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서 반나절동안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일기를 쓰는 하루가 항상 1년처럼 길게 느껴졌는데, 이제와서는 그 모든 날들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기말고사가 끝나고 기다리던 가을문화재의 날이 왔다. 자기개발시간에 열띤 토론을 펼친 끝에 우리반은 메이드까페를 하게 되었다. 여학생은 모두 예외없이 부끄러운 복장을 해야 한다. 다만 얼굴이 조금 반반한 아이들은 홀에서 주문을 받거나 서빙을 하고, 그 외에는 그릇에 음식을 담아 서버에게 건네주거나 뒷정리를 한다. 물론 나는 못생긴 드워프이기 때문에(미안, 아즈사.) 뒷정리담당이다.
빨리 오소마츠에게 가야하는데...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하는데... 아까부터 에리와 그녀의 친구들이 고의적으로 내게 힘든 일을 모조리 떠맡기고 있다. 이것만 끝내고 가야지 하면 또 일이 생기고, 정말 가야지 하면 또 다른 일이 생긴다. 이대로 가다간 고백은 커녕 축제가 끝날 때까지 죽어라 일만 하게 될 것 같다. 재료를 가지러 창고에 왔다가 잠시 숨을 돌리며 자신의 앞치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다. 오소마츠에게 고백하면서 그에게 건네줄 선물이다. 딱히 오늘이 아니라고 해서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용기가 날지 모른다. 좀 더 힘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즈사! 이것도 부탁해." "으, 응..." 힘을 내지 않으면. . . . . . . "하아─. 하아─." 부끄러운 복장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교실을 빠져나와 하얀 프릴을 휘날리며 복도를 내달린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오소마츠가 있는 곳까지 바람처럼 날아가고 싶지만 내게는 이 정도의 속도가 한계다. 손으로 벽을 짚고 서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손목의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서둘러 다시 뛰기 시작한다. 이제 축제도 막바지에 접어들어, 운동장에서 마지막 행사인 불꽃놀이를 준비하고 있다. 넓은 학교에서 오소마츠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이들을 붙잡고 일일이 물어보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휴대전화기를 꺼놓을 게 뭐람. 평소 오소마츠와 함께 다니는 남자아이의 말로는 아까 친구들과 옥상에 올라갔다고 한다. 분명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올라, 활짝 열려있는 문을 지나서, 새카만 밤하늘이 펼쳐진 옥상으로 나간다. 불꽃놀이를 보려고 모여든 아이들에 의해 가뜩이나 좁은 공간이 완전히 포화상태이다. "신이치!" 인파속에서 낯익은 오소마츠의 친구를 발견하고 달려가보지만, 정작 오소마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저기, 오소마츠군은?" "여긴 너무 복잡하다면서 아까 내려갔어." 그렇게 열심이 뛰었건만. 허망함에 탄식이 터져나온다. 이렇게 되면 또 어디에 가서 그를 찾는단 말인가. 아즈사 같은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혼자 누군가를 찾아다니기에는 이 학교, 커도 너무 크다.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글쎄, 평소처럼 빈교실에서 잠이라도 자고 있는 거 아냐?" "빈교실?" 그런 거, 지금이라면 널리고 널렸다. 명탐정이라면 좀 더 확실한 추리를... "미술실에 가 봐. 학교에서 제일 조용한 곳이라 녀석이 자주 가거든." 역시 신이치! 추리의 신! 너 밖에 없다! "고마워! 불꽃놀이 잘 구경해!" "으, 응." . . . . . . 이번에는 정말 바람처럼 날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미술실 앞에 다다라 겨우 숨을 고른 뒤 침착하게 문을 연다. 다행히 오소마츠가 있다. 텅빈 교실, 책상에 걸터앉아, 창문을 통해 불꽃을 구경하고 있다. "오소마츠." "응?"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다.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거기 앉아." "아니, 중요한 얘기니까 서서 할게." "뭔데 그래?" 창문쪽을 향해 있던 오소마츠가 비로소 내쪽으로 돌아앉는다. 드디어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나... 나... 실은... 실은 말야..." 그는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원래 소꿉친구이고 키스까지 한 사이인데, 어째서 이렇게 떨리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그의 앞에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꺼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그에게서 들은 적도 없다. 어차피 지금은 아즈사의 몸이지만. "나 말야... 실은..." 떨린다. 정말이지 미치도록 떨린다. 태어나 이렇게까지 떨었던 적이 있었던가. "너... 널... 조..."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두렵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조... 조... 좋아해!!!" "........." "부, 부디... 저와... 사귀어주세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선물을 앞으로 내밀며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기세 좋게 뻗은 두 손이 볼품없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 마침내 오소마츠가 입을 연다. "나로 괜찮은 거야?"