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사가 다니는 세이하라 고등학교는 다행히 그녀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나는 아즈사의 휴대전화기로 구글 맵을 켜서 네이게이터가 알려주는 대로 안전하게 길을 찾아갔다.
슬슬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하나같이 학교정문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나도 뛰어야 하는 걸까. 등교시간이 몇 시까지인지 몰라도 하여간 느낌이 좋지 않다. 학교라는 것이 이제 아득한 옛날 이야기이긴 해도 지각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2분, 3분만 늦어도 운동장에서 벌칙을 받아야 했다. 그곳은 한국이었지만 아마도 일본도 한국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 이렇게 급하게 달려본 적이 없었는데. (고등학생이라 해도 아즈사는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한 아이인 것 같다.) 숨을 헐떡이며 교문 앞에 서자, 선도부로 보이는 아이들이 각자 오른팔에 노란 안장을 차고서 내 복장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대충 걸치고 나온지라 행여 벌칙을 받게 될까 봐 긴장이 된다... 그때 문득 내 시야에 들어오는 한 남자아이의 얼굴.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려 명찰을 확인한다. 마츠노 오소마츠. 틀림없다. "거기, 너." 그가 내게 다가온다. "너 말이야, 너." 오른팔에 안장을 차고 있는 걸 보니 그도 선도부의 일원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내 복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딴 건 지금 아무래도 좋다. "이름표가 떨어지려고 하잖아.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 어쩐지 아까부터 무언가 가슴언저리에서 덜렁거린다 싶었다. 이윽고 오소마츠가 내 이름표를 그의 두 손으로 직접 고쳐준다. 그리운 라임향기... 천계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뵈었을 때만 해도 다시는 이 향기를 맡지 못할 줄 알았다. "오소마츠..." 무의식중에 입술이 절로 움직인다. 습관처럼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그는... "나 알아?" 그는 나를 모른다. 그래, 나는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여기 있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다른 여자아이가 되어 있다. 이런 나를 오소마츠가 알아볼 리 없다. 그러니 고개를 젓는 수 밖에 없다. "뭐, 그렇게 부르고 싶은 거라면 맘대로 해." 그의 목소리에서 굉장히 앳된 느낌이 난다. 오소마츠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다니. 사진으로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이지 놀랍다. "오소마츠는 조금 그렇고..." 키도 지금은 조금 작은 것 같다. "오소마츠군이라고 불러. 알았지?" 고개를 내려보니 어느덧 명찰이 반듯하게 되어있다. 이윽고 오소마츠가 내게서 멀어진다. "자, 얼른 교실로 들어가. 지각하겠다." 그가 내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만 대답한다.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 그리고 지금 널 보고 있어.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보고 있다고. 난 못 가. 내 발을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라고 생각했으나, 무서운 학주가 나를 노려보고 다른 아이들이 비키라며 뒤에서 계속 밀쳐대는 바람에 결국에는 교실로 들어왔다. A-2. 제대로 들어온 거 맞겠지?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 아마 맞을 거다. 어렸을 때 교실을 착각해 잘못 들어가서 반 아이들의 웃음을 산 적이 있었는데, 그건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쉬는시간에까지 나를 찾아와서 "아까는 왜 우리 반에 들어온거야?ㅋㅋ" 하던 끈질긴 녀석들. 아이들이란 웃음을 쫓는 데에 아주 열정적이다. 그 열정으로 공부를 했으면 개나 소나 다 명문대에 가게 될 것이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그렇지, 오소마츠가 이 학교에 다닌다면 다른 형제들이 이 반에 한 명쯤은 있을지도 모른다. A-1 ~ A-3, B-1 ~ B5, C-1 ~ C-4까지 반이 12개나 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선도부의 일을 끝내고 오소마츠가 이 교실로 들어올지도 모른다. 아니, 아까 "나 알아?"라고 물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한가. 어쨌든 반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형제들은 커녕 그들과 닮은 사람 조차 찾을 수 없다. 어찌된 영문인지 여학생들의 수에 비해 남학생들이 적어서 그것을 깨닫는 데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남학생이 많은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는데... 여성시대의 도래인가, 이 교실의 주인은 확실하게 여자들인 것 같다. 그것도 다들 깡다구가 있어 보이는 아이들 뿐. 괜히 성질을 건드렸다가 괴롭힘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내 나이 20대 중반, 어른이 되어서 고딩들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지금 이 '작은 사회'의 일원이다.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듯이 나 또한 이 사회에 알아서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 . . . 1교시는 사회였다. 아아──. 예나 지금이나 나는 글러먹은 학생이다. 교사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졸음이 밀려와서 미칠 것 같다. 경제파트에서는 손에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다가 하마터면 책상에 머리를 정통으로 박을 뻔했다. 그냥 있어도 졸린데 자장가까지 들어가며 버텨야 한다니,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다. 이대로 가다간 3교시가 한계일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6~7교시를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내가 잠을 자지 않는 초인이었나? 무한체력의 헐크였나?