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마츠상TALK!

5년만의 재회가 허무하게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평일이 되어, 나는 쥬시마츠의 가게에 나가서 그의 일을 도왔다.
빗자루로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쓰는 동안, 오소마츠에 대한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없었던,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쵸로마츠에 대한 생각 또한.
이대로 그리움이 점점 커져가면, 그렇게 되면, 결국에 나는 무너져버릴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아도 나의 마음은 침묵할 뿐이었다.

"미안해, 이렇게 불러내서─."

바깥에서 줄곧 분재를 손질하고 있던 쥬시마츠가 어느덧 화원 안으로 들어와 하얀 돌계단 위에 화분을 내려놓는다. 노란색 앞치마, 하얀 장갑, 목에 두르고 있는 수건. . . . 쥬시마츠가 일할 때의 모습이다. 물론 카운터에 있을 때는 장갑과 수건은 없다. 바로 저 모습이 마을 처녀들의 마음을 여럿 사로잡았다. 5년 전의 어린아이처럼 해맑던 웃음은, 어느덧 성실한 청년의 웃음으로 변했다. 집에 있을 때나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가끔 예전의 웃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끔이다.

"괜찮아. 성수기에는 일손이 모자라잖아."

나는 낙엽을 마저 쓸어 자루에 담은 뒤 빗자루를 내려놓고 쥬사마츠를 도와 화분을 옮겼다. 5-6월은 꽃이 피는 시기라, 이와 같이 분갈이를 하고 남은 빈 화분들이 많이 생겼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창고에 보관해두었다가 가을에 꽃이 피는 시기가 돌아오면 다시 꺼내어 사용하곤 했다. 이제는 나도 원예에 견문이 꽤 넓어져서 쥬시마츠가 일일이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일을 척척 해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일을 돕는 것에 조금도 불만이 없다. 내가 쥬시마츠에게 받은 것들에 비하면 이까짓 노동 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는 여태껏 나와 이츠키를 보살펴주면서 내게 무언가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언제나 우리 모자를 위해주었다. 그것이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는 내 일생의 빚. …이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그를 도울 수 있어서, 그저 다행일 뿐이다.

"저기..."

화분을 모두 옮긴 뒤 뒷정리를 하려는데 문득 쥬시마츠가 나를 불렀다. 그는 창고의 문을 닫은 뒤 어째서인가 계속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말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에 말야... 잠깐 할 얘기가..."

고요한 화원에 홀로 울려퍼지는 청아한 벨소리. 그것은 쥬시마츠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내 액정을 확인하더니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3분 정도 지나,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여자친구?"

"응."

"오늘 저녁은 이츠키랑 둘이서 먹어야겠네─."

나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뒷정리를 하며 능청을 떨었다. 쥬시마츠가 내 앞에서 통화를 하기 곤란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의 여자친구 한 사람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자친구를 상대한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거나, 닭살돋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뭐,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쥬시마츠가 자기 집에서, 자기 가게에서 무얼 하든 그건 그의 자유니까. 그런데 뭐가 그리도 쑥쓰러운 건지, 쥬시마츠는 언제나 나를 피해서 전화를 받았다. 마치 그러한 상황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얘기는 다음에 하면 되잖아. 오랜만에 데이트하는데 천천히 놀다 와."

'내일 돌아와도 돼─.' 그렇게 농담 아닌 농담을 하며, 나는 자루를 내다놓기 위해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날, 쥬시마츠는 가게에서 더이상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이츠키에게 저녁을 먹인 뒤 TV 앞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다.
한겨울도 아니고 초봄도 아닌데, 몸을 절로 웅크리게 될 만큼 밤기운이 차갑다.
브라운관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벼나별 생각이 다 머리를 어지럽힌다.
일어나 뭐라도 하고 싶지만 이미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잠도 오지 않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 .

"이츠키와 이 집을 나갈 거야."

"왜? 내가 불편하게 했어─?"

"아니. 그냥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사실 늦었지. 진작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날은 이츠키가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댁에 가서 집에 없었다. 그런 기회는 좀처럼 없었기에, 나는 쥬시마츠와 단둘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그 말을 꺼냈다. 계속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뤄두었던, 중요한 말. 나는 마땅히 자립을 해야 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갈 건데─?"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부탁해서 집을 알아보고 있어. 괜찮은 집을 찾는대로 이사하려고."

"아예 여길 떠나는 거야─?"

"응."


알고 있었다. 쥬시마츠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이츠키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가 나에게 부탁했던 것은 일본을 떠나지 않는 것, 오로지 그것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견딜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죄책감, 그리고. . . .

