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마츠상TALK!

"나는 네 곁에 없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차라리 내게 마음이 식어서, 미워서 떠난 것이었다면 나았을 텐데.
지난 날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이 나를 빛바랜 과거 안에 묶어둔다.
온통 세피아색 추억으로 물든 삶, 비처럼 쏟아져 가슴을 적시는 그리움.
차갑고, 쓸쓸하다. . . .

...

...

...

"─."

주변의 아카시아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스산한 소리를 내면, 하얀 꽃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어른거린다.

"──."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 의식이 완전히 깨어남에 따라 천천히 눈을 뜨자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이 시야를 채운다. 노을빛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는 온화한 청년의 모습.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상냥하고, 내 뺨을 감싼 가녀린 손은 따뜻하다.

"쥬시마츠..."

몽롱한 기분을 떨쳐내고자 나른함이 느껴지는 눈을 소매로 부비적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청년의 이름을 부른다. 이제는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입술이 움직인다.

"곤니치와─. 아니, 이제 곰방와인가─?"

해가 서산을 향해 서서히 기운다. 피부에 스치는 기온도 이전보다 차갑다. 이대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뒤에 완전한 밤이 될 것 같다.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어?"

"전화기도 꺼놓고, 아무 말도 없이 네가 갈 곳이라면 여기 밖에 없잖아─."

문득 쥬시마츠의 맑은 눈동자에 근심이 비친다. 나는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넓은 묘터가 보이는 방향으로 몸의 방향을 돌리면, 나의 또다른 친구가 있다. 하지만 그는 작은 언덕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을 뿐 더이상 내게 말을 걸지도, 나를 향해 웃어주지도 않는다. 나는 그를 만질 수도 없다. 그래서 언제나 이렇게 차가운 비석을 대신 어루만진다.

"여자 혼자서 이런 곳에서 잠들면 안 돼─. 그런 건 형도 원치 않을 거야─. 집에 돌아가자─."

그래. . . . 이곳에 묻혀 있는 사람은 나의 친구이면서 쥬시마츠의 친형이기도 하다. 쌍둥이에다가 형제애가 두터웠던 두 남자는 그다지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을 곧잘 이해해주곤 했었다. 그렇기에 나는 쥬시마츠의 말이 곧 쵸로마츠의 마음이라고 믿는다. 완전히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탓에 때로는 그 믿음이 내게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가슴이 무너질 것 같지만, 그것 조차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또 올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다정한 손길로 비석을 쓰다듬은 뒤 앞서가는 쥬시마츠를 따라 발걸음을 돌린다. 이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쌓인 평지라 아카시아 등의 나무가 많아서 성묘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조금 있을 뿐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이다. 이런 으스스한 곳에 쵸로마츠를 혼자 두고가자니 마음이 무겁다. 그러한 가운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묘터의 전망이 확 트여 있어서 언제든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내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무언가 어려운 결정을 할 때나 곤란에 처했을 때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쵸로마츠를 떠올린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그것은 친구를 잃은 나에 대한 자기위로이기도 하면서,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몇번이고 재인식하게 되는 슬픈 일이기도 하다.

...

...

...

카인이 떠나고, 오소마츠는 그 날로 모습을 감췄다. 아벨이 죽고, 쵸로마츠도 영원히 잠들었다. 서로를 상처입히고,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형제와 친구를 떠나보내며 남은 자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었다. 쵸로마츠의 장례식은 공교롭게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하게 되었다. 온갖 검은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데, 관 위에 놓인 백합마저 차가운 빗물에 시들어 우울한 빛깔을 띠었다. 우리는 그 뒤 모두 저 마다의 일거리를 찾아 집을 나갔고, 자연스레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 당연하면서도 슬픈 사실이다. 우리는 삶에서 '가장 큰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은 삶이 있었고, 그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 누구나의 의무였다. 그래도,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묘터를 떠난 쥬시마츠와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언저리를 깎아지른 듯한 한적한 도로를 내달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눈썹이 휘날렸다. 어느덧 지평선까지 내려앉은 노을이 옅은 분홍빛에서 짙은 주홍빛으로 변하고, 그 빛으로 물든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창문을 닫은 뒤 운전석의 쥬시마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토도마츠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쥬시마츠는 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침착하게 핸들을 꺾으며 대답했다.