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라도 해야겠다. 앞으로 이런 시간을 여섯시간이나 더 견뎌야 하는 건가. 차라리 누가 날 다시 천계로 돌려보내줬으면 좋겠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지금 정말 담배를 피우고 싶다. 교육부는 청소년흡연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이 나라의 교육시스템을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 답답한 교실이, 시시한 수업이, 시끄러운 소음이 내 신경을 계속 박박 긁어댄다. 맙소사, 고등학생들은 정말 대단하다. 이런 생활을 매일 견뎌내다니. 얼굴에 찬물을 뒤집어쓴 뒤 흩트러진 머리를 정리한다. 오소마츠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는 그의 고교시절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단지 반에서 무드메이커 같은 존재로 여자남자 막론하고 인기가 많았다는 것만 알고 있다. 오소마츠의 성격 자체는 그다지 활발한 편이 아니지만 아마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재치 등이 요인이었을 것이다. 인기라는 건 사실 그리 대단한 패러미터가 아니다. 그냥 마음을 조금 넓게 갖기만 하면 사람들은 알아서 모여든다. 오소마츠는 게으르긴 해도 머리가 좋으니 분명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흔히 좀 하는 녀석들만 들어간다는 선도부에 그가 속해 있는 사실만 봐도... 아!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걷고 있노라면, 저 멀리 창가에서 친구와 장난을 치고 있는 오소마츠의 모습이 보인다. A-2반을 지나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그를 보고 있고, 마침내 그도 나를 본다. 서로 눈이 마주친다. "안녕." "아... 안녕."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복도를 지나면서 나누던 평범한 인사인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걸까. 조금 어려졌을 뿐, 오소마츠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오소마츠일 뿐이다. 이 몸의 주인인 아즈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오소마츠와 전혀 안면이 없는 사이다. 그런데도 다른 남자아이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떨림이 느껴진다. 특히 얼굴. 그의 얼굴을 볼 때 마다 심장이 저릿하다. 내 생각보다, 내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아까부터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 어제 잠 푹 잤어?" "글쎄... 세수를 했는데도 졸리네." 푹 잤지. 너무 푹 자는 바람에 죽어버렸지. 그러고나서 미우라 아즈사라는 여자아이로 다시 태어났다고는 절대 말 못 하지. "힘내─. 곧 시험이잖아──." "시험?" 내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던 잔잔한 음악이 돌연 뚝, 하고 멈춘다. 이윽고 고요함속에서 천천히 나를 향해 엄습해오는 긴장감, 두려움, 그리고 혐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어." 오소마츠의 곁에 있던 그의 친구가 덧붙인다. 그렇게 확인사살을 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 시험이라... 그래, 학생이라면 당연히 시험도 봐야지.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지, 아니면 반나절 동안 멍을 때리고 있는지 부모도 알아야 하니까. 우리 머릿속에 지식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응가가 들어 있는지 대학의 입학처와 회사의 면접관도 알아야 하니까. 봐야지, 그럼. 이제 정말 피부로 느껴진다. 스 쿨 라 이 프 의 시 작────. "어이, 무얼 복도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거야? 그러다 부딪힌다?" "말하기 무섭게 위험한 녀석들이 오네." 오소마츠와 친구(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름은 신이치라고 한다. 나는 한동안 그를 명탐정이라고 놀렸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다. 내가 걸어왔던 방향에서 여자아이들의 무리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아니, 몰려오고 있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여유로운 발걸음인가. 하나같이 예쁜 얼굴에, 늘씬한 몸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 엄청난 존재감이다. 찌질이 여신님들께 길을 비키오니 어서 지나가옵소서. 마리오가 버섯을 짓밞듯이 외모에 한 번, 몸매에 한 번, 자신감에 한 번 차례로 가격을 당해 난쟁이가 되어버린다. 그래, 미인들 앞에서 나는 한낱 못생긴 드워프일 뿐이다. 이럴 때는 얌전히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다. "얘, 이거 떨어뜨렸어." 여자아이들의 무리중 가장 앞에서 걷고 있던, 리더로 보이는 아이가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나에게 건네준다. 언제 떨어뜨린 건지, 주머니를 뒤져보니 내 손거울이 없다. 콤팩트형의 굉장히 사랑스러운 디자인으로,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울과는 느낌이 다르다. 아즈사의 물건이니 소중히 하려고 했는데, 나란 여자는 정말, 이다지도 주의가 없다. 여자아이에게서 거울을 받아 주머니에 넣자, 그녀가 내게 묻는다. "그거 역앞 백화점의 코비스테이션에서 산 거지? 귀엽다." 오, 젠장. 여신이 웃는다. 하얀 치아를 반쯤 드러내며 부드럽게 웃는다. 이, 이러지 마시옵소서. 그런 미소를 받으면 드워프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사옵니다. "고... 고마워." 맙소사.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일본 제일의 미남으로 알려진 기무타쿠가 와도 그와 당당히 마주볼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예쁜 '여자'에게는 이렇게 약한 거지? 아까부터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도 거기서 쇼핑하는 거 좋아해.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 "그... 그래." "난 아카자와 미네라고 해. 너는?" "나... 나는..." 무심코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멈칫 하고 고개를 숙여 앞섬에 달린 명찰을 내려다본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미... 