"하지만 이츠키는 여기서 나고 자랐잖아. 유치원도 친구들도 모두 여기에 있고... 일본어도 아직 제대로 할줄 모르는데, 갑자기 한국에 가서 적응할 수 있겠어─?"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도 아무 생각없이 계획도 없이 귀국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어리니까 환경이 바뀌어도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야. 한국어는 조금 어렵겠지만, 부모님께서 좋은 가정교사를 붙여주신다고 했어."

"그렇구나."


이대로 가면 이츠키는 언젠가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아버지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남자가, 어느 날 어머니를 놔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그런 것을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번만큼은 결코 약해지지 않으리라. 아무리 쥬시마츠가 나를 붙잡는다고 해도 우리의 이별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내 표정에서 결의를 느꼈는지, 그날따라 쥬시마츠는 말이 없었다. 그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내게 한 마디, 딱 한 마디를 했다.

"잘 됐네."

...

...

...

침대에 누워 이츠키의 가슴을 토닥여주다가,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보니 저녁을 먹고나서 물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목마름도 잊을 정도로 나는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곰곰이 하고 있었던가. 이제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물을 한 잔 마시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으니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시계를 쳐다보니 바늘이 12와 1 사이를 가리키고 있다. 내일 돌아와도 좋다고 했던 농담이 이런식으로 들어맞게 되다니. 허탄한 마음에 실소가 터져나온다.

"왔어?"

"응. 이츠키는─?"

"자고 있어."

쥬시마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엉덩이를 들썩여 자리를 내어주자, 그는 내 옆에 앉아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나의 차가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조금 전까지 바깥에 있었을 터인데도, 그의 체온은 매우 따뜻했다.

"나... 기다렸어─?"

"이츠키가 늦게까지 기다리다 겨우 잠들었어."

그 순간 나는 자신의 대답에 회의를 품었다. 쥬시마츠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정말로 이츠키 뿐이었던가. 내가 느꼈던 허전함, 쓸쓸함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내일은 셋이서 외식할까─."

"신경쓰지마. 그냥 집에서 먹어도 돼."

"한동안 하지 않았으니까 가자. 그렇게 하고 싶어─."

문득 내 손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얼굴은 상냥하게 웃고있지만, 나도 모르겠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내게 잘 해주려는 걸까. 왜 내게 필요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내 눈치를 보는 걸까. 나는 이미 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쥬시마츠는 그가 형을 대신해 나와 이츠키를 돌봐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지만 사실 내게는 자격이 없다. 나는 그의 형제중 누구와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이츠키는 엄연히 사생아이다. 우리는 그저 오랜 친구사이일 뿐, 그가 나에게 혈연 따위로 구애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내가 지금까지 그에게 받아온 것, 나는 그 빚 조차 제대로 다 갚지 못했다. 쥬시마츠는 친구로서 내게 충분히 잘 해주었고, 다른 형제들은 그 점에 대해서 그를 매우 높이 산다. 설령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더 남아있다고 해도, 나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의 그릇은 이미 예전에 가득 찼고, 정도를 넘어서 흘러넘치고 있다. 그런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도대체 쥬시마츠는 나에게 뭘 원하는 걸까.

"그보다 낮에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응. 그래서 말인데... 지금 피곤해─?"

"아니, 별로."

"그럼 술 한 잔 하자─."

쥬시마츠는 소파 밑에 놓아두었던 쇼핑백 안에서 와인을 꺼내 얼굴높이로 들어올리며 내게 웃어보였다. 지난번 이츠키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갔을 때 내가 아주 마음에 들어했던 와인과 같은 것이었다. 그날 무심코 과음을 해버린 나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쥬시마츠의 어깨에 기대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술기운에 서러움이 폭발해 잠꼬대를 하듯이 홀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던 나. 그런 나를 따뜻하게 감싸안고서 위로를 해주던 쥬시마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츠키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아버지는 왜 어머니한테 사랑한다고 말 안 해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츠키에게, 쥬시마츠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어디 가는 건 아니잖니.'
그렇게 여유가 넘치던 그를 당황시킨 것은 이츠키의 다음 질문이었다. '아버지는 왜 어머니한테 뽀뽀 안 해요?' 아이에게는 그저 순수한 의문에 불과했지만, 쥬시마츠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정신을 차린 뒤 그의 품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그 불편한 심문회는 비로소 종결되었다. 아이에게 아무런 해답도 알려주지 못한 채.

