 이제 결말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짧은 순간이라도 단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다. 청소가 끝난 뒤에는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탁탁탁 도마 두드리는 소리와 보글보글 냄비 끓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만든 것치고는 제법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삭막했던 집안에 따뜻함이 번지니 이제 좀 사람 사는 느낌이 난다. 지금쯤이면 토비도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았겠지.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니까, 가끔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함께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살짝 간을 보니 놀라울 만큼 맛있게 만들어졌다. 이것도 사랑의 힘인가. 좋아. 이제 예쁘게 담기만 하면 된다. 후후후 나지막이 웃으며 선반에서 접시를 꺼냈다. 그리고 식탁에 올려 놓기 위해 돌아서는데─ 누군가── 갑자기 낯선 남자가 시야에 들어와서 흠칫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접시의 파편이 바닥에 흩어진다. 자칫하면 밟아서 발을 다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생각할 경황이 없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 싱크대가 등에 닿는 순간 멈춰 섰다. 남자도 덩달아 놀란 듯 내게 손을 뻗으려다 멈춘다.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순간 무심코 '손 엄청 크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더 무섭달까. 하지만 곰 같은 실루엣이 어쩐지 눈에 익다. 딱 이런 몸집에 결계를 무시하고 소리없이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토비…?" 불의 나라 전통의상 중 하나인 우치하 일족의 옷은 커다란 깃이 목의 둘레를 넓게 감싼다. 허리를 기준으로 위로는 여밈이 없고, 아래로는 나누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우치하 일족이 사라지면서 이와 같은 복장도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다.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소용돌이 가면과 전혀 다르게 생긴 하얀 가면은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던 머리카락을 완전히 덮고 있다. 지금은 뒷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길게 늘어뜨린 두 개의 끈으로 묶어서 고정하는 것 같다.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사륜안을 연상시키는 세 개의 곡옥 모양인데, 그 중 두 개가 앞을 보기 위한 구멍으로 되어 있다. 그림자 속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확신했다. "토비…!" 재회의 기쁨에 마음이 앞서서 접시의 파편을 밟았다. 와그작와그작. 토비의 품에 뛰어들어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너무 좋아서 아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토비가 나보다 더 놀란 것 같다. 번쩍 안아 올려 발 먼저 살펴 보더니 놀라움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작 나 자신은 피가 나거나 말거나 그에게 달라붙어서 애정표현을 하고 있다. "발은 괜찮은 거ㄴ…" "토비… 보고 싶었어…!" "그보다 발을…" "토비… 토비…!" 부비적부비적. 기쁨에 겨워 헤실헤실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흐애애애앵. 물론 이 또한 기쁨의 눈물이다. 상처는 치료하면 그만. 이 순간의 감정은 오로지 지금 뿐이다.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토비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정말이지 커다란 손. 여전히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곰발바닥처럼 느껴진다.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무기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부채처럼 생겼고 손잡이 끝에 사슬이 달려 있다. 나는 집을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인데 토비에게는 그새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토ㅂ… 토비이…흐… 흐윽… 그동안 어디…. 윽……." "너처럼 여기저기, 아지트를 전전하면서 지냈다." "화류가 안 갔어…? 흑… 흑흑……." "그걸 제일 먼저 물어볼 거라 생각했지. 걱정 마라, 여자 근처에도 안 갔으니까." "지인짜아아…? 흐애애애애앵…!" 감동도 이런 감동이 있을 수 없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제쳐 두더라도 일생 동안 화류가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녀석인데, 나를 위해 나쁜 습관을 싹 고치고 약속을 지켰다. 예전의 바람둥이에 대한 서러움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내 기분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니지, 당장 하늘이 무너진대도 키스는 하고 죽어야 된다. 