미우라 아즈사." 그래, 나는 미우라 아즈사다. 나는 일본인이고, 고등학생이다. 현재로써는. "아즈사? 기억하고 있을게."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아즈사로서 만족해야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든. "그럼." 미네라는 여자아이가 내게 손을 들어보인다. 그리고 몸의 방향을 돌려 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다른 아이들도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들이 지나가는 길목을 막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같이 벽쪽으로 비켜선다.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하여간 대단하다. 여신은 괜히 여신이 아니다. 그런데 아카자와라면... 설마 그 아카자와...? 어딜 가나 꼭 하나씩 있는 유명한 프랜차이즈를 가진 회사...?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줄곧 조용히 있던 신이치가 입을 연다. "와, 너 일진 하고 친구 먹었네."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흔치는 않은가보다. "저 애가 우리 학교의 일진이야?" "그 뿐만이 아니지. 엄청난 부잣집 딸내미야." 알고 있다. 그녀는 내게 거울을 주워주었을 뿐이라는 걸. 하지만...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냥 기쁘다. 여신과 함께 있으면 나도 조금은 빛날 수 있을까. 어쩌면 반대로 더 비참해질지도 모르지.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미인을 좋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도 좋아하니까. . . . . . . 그 뒤로도 수업은 계속됐다. 뭐, 일정이 남아 있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체육, 수학, 영어, 과학... 젠장. 마음 같아서는 조퇴라도 하고 싶지만 이놈의 몸뚱아리는 건강해도 너무 건강하다. 내 원래 몸이라면 여름의 뜨거운 햇빛만 조금 쬐어도 픽픽 쓰러질 텐데. 아버지께서 새로이 내려주신 이 삶이 축복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복도에서 마주쳤던 이래 오소마츠는 더이상 만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다른 반의 아이들과도 꽤 친분이 있는 것 같다. 친구의 말로는 B-2반이라고 하는데... 다음 쉬는 시간에 한 번 가볼 생각이다. 아버지께서 열정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오소마츠일지도 모른다. 끝내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던 나를 안타깝게 여기셔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 먹었는데, 하필이면 수업이 역사였다. 수업도중에 깜빡 잠이 들어, 깨어났을 때는 다음 수업의 시작종이 치고 있었다. 다음 쉬는 시간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 수업이었기에. "아 뭐야, 갑자기 웬 비?" "오늘 아침 일기예보에 비온다 그랬잖아." "늦잠 자서 못봤어." "거기, 조용히 해!" 교실 여기저기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창가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도. 꽤 많은 아이들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연히 나도 우산은 안 가지고 나왔다. 이대로만 내린다면 기꺼이 맞고 가겠지만, 빗줄기가 굵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뭐, 아즈사는 나와 달리 건강하니까 괜찮으려나. 비 조금 맞는다고 해서 감기로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만약 쓰러진다면 그녀의 몸을 잘못 굴린 것에 대해 상당한 죄책감이 들 것 같다. . . . . . . 수업이 끝나고, 우산은 없지만 일단 가방을 챙겨서 현관으로 나왔다. 이탈리아에 계신 엄마는 지금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계시려나. 아니,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자. 나는 착한 딸이니... 망할! 착한 딸은 개뿔! 가족이 없으면 누구한테 전화를 하란 거야? 누구한테 우산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란 거야? 젠장, 아즈사 너도 참 안 됐구나. 하다못해 같이 쓰고 가자는 친구도 없으니. 아. 별관 앞에 여신이... 아니, 미네가 서 있다. 남자아이에게 우산시중을 받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예쁜 얼굴에 가만히 시선을 던지고 있노라면,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앗짱─."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달리는 모습도 왠지 기품이 느껴진다. 그보다 앗짱이라니, 혹시 나를 부르는 건가? 내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을 보니 나를 불렀던 게 맞는 것 같다. "비 정말 오지게 내린다. 그치?" 여신의 입으로 오지다는 표현은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뭐, 여신 is 뭔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떤 말을 내뱉어도 애교로 보일 것이다. 여자인 나조차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데 남자들은 어떨까. 상상 조차 가지 않는다. "우산을 안 가져와서 큰일이야." "걱정마. 내가 씌워줄게." 미네가 남자아이에게서 우산을 뺏어든 뒤 "가 봐." 하고 무심하게 짧은 한 마디를 던진다.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든다. 정작 본인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듯 보이지만. "괜찮겠어? 꽤 많이 내리는데." "어깨 좀 젖는 게 뭐 대수라고." 여신은 성격까지 쿨한 건가.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방금 그 말 한 마디로 인해 분명 그녀에게 반했을 것이다. "대신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그녀의 우산이 내 머리 위로 올라온다. 서로 딱 붙어서, 팔짱을 끼고, 그대로 교문으로 향한다. "어디 가는데?" "가라오케─." "우리 곧 시험이잖아." "그러니까 기분전환이 필요한 거야." 여신의 여유인가, 딱히 상관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말 속이 편한 아이다. . . . . . . 