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히 외출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굳이 차가 두 대씩이나 갈 필요는 없었기에, 모두 카라마츠의 차를 탔다. 물론 운전은 카라마츠가 했다. 도시의 중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면서 창문 밖의 풍경은 높은 건물을 대신해 무성한 녹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도로는 매우 한산했다. 한산하달까, 그 길을 달리고 있는 사람은 우리 외에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약속된 장소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맞아?" "이 주소가 맞다면, 응." "저기 토도마츠의 차가 보이는군. 이치마츠도 아마 와 있을 거다." 나는 카라마츠가 가리킨 곳에 세워져 있는 하얀 차량을 한 번쳐다보고는 도착하자마자 그 크기와 웅장함으로 나를 압도시켰던 서양식 저택에 눈길을 돌렸다. 거뭇거뭇한 덤불이 벽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서인가, 저택 뒤로 펼쳐진 휑한 들판 때문인가, 마치 영화에 나오는 귀신의 집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커다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그곳은 또 다른 분위기의 장소였다. 달그락달그락─... 넓은 홀을 걷다가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들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곁에 있던 쥬시마츠의 팔을 꼭 붙잡았다. 물건이 부대끼는 소리, 단지 그 뿐이었다면 내 기분탓이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 다음에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러명. 저택에는 우리 말고도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곧 벽에서 검은 점액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변에 악마가 있음을 의미하는 하나의 징조였다. "겁 먹을 것 없다. 녀석들은 우리를 해치지 않아." 카라마츠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눈앞에 화르륵 피어나는 여러 개의 작은 불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꽃이 사그라들자, 이윽고 그 자리에서 정체불명의 검은 생명체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기껏해야 내 엄지만한, 이를 테면 요정과도 같은, 아주 작은 악마들이었다. "그냥 얼굴을 보려는 것 뿐이다." "얼굴? 누구의?" "내." 그 말대로, 악마들은 딱히 우리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단지 카라마츠의 머리맡을 날아다니며 그에게 다가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정말이야! 카라마츠가 왔어!" 얼굴을 보는 것 뿐이라고 해도, 작은 벌새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요란법썩을 떠니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좀 더 자세히 봐봐!" "싫어! 내 엉덩이에 소금을 뿌리면 어떡해?" 그러고보니 악마는 은 뿐만 아니라 소금도 싫어한다고 했던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악마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은 억누를 수가 없는지, 한 녀석이 머뭇거리며 무리에서 빠져나와 카라마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도 잠시 뿐, 녀석은 카라마츠의 콧등에 슬쩍 손을 대보고는 기겁을 하며 쏜살같이 도망을 가버렸다. "정말 소금을 뿌린대?" "그래! 보다시피 엑소시스트잖아! 그에 대해서는 수백 개의 소문이 돌고 있어!" 어느덧 두려움이 사라진 나는 쥬시마츠의 팔을 놓고 작은 악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온통 카라마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잘 들어보면 꽤 재미있었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그는 악마들을 잡아다 바늘에 걸어놓은 다음 머리와 몸통, 심지어 은밀한 부위까지 소금을 뿌린대. 그리고 그걸 털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린댔어!" 악마들은 일제히 헉 하고 놀라며 경악을 하더니 꺄아 꺄아 소리를 질러대며 혼비백산해서 공중을 날아다녔다. 한편 카라마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 봐,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나쁜 인간이 아니다. 못된 장난을 치지 않는다면 오늘 여기 있는 누구의 엉덩이에도 소금을 뿌리지 않을 거야. 알겠나?"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네 몸에서 온갖 위험한 냄새가 나는걸. 은, 성유, 구퍼더스트... 그리고 그 문신! 그게 제일 구려!" "그래, 그래! 구려!" 카라마츠는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무리 엑소시스트라고 해도 인간에게 해를 끼칠 만한 힘이 없는 작은 악마들에게는 꽤나 관대한 모양이었다. "참, 그보다 우리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맞아, 우리는 녀석들에게 안내를 해주러 온 거야. 악마들은 그제서야 중요한 볼일이 떠올랐는지 허둥지둥 대열을 바로세웠다. 말을 하는 것도 동시에, 움직이는 것도 동시에. 정말이지 정신사나운 녀석들이었다. "이제보니 오소마츠의 부하들이었군." "부하? 우린 부하가 아니야!" "오소마츠님은 친구라고 말씀해주셨어!" "그래! 무시하지마!" "바보인간!" 한 마디 말에 열 마디로 토를 다는 악마들에게 지쳤는지, 카라마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줄곧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쥬시마츠도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악마라고 하면 늘 카인을 떠올렸었는데, 우리를 안내해주었던 그 벌새 같은 것들은 그런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시끄럽긴 해도 차마 미워할 수가 없달까, 조금 귀여운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 여기야." "들어가." 다소 지저분해 보였던 바깥에서의 모습과 달리 내부는 아주 깔끔했다.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여기저기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 멋드러진 저택의 대합실에서 토도마츠, 이치마츠를 만났다. 사진을 통해서 잘 지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신수가 훤해보였다. "왔구나, 카라마츠형. 쥬시마츠형." "나도 있어." "그래, 알아." 토도마츠는 두 형들에 이어서 나를 꼭 안아주었다. 가이드로 일하면서 성대를 혹사시키는 바람에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것을 제외하면 5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 향기...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는 여전히 마츠노가의 막내 톳티였다. 