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밤이 되면 나는 예전보다 훨씬 차분한 기분을 느낀다. 나를 대하는 토비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기 때문이다. 전부터 조금씩 변해가는 듯한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평화로움은 기대 이상이다.

 어제 잠자리를 가질 때도 거칠거나 아픈 것은 전혀 없었다. 정말 연인에게 안기는 것 같아 가슴이 설렌다. 행위가 끝난 뒤에는 토비의 팔을 베고 누워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러던 중 토비가 같이 병원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와 약속한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아침을 먹은 뒤 외출 준비를 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비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숲을 가로지르면 지름길로 갈 수 있었다. 그 편이 가깝기도 했지만 기왕 같이 나왔으니 조금은 데이트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병원이라면 당연히 비마을에도 있다. 지난 십여 년간 악마의 손이 뻗친 것처럼 전혀 발전이 없었다는 말이 나돌고 있는 곳이지만 그 와중에 의료기술만은 비교적 뛰어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려 힘들어진 것인데 토비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지난 날 나는 유산 후유증을 겪었다. 내 마음은 그때 입은 상처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 몸은 의사의 손에 의해 야속하리만큼 허무하게 치료되었다. 시간이 흘러 심리적인 것이 원인이었던 아래쪽의 통증도 거의 사라졌다. 얼마 전 월경도 무난하게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제 산부인과 치료는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토비에게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그는 나와 함께 병원에 왔다. 딱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모습으로 들어갈 수 없다'며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까지 해주었다. 오비토가 성장했다면 이랬을 것이다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완벽한 나의 이상형. 복장은 나뭇잎의 닌자들과 같다.

 솔직히 저 초록색 조끼는 볼때마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오비토에게 입혀 놓으니 느낌이 전혀 다르다. 딱히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가 아니다. 얼굴 아래로는 토비 그대로인지라 우와, 역시 모델 몸매라는 말이 나온다. 어쩜 이리도 각이 딱 잡힐 수가 있지.

 비록 토비 본인의 얼굴은 아니지만 언제나 두꺼운 가면에 가려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이게 어디야 하는 마음이다. 그렇잖아도 감추는 마당에 입까지 다물고 있으면 뭔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데, 지금은 표정변화를 보고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아주 그냥 속이 다 시원하다.

 그렇다고 해도 아까부터 계속 토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슬슬 이상하게 여길만도 하다. 내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웠던 걸까. 토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슬쩍 반대쪽으로 돌린다. 아니, 어쩌면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 차례다, 들어 가자."

 "응."

 토비는 변신술이 능숙하다. 누군가로 변신할 때는 그와 동시에 목소리나 말투도 똑같이 변한다. 물론 실제 어른이 된 오비토의 목소리와 말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똑같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차분하게 바뀌고, '~'하고 애교스럽게 늘어뜨리는 습관이 사라졌다. 밖이기 때문인지 집에서와 같은 애기짓도 하지 않는다. 정말 남편이 된 것처럼 얌전히 내 곁을 지킨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깨에 약간 긴장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제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앞장서서 나를 진료실로 이끈다.

 "오늘은 남편 분과 함께십니까. 첫날 이후로 줄곧 뵙지 못했는데 잘 오셨습니다. 그렇잖아도 제가 남편 분께 잔소리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네, 네…;;"

 꼿꼿하고 점잖은 의사 선생님 앞이라 더 긴장이 되나보다. 그렇잖아도 딱딱하게 굳어 있던 토비가 뜻밖의 말을 듣고 흠칫 놀라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다소곳이 모은 다리, 살며시 움켜쥔 손, 무엇보다 경직된 얼굴이 그의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남편 분께선 아내 분과 자주 식사를 하십니까?"

 "아니요…;;"

 "아니군요. 그럼 아내 분께서 평소에 제대로 식사를 하고 계시는지 잘 모르시겠네요. 그렇다고 해도 아내가 점점 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유산 후 몸무게가 상당히 줄었는데 전혀 느낀 바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현재 아내 분은 영양 실조 상태입니다."