교문에 도착해 잠시 걸음을 멈춘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우산이 뒤로 제껴지는 순간 교문 앞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역시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마츠노군─." "여어." 오소마츠?! 여기서 뭘 하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가? 아니, 나는 아닐 테고, 혹시 미네를? "어라, 너 또 보네." "아, 아, 아, 안녕. 오소마츠군." 언제나 허물없이 대하던 친구의 이름이건만, 갑자기 오소마츠군─ 하고 예의를 갖춰서 부르려니 어색하다. 어색하달까, 오글거려서 미칠 것 같다. "오소마츠군? 너희 아는 사이야?" 그건 이쪽에서 먼저 묻고 싶다.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모르는 사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오늘 처음 알게 됐어. 나를 이름으로 부르길래 그냥 좋을대로 하라고 한 것 뿐이야." "헤에─. 그럼 나도 마츠노군을 이름으로 불러도 돼?" "넌 안 돼." "어째서?" "가라오케 안 갈 거야?" "너무해, 말 돌리고─." 두 사람은 굉장히 친한 것 같다. 투닥거리고 있지만 그 부분이 오히려 다정해 보인달까.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왠지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 . . . . . 가라오케에서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미네는 아까부터 오소마츠에게 팔짱을 끼고 있다. 딱히 유혹을 하고 있다던가,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가깝다. "오늘 즐거웠어! 그럼, 잘가!" 미네는 내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자신을 밋짱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밋짱은 자신을 마중나와 줄곧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의 차를 타고 돌아갔다. 마치 공주님처럼. "너, 집 어디야?" 밋짱의 차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 오소마츠가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데려다줄게." 그리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우산으로 가리킨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약간이지만 아직 비도 내리고 있다. "가자." 앞서가는 오소마츠를 따라가다가 자연스레 그의 옆에 붙어서 팔짱을 낀다. 조금 전까지 미네의 하얗고 가녀린 손이 머물고 있던 자리다.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 . . . . . 아즈사의 집과 학교를 잇는 길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지도를 보며 가야했지만 두번째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타고난 길치인 내가 자신의 집에 가는데 지도로 길을 찾는 이상한 모습을 오소마츠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너 이 동네 살아?" "응." "너도 부잣집 딸내미구나. 아카자와녀석이랑 친구를 먹을만도 하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아즈사의 집은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이었다. 이 근처의 모든 집들이 그러하듯이. "저... 오소마츠군." "왜?" 집앞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고 오소마츠와 마주선다. 그는 상당히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 원래 잘 웃는 성격은 아니지만, 차가운 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을 차마 부정할 수가 없다. "너와 밋짱은... 어떤 사이야?" 드디어, 드디어 입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이게 묻고 싶었다. 오소마츠에게 직접 듣지 않으면 내일까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여자친구." 아, 이런... 그냥 묻지 말 걸 그랬나보다. "중학생 때 처음 알게 됐어." "역시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구나. 어쩐지 굉장히 다정해 보..." "우리는 그냥 서로 필요에 의해서 사귀고 있을 뿐이야." 문득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욱 차갑게 들려온다. 차갑달까,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 모로 향해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다. "필요에 의해서라니?" "간단해. 그녀는 나를 이용해서 아이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어." 그런가... 확실히 오소마츠는 학교에서 남녀불문 인기가 많으니까, 그와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그녀도 입담에 오르게 될 것이다. 미네처럼 예쁜 여자아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길 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소마츠군은?" "나? 뻔하지, 뭐." 그가 우산을 잡지 않은 반대 쪽의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잠시 뜸을 들인다. "너도 부잣집 딸내미니까 알 거 아냐? 네 주변에 왜 사람이 꼬이는지." 그리고 그대로 내 눈을 보며 말을 잇는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럼 내일 보자." "응..."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문에 기대어 그대로 주저앉는다. "오소마츠에게 여자친구가 있어..."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은 채 고개를 떨구며 홀로 중얼거린다. 뭐, 오소마츠도 남자이고, 고등학생이라면 한참 이성에 관심을 가질 때니 딱히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그가 이맘때쯤 연애를 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과 현재를 지켜보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그는 지금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울함을 떨칠 수가 없다. . . . . . .