"탁자 위에 올려둔 것 봤어. 이제는 잘 지내고 있는지 얼굴이 무지 좋아보이더라─."

그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보조석의 수납함을 열어, 이거라도 먹고 있으라며 내게 과자를 꺼내주었다. 잠을 쫓기 위한 것으로 넣어둔 그 과자는 조금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주 바삭해서 입이 심심할 때 먹기에 그만이었다. 입에 넣고 몇번이고 반복해 씹고 있으면 벼나별 생각이 다 드는데, 그 즈음 나는 토도마츠에게 받았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토도마츠는 작은 여행사에서 통역과 가이드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학교에 다닐 때부터 가장 자신이 있었고 좋아했던 과목인 영어와 중국어를 깊이 파고들어 각 분야에서 일할 자격을 얻어냈다.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성향을 모두 살려는 데 멋드러지게 성공한 셈이다.

"시간이 됐네."

쥬시마츠는 차량의 시계를 흘깃 쳐다보더니 근처의 버튼을 하나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FM이라는 글자가 뜨며 라디오가 켜지고, 귀에 익은 남성의 목소리가 차량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네, 나고야현 마츠모토시의 토노씨께서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우리에게는 오후 5시에 늘 챙겨듣는 라디오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처음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세간에도 꽤 널리 알려진 프로그램이다. 재밌기도 재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진행자인 DJ가 우리의 형제이자 친구인 카라마츠라는 사실이다.

「안녕하세요, DJ아사키씨. 20대 중반의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제게는 7년 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습니다만, 최근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사키씨에게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아사키라는 이름은 카라마츠가 방송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명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얼굴없는 DJ로 활동하며 청취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 모두 그의 중후한 목소리를 칭찬하지만 그의 생김새나 실제 성격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프로그램이 1주년을 맞이했을 때 즈음 생겨난 아사키팬클럽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사키의 신상정보를 캐내려 하거나 함부러 퍼뜨리는 것을 금기시 한다. 신비주의는 끝까지 신비주의로 남는 것이 좋다고 했던가. 그것이 아사키란 인물에 대해 각자 자유로운 상상을 하고 있는 청취자들을 위한 배려라는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렇네요─. 아무래도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 것을 감안하면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과연 진짜 사랑일까에 대한 고민은 토노씨 뿐만 아니라 모두 한번쯤 하셨겠지요...」

아사키가 진행하는 이 라디오프로그램의 구성은 간단하다. 청취자들의 고민을 듣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인 조금 애매한 대답을 돌려주는 것. 단순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 DJ와 소통하고, 더 나아가 수십 수백명의 다른 청취자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알리는 것. 나도 몇 번인가 사연을 보낸 적이 있기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 …아사키는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기쁜 듯이 내 사연을 읽어주곤 했었다.

"카라마츠 보고싶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쥬시마츠는 정면의 거울을 통해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그의 손등이 나의 귓불을 부비적거렸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까─?"

그는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 온갖 일을 다 한다. 아까처럼 수납함에서 물건을 꺼내거나, 나를 만지거나, 그런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위험한 행위이기에 이따금씩 그에게 잔소리를 하는 나이지만, 한 번에 여러가지 일을 하는 그 모습 자체는 꽤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세심한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경우랄까. 거기에는 물론 선명한 이목구비가 두드러지는 그의 옆모습도 한몫을 한다.

"곧 카라마츠형이 집에 방문할 거야─."

"곧? 그게 언제인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내일─."

"너한테 전화했었어?"

"응─."

그런데 어째서 내게는 하지 않은 걸까. 본래 연락을 잘 하지 않는데다가 불쑥 나타나서 불쑥 사라지는 카라마츠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마지막으로 카라마츠에게 받은 메시지가 벌써 3개월도 전의 것이고, 통화는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이치마츠가 함께 있으니 딱히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나도 알고 싶다. 생각해보면 이치마츠도 이치마츠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선물을 매번 직접 가져오지 않고 택배로 부칠 것은 뭐람. 내가 괜한 불평을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은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그와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언제나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그에게 손수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걸까.