"오늘 부모님께 연락을 받았어. 꽤 괜찮은 집을 찾았다고. 그래서 다음 달 쯤에는 이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마냥 서두르는구나. 아쉽지도 않아? 이 집 어디에도 네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

나는 붉은색의 와인이 잔 안에서 빙글빙글 춤추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향을 음미하다가 병을 들고 쥬시마츠의 잔을 채워주었다. 목이 마른 건지, 그의 잔을 비우는 속도가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르게 느껴졌다.

"물론 나도 아쉬워... 하지만 쥬시마츠에게 더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쥬시마츠는 내가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또 잔을 비우고는 조용히 고개를 모로 돌렸다. 언제나 웃고 있는 그의 얼굴도, 오늘따라 왠지 고민이 많아보였다.

"그렇지, 참. 지금부터 미리 짐을 싸두지 않으면..."

나는 술기운에 얼굴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 비해서 그리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겨우 몸을 추스른 나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내가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뒤에서 쥬시마츠가 내 팔을 붙잡았다.

"있잖아..."

쥬시마츠는 그 순간 나를 억지로 돌아세울 만큼 내가 자신에게 주목하기를 바랐지만, 그러면서도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왠지 불안해 보였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가지마."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내 마음을 강하게 죄어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채, 생각보다는 마음이 먼저 그곳에 닿았다.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아.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침착하게 쥬시마츠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그도 마침내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대로... 딱히 상관없잖아?"

그는 여전히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의 표정도 점차 일그러져갔다.

"쥬시마츠의 그녀에게 못할 짓이야. 더이상은."

아무리 쥬시마츠가 내게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의 여자친구의 입장에서는 나와 이츠키가 눈앳가시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실제로 만난 적이 그다지 없고,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 정도는 바보라도 알 수 있다. 가족도 아닌, 연인도 아닌 젊은 남녀가, 한 집에서 아이를 기르며 산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다. 쥬시마츠가 데이트를 하러 나갔을 때의 나도 상당한 소외감을 느끼는데, 그의 여자친구의 마음은 어떨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분명 나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건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나는 나 때문에 쥬시마츠가 애인과 갈등을 겪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러니 이쯤에서. . . .

"헤어질게."

그 말은 나에게 바위처럼 거칠고, 낙엽처럼 쓸쓸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쥬시마츠가 어떤 생각으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내게는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쥬시마츠는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가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헤어질 테니까..."

나는 그가 그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말을 입에 담기 전에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단지 그렇게 하길 원했을 뿐, 딱히 경멸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친 쥬시마츠는 곧 얼굴에 슬픔을 내비췄다.

그런 쥬시마츠의 앞에서 더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를 뒤로한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에는 문을 닫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윽고 문 너머로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형......"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쥬시마츠는 다음 날 바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 날 이래 그와 일상적인 대화 외에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애초에 이 집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상처입혔다.
이제는. . . . 정말 떠나야 할 때다.

짐을 싸다가 피곤함을 견딜 수 없어 잠시 침대에 누워 있었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떠본다.

"쥬시마츠...?"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이마에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방금 막 돌아왔는지, 아니면 돌아오자 마자 내게 온 것인지, 그는 아직 외출복차림이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넥타이. 평소 그가 일할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게 문을 닫고 쵸로마츠에게 다녀오기라도 한 걸까. 몽롱한 기분을 떨쳐내고 보면,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아 주변이 캄캄해져 있었다.

"내가 깨웠나보다. 미안해─."

쥬시마츠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으로 이번에는 내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나는 자신의 마음이 그 온기에 녹아내리는 것을 깨닫는 순간, 스스로에게 잔인하게 매질을 하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아직 졸려 보이는데 조금 더 자─."

그가 나를 조심스레 다시 시트 위로 눕히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의지대로 이불을 치우고 몸을 추스렸다.

"아냐. 짐을 마저 싸야... 윽!"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그리고 짓누르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쥬시마츠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나를 강제로 침대에 눕힌 쥬시마츠는 상체를 숙여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와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나... 너 못 보내."

"그게 무슨 소리야?"

성인 남자에게 힘으로 제압을 당한다는 것은 내 안에 필요이상의 저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저항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쥬시마츠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떨림을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쭉 같이 살자."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나는 두 발을 시트에 딛고서 다시 한 번 몸을 추스리려 했다. 그러나 내가 필사적이 되는 만큼, 쥬시마츠의 손도 나를 더욱 강하게 죄어왔다. 그대로 계속 있으면 머지않아 팔이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힘에 담긴 의미를 자신의 생각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멸의 대상과도 같이 또다시 매몰차게 외면해야 하는 것인지, 어지러운 마음 만큼이나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결혼해줘."