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 아즈사의 다이어리를 펼쳐본다. 일기는 그녀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묵묵히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문득 매우 친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마츠노군'으로 시작한 그 이름은 곧 '카라마츠군', '이치마츠군'이 되고, 마지막에 '카라마츠', '이치마츠'로 변한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 거의 매 일기 마다 두 남자의 이름이 나온다. 아즈사는 카라마츠, 이치마츠와 아는 사이였던 건가... 일기의 마지막은 고등학교 입학으로 끝이 난다. 예상컨대, 세 사람은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가 졸업 이후로 헤어지게 된 것 같다. 혹시─ 다이어리의 첫페이지로 되돌아가 다시 한 번 아즈사의 일기를 천천히 훑어본다. 아무래도 그녀는 언젠가 내가 카라마츠와 이치마츠에게 들었던 '중학생시절 일화속의 그녀'가 맞는 것 같다. 뭐 이런 기막힌 우연이 다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또한 아버지께서 의도하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카라마츠, 이치마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은 만난다고 해도 곤란한 일을 겪게 될 것이 뻔하다. 그도그럴것이 나는 진짜 아즈사가 아니니까. 나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심지어 그녀의 생일 조차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날짜와 일정이 적혀 있는 스케줄이 나오는 부분까지 페이지를 넘긴다. 2월 14일, 그러니까 작년 밸런타인데이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그 밑으로 작은 글씨가 보인다. '고백하는 날'이라고... * 나는 매일 잠들기 전에 20분 씩 아즈사의 다이어리를 통해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고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내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예를들어 그녀의 짝사랑이야기 등은 전부 건너뛰었다. 현재 내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아즈사는 나와 별개의 인물이고, 그건 그녀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내가 함부러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날 이후로 오소마츠ㆍ밋짱ㆍ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점점 친해졌고, 사사건건 붙어다니며 교실에서 수업을 들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밋짱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자연스레 나와 오소마츠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미우라, 오소마츠가 불러." 가방 안의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노라면 문득 같은 반의 남자아이가 다가와 교실의 뒷문을 가리킨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소마츠가 문에 기대어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웃으며 그에게 달려간다. "점심 먹으러 가자." "오늘은 도시락 싸왔는데." "갑자기 웬 도시락?" "오소마츠군 것도 있어. 같이 먹지 않을래?" 그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 그의 손이 나의 머리 위로 올라온다. "뒤뜰로 나가자."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근하다. . . . . . . 은행나무의 노란 잎으로 물든 학교의 뒤뜰은 언제나 시끌벅적하지만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모두 매점으로 몰려갔을 때 아주 잠깐 한산해진다. 우리는 바람에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도시락을 펼쳤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싸서... 너한테 어떨지 모르겠네." 오소마츠가 무릎 위의 도시락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그래도 소꿉친구이건만, 얼굴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게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그가 내게 묻는다. "응." 내가 대답하자, 그가 젓가락을 든다. 그리고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짜." 짧지만 아주 확실한 평가이다. "난 계란말이를 달게 하지 않고 짜게 해서 먹어." 처음 일본에 왔을 때,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일본음식 특유의 단맛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정도 익숙해졌지만, 어째서인가 달짝찌근한 계란말이 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소금으로만 간을 하는 한국식으로 해먹었다. 그때 오소마츠가 종종 우리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가곤 했었는데, 그는 짠맛 밖에 나지 않는 그 계란말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맛있게 먹었지만.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아까부터 오소마츠가 아무런 말이 없다. 내가 침묵을 깨며 "왜 그래?" 하고 묻자, 그제서야 멈추었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아냐." 언제나와 같은 차가운 무표정이지만, 그 안에 아주 복잡한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그냥 누가 좀 생각이 나서. 내가 아는 어떤 여자애도 항상 이렇게 계란말이를 짜게 해서 먹었거든." 그의 말에 문득 가슴이 울컥 한다. 오소마츠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고 해서 우리의 과거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는 줄곧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오소마츠가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이제, 그 불안함이 사라졌다. "저기... 오소마츠군." "응?" "밋짱은 왜 학교에 안 나오는 걸까?" 