쥬시마츠가 딱히 이치마츠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번에는 카라마츠 혼자 방문을 할 예정인 것 같다. 어쨌든 이치마츠에 대한 소식은 함께 살고 있는 카라마츠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

...

아사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는데, 도대체 언제 잠이 든 것인지 모르겠다. 코끝에 어른거리는 진한 레몬향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덧 차가 집앞에 주차되어 있고, 쥬시마츠가 조수석 쪽으로 몸을 틀어 내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있다. 그는 벨트를 풀고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제서야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가슴이 조용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쥬시마츠의 손이 목을 감싸오는 것을 느꼈고, 그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을 느꼈다. 그는 뺨에서 귀로, 귀에서 목으로 천천히 옮겨가며 내게 키스를 계속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야릇한 숨소리에 심장이 반응하여 온몸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의 손은 내 몸을 타고 내려가 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편 윗쪽에서는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이 내 목을 노리고 있었다. 나는 두려워 하면서도 쥬시마츠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가 주는 쾌감이 너무 짜릿해서, 행복감 마저 느껴져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

같은 공간에 같은 사람, 같은 향기.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쥬시마츠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 조금 전처럼 내게 키스를 하거나, 손을 대거나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그대로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렸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건만 아직도 몽정을, 그것도 친구와 붙어먹는 꿈을 꾸다니. 혹시 쥬시마츠가 내 잠꼬대를 들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다. …나는 소중한 두 남자를 잃은 이래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다.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남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가졌던 것이 5년도 더 된 일이니 점점 몸에 욕구가 쌓여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런 식의 변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쥬시마츠에게는 어떨까. 그는 여자친구가 있다. 그냥 여자친구도 아니고, 2년 간 짝사랑하고 3년을 넘게 사귄 여자친구다. 나는 쥬시마츠의 책상서랍에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기 위한 반지가 들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이런 터무늬 없는 꿈을 꾼 것일까.

나는 차마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거울에 비친 쥬시마츠의 모습을 흘깃거렸다.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고,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어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츠키가 내 품안에 뛰어든다. 아기침대에 누워 옹알이를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렇게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면 나와 눈높이가 맞을 정도로 성장을 했다.

"오늘 유치원에 데리러가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아버지가 데리러와주셨으니까!"

이츠키가 내 뒤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 쥬시마츠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는다. 그는 또래에 비해 조숙한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영락없는 아기다.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어찌 훈계를 할 수 있을까. 그저 한숨을 내쉬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타이를 뿐이다.

"이 분은 작은 아버지셔."

"그러니까 아버지잖아요?"

"달라."

"자, 그만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리와, 이츠키─."

거울이 있다면 보고싶다. 혹시나 지금 내 얼굴이 무섭지는 않은지. 쥬시마츠는 내가 이츠키의 호칭을 고쳐주기 위해 애쓸 때 마다 늘 지금처럼 아이를 안고 어딘가로 가버린다. 아마도 그것이 아직 이츠키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애당초 이츠키는 그런 식으로 헷갈릴 수 밖에 없는 환경속에 살고 있다. 호칭도, 아이에게는 그냥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나 비슷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와중에 카라마츠나 이치마츠 등의 다른 형제들을 제대로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갸륵한 일이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마는, 그 이전에 아이에게 쥬시마츠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지가 정말이지 막막하다.

...

...

...