"뭐?"

그는 매우 진지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이 일순간의 충동일 뿐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나로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츠키는 네 형의 아들이야."

"하지만 너는 형의 여자가 아니야."

그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그 즉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만둬, 쥬시마츠에게는 그녀가 있잖아."

"헤어졌어. 부탁이니까 날 혼자 내버려두고 가지마..."

그 순간 나는 쥬시마츠의 이별선언에 눈물을 짓고 있는 가련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다음으로 커다란 죄책감이 밀려온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좋은 사람을 상처입히다니, 쥬시마츠가 이렇게 생각이 짧은 사람인 줄 몰랐어!"

"수백 번도 더 고민했던 일이야. 너와 본가에 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짓말..."

"난 언제나 참고 견뎌야 했어. 너의 곁에는 언제나 형들이 있었고, 나한테는 너에게 다가갈 기회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쥬시마츠는 내 턱을 다소 거칠게 붙잡고 자신과 똑바로 마주보게 했다. 나를 향한 그의 눈동자는 여러가지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커다란 답답함과 깊은 슬픔, 간절함, 그 뒤에서 조용히 이글거리는 뜨거운 욕망.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점점 좁은 구석으로 내몰았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은 나야. 널 가질 수 있는 사람도 나 뿐이고."

"내 마음은? 그건 중요하지 않아?"

"........."

쥬시마츠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문득 내 턱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머지않아 마음을 다잡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두 손이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강한 힘에 의해 몸이 일으켜졌다. 나는 그대로 쥬시마츠의 어깨에 쓰러졌고, 비로소 나를 품에 안은 그는 내 귓가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러나 이전보다 더욱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면 돼."

...

"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야."

....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

"이번만... 딱 한 번만... 내 멋대로 하게 해줘."

"그게 무슨 뜻이야...?"

"나랑..."

...

"섹스하자."

그 말과 함께, 나의 몸은 천천히 침대에 눕혀졌다. 조금은 망설여도 좋으련만, 그의 손은 저항이 사라진 나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쥬시마츠가 그의 연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던 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마음속에 이런 욕망이 숨겨져 있는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거짓 같았지만, 현실이었다.

"네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다면... 나도 좀 더 기다렸을 거야."

그는 야릇한 숨소리로 나를 자극하며 능숙하게 내 위에 올라탔다. 단지 몸이 밀착된 것만으로도 전신에 짜릿한 쾌감이 퍼져나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의 몸은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단단했다. 쌍둥이형인 이치마츠는 식이조절을 하지 않으면 금방 살이 쪄버린다며 투덜거렸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5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여자로서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쥬시마츠가 오늘과 같이 몸에 딱 맞는 셔츠를 입고 있을 때면 나는 무심코 그를 흘깃흘깃 쳐다보다가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나는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고,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 남자의 동생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흥분하고 있었다.

"오랜만인 거 알고 있어... 너무 긴장하지마."

그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단추를 푸는 동안 뜨거운 시선으로 내 몸을 훑었다. 그가 빨간 혀로 마른 입술을 핥는 순간 나는 몸이 강하게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해도, 그런 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상냥하게 해줄게..."

내가 몸에 걸치고 있던 것들이 침대 한편에 던져질 때까지,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맨정신으로 지켜볼 수가 없어서였다.

"나를 봐."

"안 돼."

"보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말을 듣지 않고 입술을 깨물자, 그는 나의 감은 눈에 키스를 했다. 그러나 가벼운 애무는 곧 끝이 나고, 조금 전까지 내 허리에 머물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내 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뭐하는..."

"너를 위해서야."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면서, 쥬시마츠의 오른팔이 나의 상체를 감싸안고 흩트러지지 않도록 나를 지탱해주었다. 아니나다를까. 나는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쾌감에 몸을 비틀며 신음을 터뜨렸다. 마치 그가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몸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보는 게 좋을 텐데'라던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스스로 외면하고자 했던 것을 자신의 몸에 깊이 새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눈을 뜨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눈앞의 상황을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역시 괴로웠다. 아무리 생각을 멈추려고 해도, 자꾸만 내 머릿속에서 불쾌한 중얼거림이 반복되었다. 나는 지금 쥬시마츠의 품에 안겨있다. 그와 섹스를 하고 있다. . . .

"아... 아앗!"

