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분이 별로면 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내가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우리 애들이 밥을 굶잖아." 점심에 쓰일 식재료가 들어 있는 상자를 끌어안고서 마치 동굴과 같은 통로를 지나간다.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지하 공간, 지금 그곳을 토비와 나란히 걷고 있다. 지하에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서 쉽게 들락날락 할 수 없다. 토비는 내가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썩 내키지 않아 한다. 그래서 매일은 무리지만 종종 이렇게 내가 그들의 식사를 직접 준비하곤 한다. "우리에게 언제부터 그렇게 많은 애가 있었지~?" "먹이고 재우고 하다보면 다 내 새끼처럼 느껴지는 거야." 돌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거실의 밝은 빛이 시야를 환하게 비춘다. 하필이면 카린에게 점심을 약속한 날과 여자의 그날이 겹치는 바람에 평소와 같이 움직이고 있어도 실은 컨디션이 엉망이다. 침묵속에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와 감자의 껍질을 벗기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아까 토비에게 무심코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던 게 미안해서 무엇이든 말을 건네고 싶은데 어쩐지 토비도 오늘은 별로 살가운 느낌이 아니다. 그래서 입을 다문 채 눈치를 살피고 있다. "저기… 토비, 나 혼자서 충분하니까 도와주지 않아도 돼." "감자 껍질 벗기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이거 봐~. 예쁘게 깎았잖아~." "그런 게 걱정돼서 하는 말이 아니라……." " 너랑 같이 있고 싶어~." "……." 모처럼의 휴일이니까 좀 더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싶은 것인가. 그야 나와는 달리 언제나 활발하게 움직이니 가만히 있으면 심심할 법도 하다. 그런데 왠지 조금 다르달까, 무언가 고민이 있는데 혼자 속으로 삭히고 있는 것 같고, 그것 때문에 약간 쓸쓸해보이기도 한다. "실은 오늘 내가 좀 예민하거든… 그러니까……." "알고 있어~. 더는 네 신경을 건드리지 않을게~." 말 그대로 지금 토비는 감자에 시선이 고정된 채 빙글빙글 돌려가며 묵묵히 껍질만 까고 있다. "토비 너, 내가 오늘 그날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그래~. 이제 슬슬 그럴 때가 되었잖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 그날은 나도 예상 못하는데 토비가 어떻게─. "2주 전이 배란일이었으니까 아기가 안 생겼다면 피가 나오겠지~." ??? 은근히 집중해서 감자를 깎고 있는 토비. 그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가간다. 그가 내게 예쁘게 깎은 감자를 자랑하려는 찰나 눈이 마주치고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는다. "토비 너 혹시… 혹시 말야……." "?" "아기가 생겼으면 하는 거야…?" "에…?" 마치 일시정지된 화면처럼 토비는 나를 응시하고, 나는 토비를 응시한다. 그렇게 꽤나 긴 침묵이 흐른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도 참~.;;;" 그가 잠시 내게 향했던 몸의 방향을 정면으로 되돌린다. 이미 깎아놓은 감자를 무심코 들었다가 내려놓는가 하면, 옆에 있던 감자를 집어 들고, 다시 빙글빙글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아니면 왜 내 생리주기를 계산하고 있는 거야…?" "반대야~. 반대~. 갑자기 덜컥 아기가 생기면 곤란하잖아~.;;;" 그럴싸하게 둘러대고 있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가임기에 관계를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그 기간 동안 우리는─. " 너도 알다시피 난 아이들에게 전혀 애정이 없고~. 아빠가 되는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그럼 왜, 그, 언제나 보호하는 것을 생략하는 거야…?" 감자를 깎던 토비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그대로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뜸을 들이더니, 조금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그가 대답한다. "뻔하잖아~. 그냥 하는 게 더 기분 좋으니까~." "……." 분명 그런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것은 전혀 없는데, 토비의 대답이 새삼 내 가슴에 상처를 남긴다. 씁쓸한 마음과 은근히 강한 아픔을 애써 억누르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토비가 내 팔을 덥석 붙잡는다. "… 저기……." 잠깐이나마 내가 바보 같은 착각을 했다. 가임기에 관계를 가진 것,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애당초 토비는 욕구만 해소된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녀석이다. 내 몸이 망가지던 말던, 아기가 생기던 말던─. "하지만 난 네가 원한다는 걸 알고 있…" "괜찮아, 토비." "?" "아기가 생기지 않아도 난 괜찮아." "왜~? 너는 원했잖아~. 그래서 나랑……." 방금 전 토비가 엉망으로 살을 다 깎아버린 감자를 잠시 치워두고, 그의 손을 살며시 붙잡는다. "아기는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생겨야만 하는 거잖아. 이런 식으로 갑자기 임신이 되면 너의 말대로 곤란할 거야." "으응… 그렇네애… 하하핫……." 비록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지만 그 손을 한 번 쓰다듬고는 놓아준다. 그리고 다시 싱크대로 돌아와 자신의 일을 한다. 껍질 벗긴 감자를 채썰기 위해 다시 식탁으로 돌아서는데, 토비가 어느덧 감자도 칼도 내려놓은 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앉아 있다. "토비…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뭔데~? 말해봐~." "너 지금… 좀… 슬퍼보여……." "정말 이상한 소리네~. 아기가 생기던 말던 내가 그딴 걸로 동요할 리 없잖아~. 아무래도 좋아 난~." 드르륵─.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아까부터 줄곧 저기압이었던 그에게 내가 괜한 소릴 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슬퍼보인다는 생각 따위를 하는 내가 정말 바보 같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눈에는 토비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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