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본다. "너한테... 그다지 잘해주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침착한 목소리.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결코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괘... 괜찮아... 곁에만 있어준다면..." "알았어." 그의 손이 내 손을 살며시 감싼다. "그럼... 사귈까, 우리." 따뜻한 체온, 그리고 수락의 의미가 담긴 그의 말 한 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린다. "어이, 어이." 그가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준다. "왜 울고 그래. 좋다고 대답했잖아." 나를 향한 웃음이 너무 예뻐서, 빛나서, 가슴이 더욱 뭉클해진다. "그... 그게... 흑..." 혹시라도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 했었다. "흑흑..."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불안했다. "누가 보면 차인 줄 알겠네." 그는 내 마음을 거절하지 않았다. 날 받아줬다. 안도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그가 책상에서 내려와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괜찮다는 듯이, 그 어느때보다 더 상냥하게. "근데... 이건 뭐야?" "아, 열어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뒤 서둘러 눈물을 닦으며 오소마츠에게 대답한다. 이윽고 그가 내게서 건네받은 상자를 연다. 안에는 내가 직접 만든 몽블랑이 들어있다. "그거 좋아하지?" "응. 어떻게 알았어?" "어... 그게... 밋짱에게 들었어. 오소마츠는 몽블랑을 정말 좋아해─라고." "나, 아카자와에게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는데." "그, 그래? 어... 어어... 음..." 젠장, 나는 오소마츠가 밋짱에게 한 번도 마음을 연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 불필요하게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성격이다. 이제 어떻게 둘러대면 좋을지 모르겠다.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몽블랑은 어린시절 오소마츠가 놀러왔을 때 그와 함께 간식으로 자주 먹던 과자이다. 은사께서 직업이 유명한 파티쉐이셨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경하기 힘든 특이한 과자들을 우리집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이참에 사실대로 말해버릴까. 아니, 모처럼 사귀게 되었는데 자칫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아서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답답해도 참아야만 한다. "뭐, 아무래도 좋나." 오소마츠가 상자 안에서 몽블랑을 꺼내 베어먹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맛있네." "다행이다. 처음 만드는 거라 그다지 자신이 없었는데." "자, 너도 먹어." 무심코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내 입 앞으로 몽블랑을 가져갔다. 문득 그의 입술이 '아─' 모양으로 변한다. 벌써부터 닭살돋는 짓이라니, 속으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뻐서 죽을 것 같다. 마침 창 밖에서는 아이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불꽃놀이의 피날레가 펼쳐지고 있다. "내일부터는 같이 하교할까." "우리... 다른 방향이잖아."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정말?" "네가 이나가키(에리)에게 괴롭힘당하는 거 알고 있어. 점점 도가 지나쳐가는 것 같아서 걱정 돼. 친구들에게 적당히 가드해달라고 말해두긴 했지만...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들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 "고마워." "아니, 애당초 책임은 나한테 있는걸." 오소마츠의 눈이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단, 하나만 부탁할게."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까. "언제나 가는 길 말고, 조금 돌아서 가자. 괜찮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매일 오소마츠와 같이 하교할 수 있다면 뭔들 못하랴. 지구를 빙 돌아서 가라고 해도 할 수 있다. 이윽고 오소마츠가 웃으며 이전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정말 따뜻하고, 기분이 좋다. * 축제가 끝나고, 우리를 포함한 학교의 모든 아이들은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처음 며칠동안은 누가 누구와 사귀게 됐녜 어쩌녜 하는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2학기 중간고사기간에 접어들면서 그 열기는 금방 잦아들었다. 오소마츠와 사귀기 시작한 이래 우리는 약속했던 대로 늘 함께 하교를 하게 됐고, 나는 그가 길을 돌아서 가려 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언제나 한 집을 지나서 갔다. 내가 어렸을 적에 머물던, 우리의 추억이 깃든 집. 은사께서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신 뒤로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데도, 오소마츠는 매일 그 집을 돌아본다. 마치 누군가를 찾듯이. 