시야가 하얗게 뒤덮히며 절정이 찾아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 안에서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을 빼낸 쥬시마츠는 '좋아...' 하고 중얼리며 조금 전까지 내 상체를 감싸고 있던 팔을 거두고 하의의 버클을 풀었다.

"기다려, 쥬시마츠... 우리... 여기서 그만두자..."

"그만두면 네가 어떻게 할지 뻔히 아는데? 너... 날 두고 가버릴 거잖아."

그는 내 다리를 휘어잡고 마침내 느슨해진 나의 그곳에 자신의 것을 밀어넣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섹스에 대한 기억은 찢어질 듯한 아픔과 눈물 뿐이었기에,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다. 쥬시마츠가 내 몸을 흔들 때도 확실히 그때와 같은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픔은 같은 순간 내 몸을 애워싸고 있던 쾌감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하아─..."

그의 숨소리는 내 귓가에서 쉴 새없이 나를 유혹하고, 흥분시켰다.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으로도 몸이 강하게 죄어왔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 중저음의 목소리에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 . .

"아... 아아... 아앗...!"

몸이 흔들릴 때 마다 안쪽에서 쿵쿵 울려대는 쾌감은 시간이 흐를 수록 나를 점점 인사불성으로 만들었다. 바로 옆방에서 이츠키가 잠을 자고 있는데, 아무리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입술 사이로 야릇한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나는 생각이 미처 닿기도 전에 머리맡으로 손을 뻗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쥬시마츠는 내 팔을 잡아당겨 다시 똑바로 눕힌 뒤 자신과 마주보도록 만들었다. 도망가지 말라는 듯이.

"..."

나는 베게에 얼굴을 묻고 목끝까치 차오른 신음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어서 쥬시마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단지 "...까"라는 마지막 부분만 제대로 들었을 뿐이었다. 쥬시마츠는 내 머리카락을 아래서 위로 쓸어넘긴 뒤 드러난 목에 키스를 했다. 그냥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 뜨거운 혀로 나의 피부를 핥았다. 그제서야 나는 무의식중 그에게 들었던 말을 똑바로 기억해냈다. '물 테니까...' 그는 나에게 확실히 그렇게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는 내 목을 물려 하고 있었다.

"안 돼!"

그것은 마지막 남은 나의 이성이었다. 그렇게도 간절히 외쳤건만, 쥬시마츠의 날카로운 이빨은 결국 내 살갗을 뚫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도 절정이 찾아왔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두 팔에 힘이 들어가 뼈가 부서질 것 같고, 찢기고 갈라진 목이 불타오르 듯 뜨거웠다. 쾌감과 좌절감이 한 데 섞인 혼란속, 숨을 쉴 때 마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나를 찔러댔다. 마음 같아서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무리를 한 탓일까,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리고 쥬시마츠는──

"미안해."

"내가 좀 더 빨리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

"널 잃을까 봐 조급했어."

"정말 조급했어."

...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믿을 수 없는 듯 잔뜩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보구나, 정말."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쥬시마츠의 뺨을 감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새빨간 피가 곳곳에 묻어 있는 얼굴, 그리고 떨리는 몸. . . .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쥬시마츠를 좋아해."

"좋아하니까 떠나려고 했던 거야..."

그것만이 쥬시마츠와 그의 애인, 나와 이츠키, 모두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쥬시마츠가 연락을 받고 나갈 때 마다 질투가 끓어오르기 시작해서. . . .
화가 나서, 슬퍼서,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쥬시마츠는 내게 분에 넘치는 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언제나 내 곁에 돌아와줘서, 나를 향해 웃어줘서. . . .
설레이고, 또 착각에 빠지고, 다시 실망하고, 너무나 괴로웠다.

적어도 서로를 상처입히지 않고, 좋은 기억만 남긴 채 헤어지고 싶었다.
그대로 가다간 언젠가 자신의 본심을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아이의 숙부를 자처한 남자에게 터무니 없는 마음을 품은 여자라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도. . . .

무서웠다.

...

...

...

이른 아침의 한기와 새의 지저귐소리에 눈을 떴을 때, 나는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이츠키가 유치원에 가지 않는 날이라서 쥬시마츠가 아이를 가게에 데려간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침을 대충 차려먹고 외출준비를 한 다음 집을 나섰다.

"이걸 여기에 꽂는 게 어때요?"

"괜찮네. 예뻐─."