변화를 논하자면 그가 아닌 이치마츠 쪽에 할 말이 많았다. "이츠키는 어쩌고?" "오늘 저녁까지만 이웃 아주머니께서 돌봐주시기로 했어." "그보다 오랜만이다, 형─. 요즘에는 왜 놀러오지 않는 거야─?" "스케쥴이 꽉 차 있어서 바빴어. 이번주에는 꼭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네." 현재의 이치마츠에게서는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언제나 푸석거리던 머리카락은 왁스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의 아이덴티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츄리닝바지는 스키니한 청바지로 바뀌었다. 상의는 평범한 흰색 박스티이지만, 팔에 차고 있는 검은 가죽팔찌와 어울려서 전체적으로 수수하면서도 세련돼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몸. 가느다랗고 왜소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정갈한 근육이 완벽한 몸매를 이루고 있다. 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꾸미는 것이 직업이니까. 내가 처음으로 그의 직업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이츠키를 잠시 아주머니께 맡기고 장을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어느 높은 빌딩의 커다란 LED화면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온몸을 물감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한 남자가 커다란 꽃들에 둘러쌓인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나는 양손에 분유와 기저귀가 가득 들어 있는 봉투를 든 채 멍하니 그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한 3분 정도 지났을까, 사진속 남자의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작은 의문은 곧 확신으로 변하고,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때 내가 보았던 그 모델이 다름아닌 이치마츠였던 것이다. ... ... ... 길어도 너무 긴, 정말 이상하리 만큼 긴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이 일에 대한 것으로, 흥미롭기는 했지만 그다지 재밌는 대화는 아니었다. 이제 정말 어른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쓴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소마츠형은 우리를 불러놓고 왜 안 나타나는 거야?" "이제 곧 올 거라고 생각한다만." 카라마츠는 침착한 목소리로 토도마츠를 타일렀지만 정작 본인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화의 소재가 고갈난 우리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고, 넓은 방 안을 가득 채운 침묵속에서 눈을 굴려가며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와 장식품 등을 구경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진이라도 일어날 듯이 바닥과 식탁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강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도무지 사그라들 줄을 모르는 바람속에서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천장과 벽이 유황으로 새까맣게 물들고,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서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는 검은 연기가 사방에서 불쑥 머리를 내미는 것을 보았고, 우리의 주변을 빠르게 맴돌다가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는 것 또한 보았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카라마츠가 모두에게 말했다. "형님을 호위하는 녀석들이다. 굉장히 사나우니까 다들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나는 이상한 움직임의 바람이 얼굴을 덮쳐오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조심하라는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침착하려 애써도 소란은 계속되었다. 문득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바닥을 예리하게 뚫어놓은 듯한 검은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구멍은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안에서 커다란 검은 손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오소마츠가 나타났다. 괴물을 연상시키는 수백 개의 검은 손들은 오소마츠를 들어올리 듯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지면으로 나온 오소마츠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얼굴은 오싹할 정도로 창백했고, 그의 눈동자는 피의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오소마츠는 피로가 느껴지는 갈라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하고는 살며시 오른팔을 들었다. 그러자 그것을 명령으로 인식한 듯 우리를 애워싸고 있던 검은 연기와 커다란 손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췄다. 머지않아 지진과 바람도 멈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황의 냄새가 코를 찔렀고, 살기와도 같은 묵직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오소마츠..."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단지 그 뿐, 도저히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줄곧 그리워했던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한 감격이었을까, 단순한 놀라움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내 생각이 닿지 않는 저쪽 세계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소마츠는 모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시선은 가장 먼저 맞은편에 앉아있던 내게로 향했다. 그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한 번 슥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내 모습이 이상한가? 내 얼굴에 주름이라도 생겼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형님, 괜찮은 거야?" "그냥 멀미를 한 것 뿐이야." 카라마츠를 제외한 나와 나머지 형제들은 누군가 음식을 가져와 각자의 앞에 내려놓고 다시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옥의 악마들은 자동차 대신 손을 타고 다닌다. 그리고 악마도 인간의 음식 먹을 수 있다. . . . 