헤어지기 직전 처음 키스를 해서, 솔직히 말하면 떨어져 있는 동안 하루 반나절은 그 생각뿐이었다. 토비랑 키스하고 싶다─. 키스─. 키스키스──. 여자의 체면이고 뭐고 먼저 입술을 덮치려다가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예전 소용돌이 가면은 위로 올리든지 옆으로 돌려서 입을 드러낼 수 있었는데 새로운 가면은 그럴 수가 없다. 보아하니 키스하려면 아예 벗겨야 할 것 같다. 토비가 완전히 맨얼굴을 보이는 것은 아직 허락해 주지 않아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괜히 앞서나갔다가 나한테 실망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치만 키스는 하고 싶고… 어쩌지. 어느덧 머릿속이 '키스'로 가득해진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 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시선을 옮겨 보니… 이럴 수가, 처음에는 크게 인지하지 못했는데 언제나 오른쪽만 드러나 있던 토비의 눈이 두 개의 구멍을 통해 양쪽 다 나를 향하고 있다. 왼쪽도 볼 수 있었던 건가. 이식이라도 받은 것인지 궁금하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천천히 물어도 상관없겠지. "킁, 조금만 기다려. 여기 금방 치우고 식사 차려줄게." "어딜 마음대로 가려고. 가만히 있어라." 좀 더 안겨 있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오랜만이니까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을 얼른 먹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토비의 품에서 벗어나려는데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거실로 장소를 옮긴 토비가 나를 소파에 내려놓은 뒤 자신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는다. 그가 내 발을 감싸쥐는가 하면 손바닥에서 나무와 같은 것이 스물스물 나와 상처를 덮는다. 놀라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설마하니 목둔인가.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목둔의 사용자는 나뭇잎 마을에 한 명뿐… 아니, 그보다 나무가 상처에 딱 붙어서 내게 무언가를 불어넣고 있다. 약간 묵직한 느낌이었다가 반대로 가벼워지는 듯하더니 이내 서서히 멀어지며 토비의 손바닥으로 돌아간다. 신화에나 나올 법한 생명의 나무처럼 놀랍게도 상처가 치료되었다. "어때. 아직 아프냐." "아니, 전혀… 고마워…" 어쨌든 이제 상처도 괜찮으니까 주방으로 돌아가서 깨끗이 청소하자. 그동안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던가. 부족한 실력이지만 음식도 정성껏 만들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일어나려는 찰나, 토비가 나를 붙잡아 다시 소파에 앉힌다. 그리고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아, 그렇지. 같이 식사를 하려면 가면을 다 벗어야… 이렇게 또 같은 난관에 부딪히는 것인가. 이번에도 내 생각을 읽은 듯 토비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퐁-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소용돌이 가면과 붉은 구름의 코트를 입은 익숙한 모습이 나를 반긴다. "앞으로 입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 땐 이 모습으로 변해줄게~. 괜찮지~?" 능글능글 귀여운 말투가 지쳐 있던 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듯하다. 이번에는 나도 예상치 못했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미워했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 끝내 사랑에 빠져 버린 그가 눈앞에 있다. "그만 울어~. 나도 같이 울고 싶어지잖아~." 이제는 친구가 아니다. 단순한 잠자리 상대는 더더욱 아니다. 애인으로서, 토비가 어느 때 보다 다정하게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준다. 그리고 늘 자신의 것이었던 내 옆자리에 앉아 편히 기댈 수 있도록 감싸안는다. 어깨에 기대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제 더는 울지 않아도 되겠지. 토비가 이렇게 나를 아껴주는데 울면 안 된다. 적어도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은 슬퍼할 일도 없을 거라 믿고 싶다. "키스하고 싶었지~? 이제 해도 돼~." 알고 있다면 먼저 해주지. 그래도 짓궂은 점은 여전하구나.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그래도 좋아서 얼마 못 가 다시 헤실거리는 얼굴이 되었다. 소용돌이 가면을 살며시 옆으로 비껴쓰게 한 뒤 드러난 얼굴의 일부분을 잠시 눈에 담는다. 선명한 이목구비, 매혹적인 입술, 그렇게 감추려 했던 오른쪽 뺨의 흉터마저도 남성미를 돋보이는 듯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한 마디로 그냥 내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 "정말 해도 돼…? 이젠 싫지 않ㅇ…?" 지금까지 상당히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토비도 속으로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나 보다. 답답했는지 내 말을 뚝 끊어버리고 먼저 키스해 왔다. 