저녁을 먹은 뒤 이츠키를 씻기고 나면, 우리는 서로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뒤 거실의 불을 끄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이츠키는 보통 나와 함께 자는데, 종종 쥬시마츠와 자겠다고 떼를 쓰곤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동화책을 더 실감나게 읽어준다나. 아무튼 나는 그런 습관으로 인해 이츠키의 오해가 더 커질까 봐 아이를 만류하고 있다. 그러나 쥬시마츠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간다. 정말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츠키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속이 편한 건지 나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뭐가 어쨌든 내가 그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모두 집을 떠난 뒤 한기만 남아 있는 마츠노가에 오랜만에 쥬시마츠가 찾아왔다. 그는 홀로 남아 갓난 아기인 이츠키를 돌보고 있던 나에게 먼저 자신과 함께 살지 않겠냐는 말을 꺼냈다. 당시의 나는 아저씨가 직장에서 은퇴하시면서 집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되어 당장 갈 곳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 제안은 내게 매우 솔깃한 것이었으나, 나는 선뜻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단 쥬시마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그 무렵 쥬시마츠가 막 연애를 하기 시작해서 행여 나 때문에 여자친구와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쥬시마츠는 그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이츠키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그 애는 내 조카잖아.'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형이 없으니 내가 돌봐주는 게 당연해.'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만약 그 얼굴에 일말의 망설임이라도 담겨 있었다면 나는 결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쥬시마츠의 말대로 형의 아들을 돌봐주는 것이 동생의 도리라면,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쥬시마츠는 진심이었다. 그는 나에게 강요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쉽게 놓아주지도 않았다. 내가 계속 거절을 할 경우 최후에는 나와 이츠키에게 따로 집을 구해주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던 그였다. 아무리 형제애가 돈독했다고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그가 내게 바라던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언제나 자신이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있을 것. 그는 내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단지 일본을 떠나지만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고, 일단 그를 돌려보냈다. 어두컴컴한 방에 우두커니 앉아 고민을 하고 있노라면, 과연 내가 혼자 이츠키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딱히 쥬시마츠가 이츠키의 아버지역할을 대신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이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쥬시마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의 집으로 이사를 한 뒤 그와 함께 생활하며 그의 도움을 받아 이츠키를 먹이고, 재우고, 가르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현재 우리의 모습이 된 것이다.

...

...

...

딩동─. 거실에 울려퍼지는 초인종소리에 조금 전까지 내 무릎 위에서 재롱을 부리던 이츠키가 쏜살같이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연다. 이렇듯 이츠키는 쥬시마츠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작은아버지들을 모두 좋아한다. 카라마츠를 보는 것은 작년 여름이 마지막이었으니 반가울만도 할 것이다.

"이츠키, 그새 많이 자랐구나.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었니?"

"네!"

"그럼 약속했던 대로 선물을 줘야겠네."

"우와!"

이츠키는 작은아버지의 선물을 끌어안고 거실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상자 안에는 아이가 예전부터 몹시 갖고 싶어했던 장난감이 들어있었다. 쥬시마츠가 진작부터 사주려 했던 것인데, 백화점에 가던 날 다음에 우리집에 방문할 때 이츠키에게 줄 선물로 남겨두고 싶다며 카라마츠가 만류를 했었다. 그는 신이 난 이츠키를 볼 때 마다 아이 만큼이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곤 했다. 이토록 아이를 좋아하고 또 원하는 그가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심지어 연애도 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늘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러나 사적인 문제에 대해 그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어느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보통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유명한 DJ이면서 음지에서 활동하는 엑소시스트이다. 라디오의 진행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언제나 성당에서 일을 한다. 신부님께서 의뢰를 받아 연락을 넣어주시면, 약속되어 있던 장소로 찾아가서 퇴마를 해주는 것이 그의 주업무이다. 디제잉과 엑소시즘 둘 중에 어느 쪽의 비중이 더 큰지에 대해서는, 현재 카라마츠의 겉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엑소시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만 접해봤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다니는지 잘 모른다. 어쩌면 내가 흔히 기억하는 모습처럼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을 수도, 어쩌면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른 부분이 없을 수도 있다. 일단 카라마츠의 목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옷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그 문신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와 손목 바로 위까지 이어져 있다. 왼쪽과 오른쪽의 문양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조금 다른데, 양쪽이 합쳐져서 하나의 펜타클이 되는 모양이다. 그 밖에도 그는 귀와 손가락 등에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다. 만약 순은이 악마에게 정말 염산과도 같은 것이라면, 이 엑소시스트에게는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에게 전할 소식이 있다."