보통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사실들 하나하나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악마들은 왜 항상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지 모르겠어." 모두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토도마츠였다. "조금 조용히 등장할 수는 없는 거야?" 그는 그제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건 나한테 베개를 찌그러뜨리지 않고 그 위에 올라설 수 없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오소마츠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핏기가 전혀 없는 그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고, 그가 음식을 씹을 때 마다 그의 목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선명한 검붉은 색의 혈관이 도드라졌다. 그는 나이프를 손에 쥐고 기계처럼 딱딱한 움직임으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는 것을 반복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위험한 기운을 차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긴장되어서 무엇이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뭐, 형님으로서는 지금 막 이계로 넘어온 거니까. 갑자기 배려를 해달라고 해도 무리겠지." "그래... 오히려 배려를 받아야 할 쪽은 나야." 오소마츠는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 약간의 노기가 드러나 있었다. "아까부터 거슬려 죽겠다고. 은으로 만들어진 액세서리, 십자가 그려진 물건들 전부 빼놔. 나를 퇴마하러 온 거 아니잖아?" 우리는 우물쭈물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몸에 걸치고 있던 것들을 빼고,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것들을 꺼내어 한 곳에 모아놓았다. 내가 오소마츠의 입장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은 작은 십자가가 달린 팔찌, 성경의 한 구절이 적혀 있는 열쇠고리, 그리고 작년에 쥬시마츠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은목걸이, 이렇게 3개였다. 나는 팔찌와 열쇠고리를 내려놓고 양손을 뒤로 보내어 목걸이를 빼려다가 잠시 멈칫 했다. 그 목걸이는 내게 매우 소중한 것으로,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결코 그것을 자신의 몸에서 멀리하지 않았다. 언제나 한 자리에 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오소마츠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게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것을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목걸이를 빼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식사가 끝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각자 원하는대로 흩어져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조금 외곽으로 나왔을 뿐인데 별이 이렇게나 많다니. ──쥬시마츠는 베란다의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하면, 누군가의 손이 그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5년만에 겨우 다시 만나게 된 그의 형제, 마츠노가의 장남, 오소마츠였다. "한 대 피울래?" "끊은지 오래 됐어─." "그래, 맞다. 육아는 어때?" 오소마츠는 정장의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물론 라이터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지난 5년간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불과 짙은 유황의 냄새가 없는 삶, 고통과 비명이 없는 삶, 그것은 악마인 그에게 있어서 더이상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피곤하지만 재밌어. 아이가 정말 귀여워─." "그렇겠지, 너를 쏙 빼닮았을 테니." 쥬시마츠는 하얀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걱정이야. 습관처럼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계속 아니라고 타이르다가 행여 상처를 받지는 않을지─..." 오소마츠는 쥬시마츠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깊은 수심을 느꼈다. "그냥 네가 진짜 아버지가 되어주면 되잖아." 그가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쥬시마츠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오소마츠는 웃지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자식아." 두 사람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못 해..." "못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오소마츠는 대답이 없는 쥬시마츠의 등을 툭 때렸다. 그러자 쥬시마츠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커다란 손으로 쥬시마츠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나한테까지 숨기려 하지마. 네 마음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넣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는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후우─ 하고 뱉었다. "형은 결코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제안하지 않는단다, 동생아─." 그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줄곧 난간에 엎드려 있던 쥬시마츠는 자세를 고쳐잡고 담배를 태우는 오소마츠의 옆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침묵이 맴돌았다. "애엄마는... 아직 형을 사랑해." "어쩌면." 오소마츠는 난간에 담배를 짓이겨 불을 끈 뒤 베란다 아래로 던졌다. 필터만 남을 때까지 피우는 그의 흡연습관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를 봐. 내 얼굴을 보라고." 쥬시마츠는 오소마츠의 옆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5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오소마츠가 실소를 터뜨렸다. "10년, 20년, 3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난 늙지 않으니까." 그 말을 할 때 오소마츠의 표정은 매우 쓸쓸해 보였다. 오소마츠가 쥬시마츠의 마음을 들여다보듯이, 쥬시마츠도 조금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하지만 정말─ 정말 그렇게 되길 바라." 오소마츠의 쓴웃음과 그의 마지막 말은 쥬시마츠의 가슴을 두드렸다. "고마워, 형." "그리고..." "미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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