입술이 겹치며 '꼭 그렇게 애태워야겠냐'고 도리어 따져 묻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약간 움켜쥐기도 한다. 전신에 전율이 퍼져나가듯 놀라울 정도로 아찔한 쾌감이 일순간 나를 지배한다. 토비의 다른 쪽 손이 팔을 꽉 붙잡을 때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짜릿해서 입술이 겹쳐진 채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촉매가 되어 더 뜨겁게, 깊숙이, 혀가 얽히며 야릇한 소리가 머릿속에 울리고 겉잡을 수 없이 달아오른다. 의식이 흐릿해질수록 힘이 빠져나가 몸이 점점 뒤로 기운다. '사랑'을 증명하는 두 사람의 키스는 반가움 정도의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을 지녔기에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기분이 몽롱해진다. 아아,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었는데. 거의 혼절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으면서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매혹적인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노라면 뱃속에서 욕망이 마구 치솟는다. 지금까지의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토비의 사랑은 그보다 훨씬 강렬하다. 손끝에서부터 전율을 퍼뜨리며 뜨거운 피를 타고 흘러 심장에 스며든다. 키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 다음은 과연 어떨지 생각만으로 두려울 정도의 흥분감이 밀려온다. "근데 토비… 너 왠지 하얀 가면을 쓰고 있을 때랑… 소용돌이 가면을 쓰고 있을 때의 목소리가 달라…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아……." "아~. 사정이 조금 있어~. 신경쓰인다면 그냥 둘 다 내 목소리라고 생각해~." 하얀 가면일 때는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다. 데이다라가 걸걸한 말투의 영향으로 약간 날카로운 느낌이었다면 토비는 냉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차분한 목소리다. 그리고 소용돌이 가면일 때는 내가 기억하는대로다. 중간 정도의 톤으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 "그럼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지만… 난 소용돌이 가면일 때의 목소리가 더 좋아…" 나는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남자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그리움일 것이다. 내게 익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소용돌이 가면일 때의 목소리니까. 그쪽이 토비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하얀 가면일 때는 뭔가 느와르 영화에 나올 법한 악당… 그중에서 제일 나쁘고 힘도 센 최종 보스의 목소리 같아서 무섭다. "맛있는 냄새 난다~. 뭐 만들었어~?" "토비가 좋아하는 건 다 있어." -라고 말해도 많이 만들어 봤자 남을 뿐이고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 음식이 필요없는 토비에게 무언가 만들어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몇 가지뿐이다. 그밖에 토비가 뭘 좋아하는지 솔직히 아직 잘 모르니까, 앞으로 차차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식사를 하면서 비록 짧았지만 여행 중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결국 오비토를 찾지 못했고 더 이상 찾지 않을 거라 단언했다. 떠나기 전에 약속했던대로 이제 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토비에게 줄 것이다.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오직 토비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나 스스로도 굳게 다짐했다. 설령 데이다라 때처럼 토비가 날 버린다 해도 상관없다. 이번에야말로 어디가 되었든 같이 떠나면 그만이다. 혼자 남겨지지만 않는다면 두렵지 않다. 많은 것들을 이곳에 남기고 가겠지만 아무것도 아쉽지 않다. 이런 내 마음이 토비에게도 전해졌을까. 내게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충분했는지 토비는 나의 여행이나 오비토에 대해서 달리 묻지 않았다. "굉장하네~." "뭐가?" "야채를 잘게 썬 거랑, 아삭아삭하지 않게 제대로 익힌 거~." "?" 그 정도는 요리하는 방식에 따라 평범하게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토비가 어느덧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러고 보니 데이다라 때의 습관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평소의 나는 야채를 크게 썰고 살짝 데쳐 먹는데 오늘은 어째선지 정반대로 요리했다. 긁적긁적. 벙찐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인다. 그보다 토비는 눈이 가려진 상태로 어떻게 식사를 하는 걸까. 키스할 때는 차크라의 흐름으로 인지한다 쳐도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은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사륜안에도 백안과 같은 투시 능력이 있나. 