 "여, 영양…ㅅ…"

 "네. 말 그대로 영양 상태가 엉망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임신은커녕 조금씩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할 겁니다. 유산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엔 남편 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남편 분께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토비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의사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나 자신도 놀랐는데 그는 오죽할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영양 실조라니. 몸무게가 줄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난 내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기 때문에 살이 빠지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아마 토비도 그랬겠지. 설마하니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당초 토비는 내게 동행해 주었을 뿐 실제 남편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은 죽고 없지만 아이 아빠였던 데이다라가 내 진짜 남편이다. 처음부터 사랑 없이 시작한 관계를 연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애당초 토비에게 이런 잔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없을 터다. 이쯤에서 솔직하게 '이 사람은 사실 제 남편이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중에 데이다라 대신 잔소리를 듣게 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 나는 싫다. 웬만하면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저희 병원에서 같이 방문하신 남편과 아내 분들에게 상담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잠깐 들리셔서 얘기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남편 분께서 아이를 원하고 계시니까요."

 "예…?"

 토비가 무언가로부터 깨어난 듯 눈빛이 바뀌어 의사를 바라본다. 나도 마찬가지다.

 "남편 분이 아내 분을 데리고 먼저 병원을 찾으셨습니다. 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

 무덤덤한 표정으로 진료를 마친 의사가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차트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유산으로 생겼던 신체적인 아픔은 예상했던 대로 진작에 다 사라졌다. 영양 실조 같은 것은 조금만 소홀히 해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일이니 굳이 유난을 떨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다이어트를 할 때도 겪었지 않았는가. 다만 이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혹스럽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토비는 충격이 가신 뒤 당혹스러움보다도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마을의 하늘과 같은 우울함이 비친다.

 (…)

 "미안해, 토비. 너랑은 상관없는데 괜히 싫은 소리 듣게 해서."

 "나랑 상관없었던 거야? 이래 봬도 난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잔소리 들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데이다라지."

 우리는 정말로 사귀는 게 아니잖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가슴이 그것을 거부했다. 방금 전 걸음이 멈추며 토비의 눈동자가 지금 내 마음처럼 쓸쓸한 빛을 띠었기 때문에. 어떤 말이든 섣불리 내뱉으면 두 사람의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 토비가 내게서 멀어질 것 같다. 얼마 전까지 나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진료실을 나온 뒤로 줄곧 이어져 있던 그의 손에 문득 힘이 꽉 들어간다. 늘 그렇듯이 잡았다기보단 먹혔다는 느낌이어서 문득 쓴웃음이 지어진다. 이 손처럼 여태껏 나는 토비의 그늘 아래 갇혀 있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왜 나는 한 번도 자신이 먼저 무언가를 바꾸어 보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동안 토비가 심한 짓을 많이 했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나를 겁박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한 번쯤은 미친 척하고 날뛰어 볼걸.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하며 싸움을 걸어볼걸.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상황이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만약 그랬으면 어땠을까. 화류가에서 바람 피고 돌아온 토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서 가면을 깨부순다든지, 너도 억지로 당해봐라 하고 입술을 덮친다든지, 하다못해 너 때문에 시집 다 갔으니 책임지라고 주저앉아 울기라도 했으면. 뭔가 달라진 것이 있었을까.

 나는 토비를 좋아한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 그동안 토비를 원망도 많이 했지만 그의 쓸쓸한 표정을 보는 것은 싫다. 그러니까 내가 진작 깨달았다면, 적어도 지금, 그의 이런 얼굴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 관계가 망가져갈 때, 무너져갈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토비를 막으려 하지 않았고, 붙잡으려 하지 않았고, 그의 속내를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봤자 더 아플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의 생각은 어리석었다. 결국 토비도 이렇게, 두 사람 모두 괴로워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내가 조금은 네 여자로 느껴져?"

 능청스런 말투로 묻자 토비의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고개를 슬쩍 돌린다. 이런 귀여운 자식. 지금까지 보였던 서툰 모습은 전부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중에 하나쯤은 진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누나가 좀 더 용기를 내어 주지.

 "우리 정말로 사귈까?"

 데이다라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면 적어도 내게 소유욕은 가졌다고 볼 수 있겠지. 애들처럼 이런 대화를 하고 있으니 민망한 듯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진다. 설령 싫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해도 이제와서 새삼 상처가 될 것은 없다. 이제 나이가 서른인데 무엇을 겁내랴. 다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달콤한 꿈을 깨고 싶지 않다. 아직은 손을 놓고 싶지 않다. 그래서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것을 토비에게 묻는 것도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쉬워서. 이대로 그냥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토비는 내게 싫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남자를 믿지 못하게 된것처럼, 어쩌면 토비에게 여자는 '사랑하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과거에 입은 상처가 두려움을 남겼으니까. 또 다시 같은 상처를 입고 싶지는 않으니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나도 하늘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널 아껴줄 수 있어. 나도 네 꿈에서처럼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나도, 아니, 그녀보다 내가 훨씬 더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

 " 씨, 들어오세요."