비록 알고 지낸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 친구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모습을 감춰버리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부터 여러번 있던 일이야. 가정불화." 그가 식사를 계속하며 말을 잇는다. "겉으로는 반짝반짝 빛나도, 실은 자라면서 불행한 일을 많이 겪어왔어, 그 녀석."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무심한 목소리이다. 그것을 좋게 생각해야 할지, 나쁘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소마츠는 밋짱이 걱정되지 않아?" "별로. 이번에도 이러다 말겠지, 뭐." . . . . . . "잘 먹었어." "응. 괜찮다면 다음에 또 싸올게." 내게 웃으며 손을 들어보인 뒤 오소마츠는 마침 뒤뜰로 걸어들어오는 자신의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늘 자연스럽게 다른 무리에 스며든다. 지켜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친화력이랄까. 딱히 다른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모여든다. 하나, 둘,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면 내가 끼어들 자리 따윈 없다. 그것이 나를 조금 쓸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오소마츠는 밋짱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다. 언제나 웃고 장난을 치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것 같달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소마츠와 밋짱은 서로 닮은 부분이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함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 . . . . . "아이고 다리야..." 역사수업은 언제나 최악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잘 모르는데 이제 일본의 역사까지 공부해야 한다니. 망할 교사가 수업 내내 나만 주시하고 있는지, 잠깐 졸았을 뿐인데 딱 들켜버리고 말았다. 복도에서 종이 칠 때까지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종아리가 욱씬거린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지루한 수업을 끝까지 들어주는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 망정 이런식으로 권력을 남용하다니, 망할 세금도둑 같으니! "아즈사."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가방 안의 책을 정리하고 있노라면 문득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쁜 얼굴, 긴 웨이브머리, 짧은 치마에 루즈삭스를 신은 여자아이들. 미네와 함께 다니면서 자연스레 친해지게 된 그녀의 친구들이다. "밋짱의 소식 들은 거 없어?" 언제나 밋짱의 오른편에 서는 아이(이름은 에리라고 한다.)가 내게 묻는다. 이에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다. "더는 못 기다려. 우리 뭔가 해야 해." 이 여자아이들은 지금 신경이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는 것 같다. "다같이 미네의 집에 가자." 표정과 말투가 하나같이 거칠다. 당장이라도 어딘가를 털러 갈 기세다. "가서 뭘 어떡하려고?" 나는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달까, 불편하다. "그 망할 바람둥이애비놈이랑, 돈 밖에 모르는 새엄마년에게 따져야지!" 그녀들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이 될까?" 우리는 그저 힘없는 고등학생일 뿐이다. 용감한 것은 좋지만, 때로는 그 용기가 스스로를 해친다. 나는 원래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 아이들을 말리고 싶다. "정 안 되면 집안으로 쳐들어가서 밋짱을 데리고 나올 생각이야." 맙소사. 얼마나 의기양양하면 남의 집에 무단침입할 생각까지 할까. 그건 엄연히 위법행위이고, 걸리는 순간 경찰서행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건가? 설마,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너도 갈래?" "으, 응." 현재로써는 자신이 이 무리에 끼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눈앞이 캄캄하긴 하지만 밋짱이 걱정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 여기서는 가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 . . . . . 아카자와 미네, 누가 봐도 찬란한 배경을 타고난 이 여자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툭하면 폭력에 욕을 일삼고, 새엄마는 그것을 방관한다. 그녀의 친엄마는 오래 전에 타지로 쫓겨났다가 병에 걸려 혼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밋짱은 가정부의 손에 길러지다시피 했고 그녀를 유일하게 믿고 따랐는데, 얼마 전 그런 그녀 마저 도둑사건에 휘말려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로 비행을 일삼다가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방에 감금 되고만 것이다. 딸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도 한다는 말이 '우리 집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어쩌고저쩌고'라니. 끝까지 아이들을 말려보려고 했던 나이지만, 인터폰을 통해 부모라는 것들의 뻔뻔한 태도를 보니 울화가 치밀어서 못 참겠다. 이제, 나도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가면 밋짱은 망가지고 만다. 친구로서 그녀를 어떻게든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까짓거. 젊으니까 무모한 짓도 하는 거지. 우리는 밋짱의 집앞에서 잠시 의논을 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분위기만 봐서는 배경음악으로 파워레인저의 노래를 깔아도 될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 정도의 스펙타클한 계획은 없었다. 우리의 계획은 그냥... 누군가 바닥에 엎드리면 누군가 그 아이의 등을 밟고 올라서서 담장을 넘는 것 뿐이었다. 자칫하면 들킬 수도 있었기에 미네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도 못했다. 