딱히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닌데 새삼 경이롭다. "~." "응?" "오늘 같이 씻을까~?" 갑자기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는 토비의 대담한 발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하마터면 체할 뻔해서 가슴을 쾅쾅 치며 힘겹게 넘겼다. 이런 흐름의 대화는 낯설지 않다. 떠나기 전날 지금과는 반대의 입장으로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후에 있었던 일은─ 아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라 이젠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지금은 매의 아이들이 떠나고 없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부끄럽다. 물론 그렇다고 싫은 것은 절대 아니다. 토비가 원한다면 나로서는 괴, 굉장히 기쁘다. 하지만 너무 기쁜 티를 내면 숙녀답지 못하니까 일단 순진한 얼굴로──. "으음… 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 돌이켜 보니 당시의 토비와 똑같은 반응이다. 그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지 토비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원래 그렇긴 했지만 음식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해서 아쉬웠는데, 설마하니 이런 엄청난 제안을 해올 줄은─. "그냥 시간 아끼자는 거예요 아가씨~. 오랜만이니까 오늘은 침대에서 하자~. 편안한 분위기로~. 천천히~." 내 착각이었던 건가.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으니 토비가 빈 포크를 잘근거리며 능글맞게 웃는다. 일부러 나를 놀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나도 같은 생각인데, 내 몸을 생각해서 상냥하게 해준다면 너무 고마운데,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나 혼자 괜시리 엉큼한 생각을 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약속 제대로 지켰으니까~. 기분 좋게 해줘~." "나, 나도 약속 지켰어… 잠은 숙소에서만 잤고, 하루 세끼 꼬박 챙겨먹었고, 이렇게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기분 좋게 해줘."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내가 실망시킨 적 있어~?" "아니… 토비는 나한테 실망한 적 있어…?" 어째서 말 없이 웃기만 하는 거야. 편안한 분위기라고 해도 이렇게 되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화류가의 여자들에 비하면 나는 경험이 많지 않고… 그 전에 얼굴이나 몸매가 썩 훌륭하지 않고… 자신있는 건 오직 '헌신'뿐인데… 어떡하지……. (…) 씻는 내내 고민해 봤지만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남자를 만족시키는 특별한 묘책 같은 건 애당초 나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이에게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자. 토비는 화류가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나와 할 때는 솔직히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내게는 그 방식이 너무 자극적이랄까, 나는 언제나 토비 보다 먼저 만족하고 그대로 지쳐서 잠든다. 그냥 잠드는 것도 아니고 거의 기절해서 다음 날까지 깨지 않는다. 토비는 내가 자건 말건 어쨌든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했지만 오랜만에 하면서 그때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난 널 이만큼 사랑해'라는 것을 전하고 싶다. "음… 음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말 그대로 낮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부드러운 키스를 나눈다.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밤이 되면 모든 것을 잠들게 하는 안락함과 고요함이 찾아온다. 여러 가지 고민을 했지만 지금은 눈앞의 남자 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쪽- 입술이 멀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소리, 서로의 몸이 스치는 소리, 심장의 고동까지 선명하게 들려와 욕망을 자극한다. 부끄럽지만 키스만으로 민감해져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다. "토비… 이제… 키스는… 그만하자……." "왜~? 나 지금 굉장히 좋은데~." 뜻밖의 말에 조금 놀랐다가 후후후 웃으며 토비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미 10분 정도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면 토비도 키스 만큼은 많이 해보지 않았다. 최소한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겠지. 떠나기 전 나와 했던 게 토비에겐 첫키스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방금 것이 세 번째다. 그리고 지금 그는 네 번째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조급한지 곰발바닥으로 내 팔을 주물주물 계속 만지작거린다. 가감 없는 힘에 눈썹이 찌푸려져도 귀여워서 외면할 수가 없다. "음……." 