 따다다단, 따다다단, 이건 운명교향곡이라는 건데 토비 넌 들어본 적 있니. 저 간호사가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한 순간을 방금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어. 토비 네가 방금 뭔가 말하려 했는데, 어쩌면 분위기에 휩쓸려 오늘부터 1일이 될 수도 있었는데. 간호사, 간호사, 망할 여편네.

 애당초 어째서 우리가 부부카운슬링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영양 실조라면 스스로를 방관했던 내 잘못이니 내일부터 그냥 밥 잘 먹고 다시 건강해지면 될 일이다. 우리 둘 사이에 그 밖에도 문제가 많긴 하지만 알까보냐. 장담하는데 개미 똥꼬에 난 털 만큼도 신경 안 쓸 거다. 이제 몰라. 될대로 되라지.

 "드, 들어가자… ……."

 "아니… 정말 상담 받으려구……?"

 "여기까지 왔으니까… 일단은……."

 일단은? 무슨 뜻인가 하는 찰나 토비가 내 손을 잡아끈다. 이제 보니 그의 귀가 빨갛게 되어 있다. 10대, 20대도 아니고, 이제 아줌마 아저씨가 다 됐는데 여전히 울긋불긋하는 것이 내가 느끼기에도 민망하다. 그리고 조금은 신기하기도 하다. 거의 반 정도 죽은 마음이라고 생각했건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살아나서 그때와 같이 뛰어댄다. 하나 둘, 하나 둘. 뜨거운 피를 퍼뜨리며 내게 속삭인다. '사랑한다고 말해!', '키스해!', '키스! 키스!'… 아아, 이거야 원. 나도 아직 젊구나. 상담이고 뭐고 당장 키스하고 싶다.

 "어머, 신혼부부인가 봐요."

 책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상담사가 따뜻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30대면 보통 신혼으로 보지는 않는데. 내 얼굴이 비교적 동안이고 지금 토비의 모습이라면 연예인 뺨치는 미남이니까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앉으라며 두 사람의 자리를 가리킨다. 어색하게 걸어가서 의자에 동시에 앉는데, 정말 일상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자연스럽달까. 그래서 오히려 적응이 안 된다. 내 주제 이런 평범한 행복이라니. 혹시 꿈은 아니겠지.

 "의사 선생님께서 뭐라시던가요?"

 뭘 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고 있으니 상담사가 두 사람에게 묻는다.

 "… 제 아내가 영양 실조라고……."

 "확실히 아내 분께서 많이 야위셨군요. 그에 비해 남편 분은… 으음……."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뭐야. 왜 남의 남편 몸을 멋대로 스캔하는 거냐고. 방금 속으로 '화끈한데?'라고 했지. 나도 처음 봤을 때 애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을 했으니까, 같은 여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근데 묘하게 열받는다.

 나뭇잎의 닌자복은 쓸데없이 왜 이리 타이트하게 만들었냐며 속으로 구시렁, 그리고 흠흠 헛기침을 하며 괜시리 토비의 조끼를 바짝 여민다. 딱히 진짜 사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파트너니까, 이제는 예전처럼 바람피우거나 하지 않으니까, 나도 다른 여자들의 시선이 썩 좋지만은 않다.

 "아내 분을 사랑하세요?"

 "……."

 토비가 대답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듯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남편 분 너무 부끄러워하신다─."

 또 다시 능청스런 상담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토비가 맘에 들었는지 은근히 놀리는 말투다. 자식, 오늘 남편 연기 하느라 고생하는구나. 계속 이것저것 물어오면 그만 가자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일일이 대답하며 나름 성실하게 상담에 임하고 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고… 푸훗…….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결국 상담사의 마지막 질문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실제 토비와 나는 부부는커녕 애인 단계까지도 가지 않았다. 이런 상담은 아마 장난으로 그치겠지. 그래도 잠깐이나마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으음, 내 남편 귀여워. 그런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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