그는 어린시절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데, 그의 시선은 오로지 텅 빈 집을 향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게다가 불안감도 밀려온다. . . . . . . 점심시간이 되어 오소마츠를 찾는다. 평소대로라면 그가 A-2교실로 나를 데리러오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아침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더니만, 지금 그는 뒤뜰의 벤치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무릎을 구부리고 앉는다. 그리고 키스를... "아직 너무 이르지 않아?" "헉!" 깜짝 놀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영락없이 자는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말을 하다니.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원래의 나라면 냄새를 맡았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이 몸, 아즈사의 젠더는 평범한 베타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가 상체를 일으켜 나를 내려다본다.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거든." 그리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게 말한다. 정말,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걸까. 오소마츠가 잠든 틈을 타 몰래 키스를... 맙소사. 이래서는 자신이 마음을 애태우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훤히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저, 점심 안 먹어? 도시락 싸왔는데." "오늘은 그다지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면야 먹어야지." 몸을 추스리고 벤치에 앉아 무릎 위에 도시락을 펼친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와의 추억이 담긴 음식만을 만들어 싸오고 있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이럴 때 마다 오소마츠는 밥을 먹는 내내 사념에 잠겨서 아무런 말이 없다. 이대로 조금씩 계속 암시를 주면 언젠가 그가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 . . . . . "아직 시간이 좀 남았네." 점심을 먹은 뒤 오소마츠가 벤치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이윽고 그가 색종이 한 장을 꺼내 무언가를 접기 시작한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그의 손 안에서 네모난 종이가 점점 실체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진짜 잘 접는다..." 마지막으로 종이접기를 했던 것이 유치원생 때인 나로서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마츠노가에 살 때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데, 어째 그때보다 손놀림이 더 빠른 것 같다. "뭔가 접어줄까?" "응, 쿠마(곰)." "........." 오소마츠의 손이 멈추고, 그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진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도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오늘은 뭐 접어줄까?" "쿠마!!!" "또?" "응! 나 오소마츠가 접어주는 쿠마 너무 좋아!!!" "알았어. 그럼 쿠마 접어줄게. 잠깐만 기다려."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사랑스럽고 애틋한 추억이다. "자, 다 됐어." 너무나도 익숙한 모양의 곰돌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이건 소중하게 주머니 안에 넣어두록 하자. . . . . . . 우리는 연인이 되고나서 이전과 사뭇 다른 나날들을 보냈다. 언제나 한뼘이상으로 떨어져 있던 거리가 좁혀지고, 팔짱을 끼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모두가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고난 뒤에는 여자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오소마츠가 에리의 남자친구와 친했던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됐지만, 어쨌든 그랬다. 오늘도 나는 그와 같이 하교를 한다. 그리고 오늘도, 먼 길을 돌아서 간다. 그 집, 우리의 추억의 집이 있는 곳을 지나기 위해. 그러던 중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한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오소마츠의 시선을 따라가본다. 어째서인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사람이..." 집에 사람이 있다. 머리가 햐앟게 샜지만 내 기억속의 은사분임에 틀림없다. 예전에 집을 처분했다는 말을 듣고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실례합니다!" 오소마츠가 이제 막 집에서 나와 문을 잠그고 계신 은사께 달려가 그녀의 앞에 선다. 체력장에서 B를 받은 주제에 어찌나 발이 빠른지, 눈 깜짝 할 사이에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도 곧 그를 따라간다. "너는 확실히, 의 친구인..." "마츠노 오소마츠입니다. 기억하시는군요." "기억하다마다. 거의 매일 왔었잖니. 그새 이렇게 컸구나." 은사께서 웃으며 오소마츠의 어깨를 두드리신다. 그녀에게도 세월이 빗겨가지는 않았지만, 그 미소만은 여전하다. "아직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게..."