네 번째 키스는 낮에 했던 것과 같이 뜨겁다. 부드러운 입술에 매끈한 혀가 얽혀서 찌릿찌릿 강한 전율이 민감해진 몸을 예리하게 자극한다. 토비가 좋다고 말해 주어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하다. 방심했다가 갑자기 절정이 와버리면 어떡하지. 아무리 오랜만이라 해도 너무 부끄럽다. 실은 나도 키스가 좀 더 하고 싶다. 그런데 토비를 밀어내자니 마음이 괴롭다. 입술이 멀어져 뜨거운 숨결이 떨어진다. 여전히 토비의 손이 내 팔을 꽉 붙잡고 있다. "뭐야… 너야말로… 나랑 키스하는 게 싫은 거야~?" "싫을 리가 없잖아… 그게 아니라… 실은 나… 이 순간을 무지 기다렸어… 지난 날처럼 혼자 만족하고 끝내고 싶지 않아… 하고 싶었던 것들… 너한테 해주고 싶었던 것들… 전부 다 하고… 그러고 나서 잠들고 싶어……." 내 얼굴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은 토비의 조급함에 빗댈 것이 못된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해도 정말 절정을 느낄 것 같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위태로이 떨린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뒤 스스르 몸을 눕히며 엎드린 자세를 취한다. 아아, 사랑의 힘은 굉장하다. 가까이서 보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은근히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이쪽은 언제나 솔직하지 않은가. 일단 가볍게 터치. 조심스레 혀를 내밀어 본다. 지난 번처럼 쓰담쓰담 해줬음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통한 것처럼 토비의 손이 내 뺨을 감싸온다. 정말 크다. 아, 지금 말하는 건 정면이 아니라 손이다. 물론 정면의 녀석도 처음 봤을 때 여러 가지 의미로 흠칫 놀라긴 했는데. 아니,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자신. 어째서 조금 전의 생각으로 몸이 더 뜨거워지는 거냐고. 흠! 흠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집중하자. 집중. "푸훗-…" "왜 웃어…?"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대체 뭐가 웃긴 거지. 역시 내가 너무 서툴러서인가. 화류가의 여자들에 비하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두 번이나 웃음을 사니 별 수 없이 주눅이 든다. "말하면 화낼지도 모르지만~, 네 표정이 말이야~. 분명 나를 위해 애쓰고 있는데… 나보다는 네가 더 기분이 좋아 보여서~. 귀를 만져 주는 게 좋은 걸까나 하고~. 으음~. 귀여워서~." 바로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토비의 손끝이 귀를 스치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엄청난 고동이다. 귀가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왜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지. 아아, 그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토비가 내게 안마를 해줬을 때 그의 손이 귀에 스쳐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날 처음 토비에게 '성'적으로 이끌렸다. 처음부터 커다란 손이 정말 좋았는데, 그날은 머리가 아닌 귀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성감대에 닿았던 것이다. "왜 이제야 알았지~.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만져줄게~. 쓰담쓰담~. 쓰담쓰담~." "아… 안 돼… 앗… 아아…!" "엥…?" 말도 안 돼. 정말 이건 말도 안 된다. 토비의 손끝이 빠르게 마찰할 때 마치 아래쪽을 만져진 것처럼 소름이 확 돋으며 격정적인 쾌감을 느꼈다. 몸이 바짝 움츠러들었다가 힘이 빠져 나가며 시트 위로 쓰러진다. 토비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런 상태로는 무리다. 지금 내 몸은… 절정의 여운으로 토비의 손이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파르르 떨린다. "미안… 토비… 나… 더는… 여유가……." 이제 모르겠다. 애처로운 손길로 토비의 팔을 잡아당긴다. 지금 내가 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은 말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아직 좀 이른 것 같은데… 알았어~. 잠깐만~?" 토비가 반대쪽 손을 쭉 뻗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작고 네모난… 아, 그랬지 참. "아니야…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그거 하지 마……." "좋은 날~? … 너……." 서로 사랑하니까 괜찮아. 네가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간에 이젠 상관 안 해. 나도 너의 아이가 갖고 싶어. 이번에는 절대 잃지 않을 거야. 너도, 내 아기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토비… 나 너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 잠시 침묵이 지나간다. 천천히 내려오는 토비의 손. 나를 위해 꺼내든 '그것'도 시트 위로 툭 떨어졌다. "아~… 잠자리에서 우는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찌질한데~… 안 되겠네~… 킁~……." "토비…?" "아냐, 아냐~. 나 안 울어~. 잠깐만 기다려 봐~. 