근처의 작은 돌멩이를 주워 그녀의 방 베란다에 던지니 머지않아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는지 그토록 예뻤던 얼굴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쨌든 나와 아이들은 미네를 구출해내는 데 성공했고, 그대로 곧장 우리집으로 향했다. 어렵게 되찾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기에, 일단 부모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우리집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기로 한 것이었다. * 다음 날 나는 미네와 함께 등교를 했고, 교문에서 선도부의 일을 하고 있던 오소마츠와 만났다. "돌아왔구나." "친구들이 도와줬어." "이제 괜찮은 거야?" "응. 당분간 앗짱의 집에 있으려고." 늘 그렇듯 밋짱은 자연스레 오소마츠에게 팔짱을 낀다. "그래?" 오소마츠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그가 웃는다. "다행이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시선은 곧 밋짱에게로 돌아간다. 결코 내게 머무르지 않는다. "얼른 들어가. 이따 보자." "네─." 내 손을 붙잡고 교실을 향해 뛰어가는 밋짱의 뒷모습이 굉장히 즐겁고 신나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 아버지... 저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요. 당신은 제게 열정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마치 열정적으로 바보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결국 오소마츠는 밋짱과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그렇게 되도록 도운 거에요. . . . . . . 그날 밤, 우리는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조금 진지한 얘기를 나눴다. 밋짱의 가족에 대해서, 아직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 그러던 중 먼저 오소마츠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밋짱이었다. "앗짱, 마츠노군을 좋아하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심장이 뜨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닫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 우리 셋이 있을 때 언제나 마츠노군의 얼굴만 보고 있잖아." "미, 미안해, 밋짱." 정말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라고 해도, 밋짱은 아직 어리고 순수한 여자아이다. 그것도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그런 아이의 남자친구를 탐내다니, 이것은 어른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자책감을 넘어선 자괴감이 느껴진다. "괜찮아. 어차피 마츠노군은..." 말끝을 흐리는 밋짱의 얼굴에 문득 쓸쓸함이 비친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걸." 그녀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쓸쓸하게 들려온다. 평소 오소마츠의 태도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딱히 오소마츠를 탓할 생각은 없지만, 친절한 듯하면서도 결코 마음을 열지 않는 그 태도는 사람의 마음을 애태운다. 괴로울 정도로. "나보다는 오히려 너에게 흥미가 있는 것 같아." 문득 밋짱의 목소리가 활기를 되찾는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더욱 가슴이 미어진다. "마츠노군은 조만간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거야." 그런 말을 하면서 슬프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향해 웃는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아름답게 웃는다. "하지만 그게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그녀는 강하다. 빛나는 외모 만큼이나 강하다. 그녀의 나이 때 자신의 모습은 어땠던가. 나였다면 분명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어쩌면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하극상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쓰러질 테지만, 뭐가 어쨌든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결코 밋짱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 오소마츠를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란 여자는 정말... 최악이다. "어제 구해줘서 고마워." "아니, 나야말로..." 정말 고맙고, 미안해. * 다음 날 오소마츠는 밋짱에게 이별통보를 했다. 밋짱의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두 사람이 헤어진 뒤로도 우리 셋은 여전히 친구였지만, 예전처럼 함께 다니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그 후로 한 달정도 지나서 미네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자신이 말했던 대로 오소마츠와의 일에 대해 나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 . . 달랐다. "하아─." 오늘도 내 하루는 책상 위의 더러운 낙서들을 지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죽어', '걸레', '배신자', '추녀'... 오늘은 그래도 어제보다 낫다. 어제는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기상천외한 욕들이 적혀 있었다. 밋짱의 친구들은 내가 그녀로부터 오소마츠를 빼앗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밋짱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들은 믿지 않는다.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나는 이제 혼자다. 오소마츠가 있긴 하지만 하루중 그와 함게 할 수 있는 시간은 적어도 너무 적다. 외로움에는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감정에 무감각해질 정도의 성숙한 어른이 되려면 아직은 나도 한참 멀었나보다. * 오늘은 주말이라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바깥에 나오니 마치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새가 된 기분이다. 