가게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보통 때라면 문에 달려 있는 종이 울리는 순간 나를 알아차렸겠지만, 그 날은 내가 안쪽으로 한참을 걸어들어가서야 비로소 두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츠키는 자기 얼굴크기 만한 아마릴리스를 손에 쥐고, 내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쥬시마츠도 곧 이츠키를 따라 내게 다가와서, 허전했던 내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저, 아버지랑 꽃꽂이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도 같이 해요!"

"엄마도 같이? 엄마는 그런 쪽으로 별로 센스가 없는데."

"괜찮아요! 아버지가 다시 예쁘게 만들어주실 테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4살 난 이츠키의 심상치 않은 말재간에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쥬시마츠라면 내가 아무리 해괴한 모양의 꽃바구니를 만들어도 10분이면 그것을 훌륭하게 바꿔놓을 것이다. 그는 여자인 나보다 더 아름다움에 조예가 깊은 남자니까.

"─."

"응?"

"다음주에 지방으로 사진을 찍으러 갈 계획인데, 이츠키 데리고 너도 같이 가자─."

가게 내부에는 살아있는 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판에 피어 있는 야생화의 사진들이 곳곳에 걸려있다. 전부 쥬시마츠가 직접 찍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여행도 할겸 노지를 찾아다니며 취미로 찍고 다녔는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사진을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것이 직업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사진을 찍으러 가면 이틀 후에나 돌아오기 때문에, 나와 이츠키는 언제나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 . . 우리도 함께다.

"같이... 가줄 거지─?"

"가요, 가요, 어머니!"

이제 걱정을 내려놓아도 되는 걸까─.

"그래, 가자. 항상 아빠만 혼자 치사하게 놀러갔으니까."

"에─?"

"이번에 같이 가서, 아주 지갑을 탈탈 털게 해주자."

"네~"

"..."

웃어도 되는 걸까──.

...

...

...

이렇게나 복잡한 세상이지만, 텅 빈 하늘은 쓸쓸함이 느껴지도록 허전하다.

빌딩 꼭대기에 걸터앉아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넌지시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비로소 그리운 두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와 얼굴을 비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남동생, 그리고 옛 연인.

"결국 숨어버리는 거야?"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본다. 아까부터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라니.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과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악마가 그곳에 서 있다.

"쵸로마츠."

이제는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진 그의 옛 이름. 지금까지도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눈앞의 악마, 오소마츠 밖에 없다. 인간의 감정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이건만, 이제 그리움 뿐만 아니라 아픔 마저 느껴진다.

"신경 꺼."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형제라고 해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두 남자는 다르다. 완벽하게 대비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난 너의 그딴 우울한 얼굴을 보려고 네 육체를 되살린 게 아니거든."

오소마츠는 창백한 얼굴 만큼이나 새하얀 손가락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두 손을 바짓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라이터 없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뭐... 되살려냈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망할 천사나부랭이지만 말야."

하얀 연기가 춤을 추듯 곡선을 그리며 피어오르다가 서서히 공중으로 흩어진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끝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오소마츠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카인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그나마 신이 널 아껴서 허락해준 거지, 다른 녀석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거야."

"알아.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해."

. . . . . . .

"한 대 피울래?"

"못 해. 흡연은 금지되어 있어."

"왜 이래, 넌 천계에서 항명의 아이콘이잖아. 이깟 담배가 뭐 대수라고."

"하긴..."

쵸로마츠는 그동안 자신이 아버지(신)에게 대들었던 온갖 일화들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끝내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정말 에게 네 존재를 알리지 않을 거야?"

"실은 지금 내려가서 맨손으로 빛을 쏘는 걸 보여주려던 참이었어."

오소마츠는 연기를 들이마시다가 돌연 기침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쵸로마츠도, 고개를 모로 돌리며 실소를 내뱉었다. 아직도 자신이 실없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감탄스러워서였다.

"쥬시마츠가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난 내 동생을 믿어. 녀석이라면 분명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야."

"글쎄. 일단 나도 쥬시마츠에게 한 표를 던지긴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의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 같아?"

"아니.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끝없이 변화하잖아. 그게 신이 천사나 악마보다 인간을 더 높이 사는 이유라고. 우리는 언제나 정체되어 있지만,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말야."

"........."

쵸로마츠는 불어오는 바람에 의식을 맡긴 채 잠시 사념에 잠겼다. 그러자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오소마츠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천사와 악마, 그들의 운명이 두 갈래로 갈라진 이래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잠시 뿐이겠지만, 그들은 예전 평범한 형제의 모습을 되찾은 듯 했다.

"우리는 죽지 않으니까."

언제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쭉──.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돼."

...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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