마음 좀 추스르고~." "괜찮으니까 숨기지 ㅁ…" 차마 내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는지 토비가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그리고 마음을 추스르는 듯 한동안 말이 없더니, 언제나와 같이 내게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부드럽게 속삭인다. "앞으로 '사랑해'는 잠자리에서 두 번 이상 말하지 마~." "왜…?" "진심으로 기쁘지만~. 너무 기쁘면 아래가 식어 버려~." "에… 어째서……." "으음~. 안에 넣는 것 보다 이렇게 끌어안는 게 더 좋으니까~?" 토비의 달콤한 말이 내 몸과 마음을 중독시킨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데 머리는 멍하다. 꿈을 꾸듯 몽롱해서 가만히 기대어 있으니 토비가 나를 침대 가운데로 눕힌다. 목에서 가슴으로 천천히 옮겨가며 키스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번뜩 꿈에서 깨어났다. 가슴의 가장 민감한 곳에 혀가 닿는 순간 신음이 흘러나온다. 저도 모르게 손을 토비의 머리로 가져갔다. 밀어낼 듯하면서도 자신에게 가까이,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이 정도면 되려나~." "살아났어…?" 내 장난스런 물음에 토비가 '응~.' 하고 대답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럽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오늘은 낮부터 계속 차분한 느낌이었기에 평소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좀 더 보고 싶다. 그런데 그는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도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말한다. "나도 사랑해… 지난 일은 부디 용서해줘……."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확 들어와서 아픔과 신음이 섞인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었다. '편안한 분위기'인 것은 확실한데, '천천히'는 잘 모르겠다. 묵직한 쾌감이 배 안쪽에서 쿵쿵 울리며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 사랑해……." "토비도… 여러 번 말하지 마……." "왜~? 남자가 침대에서 사랑고백하면 너무 볼품없나~?" "기뻐서… 너무 빨리 와 버려… 아…!"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그랬다. 줄곧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바로 들려오니 아, 다시 만났구나, 함께 있구나, 서로 이어졌구나, 그런 생각이 차례로 들었다. 그 사이 쾌감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고, 토비의 숨소리가 웃음을 머금는 순간 또 한 번 절정이 왔다. 솔직히 지금까지 그러한 웃음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는데, 그의 단단한 몸 만큼이나 두려웠는데, 그것이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공포심을 깨워서 도리어 쾌감으로 다가왔다. 과거에 토비에게 당했던 일을 떠올리면 나는 여전히 그가 무섭다. 무섭지만 현재와 연결지어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것이 기뻐서 무서웠던 기억이 희석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리고 너무──. "아아…!" 너무 기분 좋다. 토비의 몸, 토비의 움직임, 오직 나만의 것으로 하고 싶다. 한때 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던 바람둥이지만 그래도 좋다. 이 순간 만큼은 그의 지난 여성편력까지 사랑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토비… 토비……." 쾌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스로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심이다.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정신이 아찔하다. 방금 그게 몇 번째였지. 이제 한계다. 가느다란 신음이 울음소리로 바뀌자 토비가 내게 입을 맞춘다. 거기까지는 다정하고 좋았는데 혀가 얽히면서 다시 욕망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욕망은 언제나 정직한 듯하면서도 간사하다. 사랑한다면서, 이젠 싫다. 더는 무리다. 그만, 그만해. "알았어~. 손톱 세우지 마~. 아파~." 토비가 내 귀에 일부러 힘을 주어 진하게 키스한다. 쪼옥~ 하는 소리가 장난을 치는 것만 같은데,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왜 이리 멋있는지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이가 생기면… 아마 꿈을 포기해야 하겠지……." 이렇게나 숨이 거친데도 토비의 말이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진심이 느껴진다. "그래도 상관없어… 네가 있으니까……." 두 번 다시 멀어지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날처럼 토비가 나를 끌어안는다. 내게 기대고 있을 뿐이지만 마치 보내기 싫다는 듯 붙잡고 매달리는 것 같다.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 너라면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었는데……." 