딱히 볼일은 없지만, 나는 근처의 공원을 찾아왔다. 이곳은 오소마츠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다. 옛날에는 풀과 나무 밖에 없는 넓은 공터였는데, 시청에서 그 황무지를 다듬고 다듬어 모두를 위한 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가만히 서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시야가 세피아색으로 물들며 어린 두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은행나무를 가로질러 사이좋게 손을 잡고 뛰어노는 오소마츠와 나.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걸음을 옮겨 공원의 뒷쪽으로 가면, 그곳의 부지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벼락이 있다. 성인의 키를 훌쩍 넘는 그 담벼락은 인도를 따라 길게 뻗어있다.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덤불이 무성하게 자란 벽에 살며시 손을 얹고, 그대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들어봐! 벽이 말을 하고있어!" "에? 정말?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잘 들어봐." "뭐야, 거짓말쟁이!" "안 들려? 정말? 그럼 느껴봐." 나의 손을 뒤덮은 따뜻한 체온... 그래, 기억이 난다. 그때 오소마츠는 뒤에서 나를 감싸안고, 내 손을 움직여 벽을 짚도록 한 다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느껴져?" 그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봐, 벽이 말하고 있지?" "응!" 지금도 말하고 있다. 그때는 정말 행복했었다고. . . . . . . 아름다운 추억에 잠긴 채 걷다가 어느덧 담벼락의 끝에 다다른다. 누군가 벽의 건너편에서 갑자기 나타나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본다. 이럴 수가. 오소마츠다. "너..." 그의 손이 나와 마찬가지로 벽을 짚고 있는 모습을 보는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여기서 뭐해?" 그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내게 묻는다. "그냥 회상을 좀 하고 있었어. 여기, 내 어린시절 추억이 담긴 곳이거든." 내가 대답하자, 그가 웃는다. "나도 그래. 공사하기 전이 좋았는데. 그치?" "응." 모처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다. "저기... 저쪽 가로수길에 가보지 않을래?" 그 가로수길은 오소마츠와의 추억이 담긴 또다른 장소이다. 덧붙여 그곳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럴까." . . . . . . 공원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은행나무가 넓은 길을 따라 좌우로 길게 뻗어있다. 언뜻 보면 도로 같지만, 이 길은 낙엽을 밟으며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과 자전거만 지나다닌다. 오소마츠와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빗물에 녹아내리듯이 자연스레 옛 추억에 잠겼다. 여기서 말하는 추억이라함은, 서로에게 낙엽을 던지며 노는 것이다. 그는 바닥에 쌓여있는 낙엽더미에 발을 내질러서 내게 먼저 장난을 걸어왔다. 거기에 내가 두 손 가득 낙엽을 주워 반격을 하는 것으로, 우리는 천진난만했던 어린시절을 되찾았다. 비록 잠시 뿐이었지만. "머리가 낙엽투성이야."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 사이사이의 낙엽을 떼어내고 있노라면, 문득 정면에서 또다른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그리고 그때, "조심해." 돌연 오소마츠가 내 팔을 잡아끈다. 커다란 자전거가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간 뒤, 깨닫고보면 나는 어느새 오소마츠의 품에 안겨있다.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안고, 그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넌 이상해." 그가 내게 말한다. "자꾸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심장이 빠르게 뛰어댄다. "......." "이제 정말 혼란스러워." "오소마츠..." 무심코 그의 이름을 옛 습관대로 부른다. 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하면, 그의 손으로부터 작은 떨림이 전해져온다. 조금 전의 내 부름이 그 안의 무언가를 강하게 두드린 것 같다. "넌 누구야?" "난..." 이쯤에서 솔직하게 말해도 좋은 걸까. 말하면 믿어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어쩌면 그는 나를 이상한 스토커취급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다만 두번다시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으려 한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이 남자를 사랑하는 거다.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 어느때보다 뜨겁게, 열정적으로. . . . . . . 머리가 지끈거리는 수학과목의 숙제를 마친 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아즈사의 다이어리를 펼친다. 이 다이어리는 1년 간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다이어리와 달리 무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3년 분량은 아즈사의 중학교 시절로 가득 채워져 있고, 나머지 1년은 깨끗하게 비어있다. 나는 그녀가 썼던 마지막 일기에 이어서 자신의 일기를 쓸 생각이다. 바로 오늘부터. 빨간펜을 손에 쥐고 페이지를 뒷쪽으로 넘긴다. 그곳의 달력에는 이미 빨갛게 표시되어 있는 날짜가 있다. 가을문화제, 즉 학교의 축제날이다. 펜을 들고 동그라미를 쳐놓은 곳 아래 조그맣게 적는다. '고백하는 날'. 그래, 나는 이 날 오소마츠에게 고백을 할 것이다. 그가 내 마음을 받아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며 망설일 여유 따위, 지금의 내게는 없다. 이제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오소마츠가 좋다. 아니, 사랑한다. 그러니 용기를 내서 말하는 거다. 반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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