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그늘이 드리운다. "한국에 있습니까? 연락처 알고계신지요?" 그리고 오소마츠의 목소리는 더욱 다급해진다. "그 애는... 죽었단다." "죽..." 은사 분의 한 마디에 세 사람의 주변에 무거운 침묵이 맴돈다. "워낙 건강이 나빴잖니. 이제 10년도 더 된 일이란다." "........." 오소마츠는 여전히 말이 없다.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 흐릿하다. "하지만 그 애의 무덤은 일본에 있단다." "어... 어디... 어디에..." 그의 떨리는 목소리 만큼, 나도 두렵다. . . . . . . 카미노세이치라는 이름의 묘지. 은사께서 알려주신 곳이다.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입을 굳게 닫아버린 오소마츠를 멋대로 따라왔다. 자신의 육체가 묻혀있는 땅이라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지만, 그보다는 오소마츠가 걱정이었다. 차마 그를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잠깐 둘이 있게 해줄래?" "응." 둘이. 그는 '둘'이라고 했다. 마치 죽은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그 말이 그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미치도록 괴롭다. 멀찌감치 서서 내 묘앞에 앉아 있는 오소마츠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가 울고 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있다. 들리지는 않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다. 그는 내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너를 원망해서 정말 미안해." . . . . . . . 다음 날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교실의 창문을 바라보며 내 불안함도 그 거센 빗줄기에 씻겨내려가길 바랐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슬픈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작, 그리고 끝──. 헤어지자는 오소마츠의 팔을 붙잡고, 나는 그에게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오소마츠!" "놔." "안 돼!" "놓으라니까." "가지마! 부탁이야!" 마침내 그가 나를 돌아본다. 하지만... "말했잖아. 난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말 뿐. "너랑 있으면 그 애가 계속 떠올랐어. 같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네가 그 애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단지 그 뿐이야." 그리고 그는 또 한 번 내 손을 잔인하게 뿌리친다. "날 이해하려고 하지마. 용서하지도 마. 그냥 날 미워하고, 욕해. 알겠어?" 나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외면하며 고개를 젓는다. "내 얘기를 들어봐, 제발." "아니, 더이상 나한테 가까이 오지마. 너 때문에 헷갈린다고." 그렇게 매달리다가── "내가 야!!!" ──결국 진실을 외친다. "뭐?" "내가 라구,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죽었어... 하지만 돌아왔어... 네가 가지고 있는 추억은... 나도 가지고 있어." 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쳤구나." 차갑게 쏘아붙인 뒤 끝내 내 곁을 떠난다. 어쩌면 이미 떠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만 있으면 몸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듯한 가슴을 움켜쥔다. 세상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 두렵고, 쓸쓸하다. 커다란 상실감과 괴로움에 숨을 쉴 수 조차 없다. 한없이── 정말 한없이── 차가운 비가 쏟아진다. . . . . . . 그 날, 나는 마츠노가 앞에서 오소마츠가 있는 곳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몇 시간이 흐르도록, 빗속에서, 단지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게 되었다. 가슴이 또다시 비명을 질러댔지만 차마 울 수가 없었다. 울면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죽었을 때 오소마츠의 기분도 이런 것이었을까. 그래서 끝까지 눈물을 참았던 걸까. 문득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줄기가 사라진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본다. 우산...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 "울어." "........." 이치마츠다. "울으라고, 멍청아." 아즈사의 짝사랑, 내 친구. "지금 실컷 울고, 깨끗이 잊어버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위태로이 떨리던 마음의 댐이 무너진다. 갈라진 틈 사이로 강물이 새어나오듯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떨어진 눈물이 검은 비의 웅덩이에 여러개의 물결을 그린다. "윽... 흐윽... 흑... 흑흑...!" "흐윽... 으...읏.... 흐아아아...!" 죄송해요, 아버지. 또 이렇게 당신이 주신 기회를 망쳐버렸네요. 그곳의 당신에게도 미안해요. 행복이라는 건 나와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인가 봐요. 이번에는 정말 잘해보려고 했는데. 잘 해보고 싶었는데. "오소마츠..." The End |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