안타까움을 느낄 새도 없이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아파서 비명이 나올 지경이다. "사랑해… 사랑해……." 힘자랑하는 거야 뭐야. 이런 곰. 짐승. 기절할 것 같다. 숨을 쉬긴 커녕 갈비뼈가 부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마침내 절정에 이르고 토비가 신음을 토해낸다.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 다행히 죽지 않았다. 이제는 뜨겁다. 녹아버릴 것 같다. 내 뱃속에 분명히 흐르고 있다. 기뻐서 눈물이 나온다. 이건 욕망의 증거가 아니다. 사랑의 증거다. "하아… 하아……." 나를 안은 채 토비가 몸의 방향을 돌려 눕는다. 그는 밑으로 내려가고 나는 위로 올라왔다. 숨을 고르면서도 팔에 힘은 빼지 않는다. 편하게 기대어 눕자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싸온다. 조금 거친 느낌으로 쓰담쓰담. 기분 좋았다는 건가. 정말 그런 건지 확인하고 싶어서 다시 슬쩍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는데 이것도 사랑의 힘이다. 토비의 뺨을 슬쩍 감싸니 그가 뭔가 하고 비껴쓰고 있던 가면을 고친다. 선명한 붉은색의 사륜안. 기대했던 대로라 함박웃음을 지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이번에는 내가 토비에게 쓰담쓰담을 해준다. 기분 좋은 듯 스르르 눈이 감긴다. 안 돼, 좀 더 보고 싶은데. 생각하기 무섭게 토비가 번뜩 눈을 뜬다. 이번에야말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시선을 피하며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지금은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귀여운데 뭘 그리 부끄러워 한담. "기분 좋았어?" "어어… 굉장히…;;" "이제 내가 화류가의 여자 보다 낫지?" "비교도 안 되지… 아니, 이제 그런 얘기는 하지 마…;;" 그래, 예전과는 다르니까. 지금은 착한 남친, 좋은 남친, 어떤 말도 아깝지 않다. 그런데 토비는 아직 내게 정식으로 사귀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분명하게 해두고 싶다. "토비, 이제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엉큼한 남친, 집착하는 남편 중에 선택해~." 전자는 뭐고 후자는 뭐야. 어느 쪽도 그닥 좋게 들리지 않는데.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는 건가. 황당하지만 농담은 아니다. 토비의 눈빛을 보니 나름 진지하게 내뱉은 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엉큼한 남친과 집착하는 남편. 뭘 선택해야 하지… 으음… 일단 남편이 끌리지만 아무래도 집착 보다는 엉큼이 낫… 아니, 아니, 방금 전에 진심으로 죽을 뻔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엉큼은 안 돼, 절대 안 돼. "집착하는 남편으로 부탁해." "나중에 딴소리 하기 없기~." 남친과는 일부러 아기를 만들거나 하지 않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남편이 가장 알맞은 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 심하지 않다면 오히려 집착해주는 편이 안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금도 나는 바람 같은 거 꿈도 꾸지 못한다. 매일 위치가 알려지는 건 기본이고, 행여 다른 남자에게 가슴이 두근거리기라도 했다간 바로 들켜 버린다. 지금은 귀여운 토비지만 화나면 도무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무섭다. 무엇보다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그까짓 집착이 뭐 그리 대수랴. 나는 토비의 어떤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다. 커다란 행복을 위해 작은 불행 쯤은 기꺼이 품에 안을 것이다. 아니, 함께일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름 행복이겠지. "자, 그럼~." 토비가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다. 여보라고 불러주려나. 두근두근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퐁- 연기가 피어오르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는 건, 몸이 밀착되어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지만 지금 토비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맨얼굴이다. "이대로 떨어지지 않고 한 번 더 할 수 있을까?" 내 몸에 긴장이 들어가는 게 느껴지는지 토비가 큭큭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정말 하자는 건지 괜찮으니까 안심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동안 마음고생시켰던 것은 이제부터 충분히 보상해 주마." 차분하게 가라앉는 목소리. 듬직한 어깨에 지친 몸을 기대자 편안함과 떨림이 동시에 느껴진다. "과거는 잊어라.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보고 있다." 만약 두 사람의 관계가 지난 날과 다름없었다면 아마도 이런 말은 들을 수 없었겠지. 지금 토비가 어떤 기분으로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너무 달콤하다. 속삭임에 취해 잠들 것 같다. "꿈이 아닌 '지금의 너'를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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