이츠키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우리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너희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전부터 저쪽 세상에 있는 오소마츠와 연락을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었다. 그동안 형님은 내가 보내는 신호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만, 얼마 전에 마침내 응답이 왔다.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하..."

나는 심장이 덜컹거리는 것을 느끼며 쓰러지듯 소파 바닥에 손을 짚었다. 놀라움에 숨 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를, 곁에 앉아 있던 쥬시마츠가 든든한 팔로 다시 일으켜주었다. 한편 카라마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괜찮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형님이 우리 모두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게 가능해─?"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마도 형님이 방법을 찾은 거겠지. 봐라, 내게 구체적인 날짜와 위치까지 일러주었다."

우리는 카라마츠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작은 쪽찌에 주목했다. 확실히 그 종이에는 6.04라는 날짜와 함께,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어느 건물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6월 4일이면... 바로 내일이잖아.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냐─?"

"나도 깜짝 놀랐다만 형님이 그 날로 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저쪽 상황은 그리 녹녹하지가 않아. 그나마 자유로운 편인 우리가 이해해주는 수 밖에."

나는 저녁을 먹고난 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줄곧 카라마츠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곁에서 물이 묻은 그릇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쥬시마츠가 무어라 말을 하는 듯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쥬시마츠가 내게 손을 뻗어 나를 돌아세웠고, 그제서야 사념으로부터 벗어난 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형을 만나는 거야. 왜 그런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어─?"

"사실 난..."

나는 악마가 된 오소마츠를 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인간인 그이지, 악마가 되어버린 그가 아니었다. 게다가 형제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쵸로마츠만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뎌내는 것도, 내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라며 나를 힐난한다 하더라도 별수 없었다.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다.

쥬시마츠는 자신의 앞치마로 내 손의 물기를 닦아준 뒤 그대로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런 다음에는 딱 한 마디를 했다. '괜찮아.'라고. . . . 나는 그 말을 듣고 찰나의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이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 조금은 마음을 편히 먹어도 괜찮겠지.

"참, 쥬시마츠. 여자친구와는 잘 지내고 있는 거냐?"

거실에서 잠든 이츠키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던 카라마츠가 이제 막 소파에 앉은 쥬시마츠에게 비로소 일상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아까는 오소마츠에 대한 이야기가 더 급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지만, 이제는 있다. 아마도 우리는 잠이 올 때까지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수다를 떨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장남의 자리가 비어있는 가운데 차남인 그가 동생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본인은 연애에 흥미가 없다고 해도, 동생의 연애사에는 흥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잘 지내고 있어."

쥬시마츠는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던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단지 그 뿐, 그는 잘 지내고 있다는 말 다음에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카라마츠형 오늘은 여기서 잘 거지─?"

"아니, 생필품은 하나도 안 가져왔다."

"그냥 내 것 써. 어차피 옛날부터 자주 그랬잖아─."

"알았다. 그럼 하루만 신세지도록 하마."

오랜만에 카라마츠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웠지만, 우리들의 수다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점점 할 이야기가 줄어드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쥬시마츠는 일찍이 방으로 돌아갔고, 나는 바람을 좀 쐬야겠다는 카라마츠를 따라서 베란다로 나왔다. 자기 전에 한기를 받아 좋을 것은 없지만, 그는 언제나 밤에 일하고 낮에 잠을 자는 부엉이족이었기에 그다지 피곤해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가게에 나가서 쥬시마츠의 일을 도울 때가 아니면 온종일 집에 있을 뿐이여서 딱히 피로감은 없었다. 게다가, 아까의 충격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차가운 바람으로 조금은 식히고 싶었다.

카라마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내가 임신중일 때는 금연후유증에 시달리던 이치마츠를 밖으로 내쫓기까지 하던 그였지만, 이츠키가 어느정도 자란 지금에 와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에게, 처음부터 오소마츠에 대한 것을 물어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어쩌다보니, 정말로 어쩌다보니 이야기가 나왔을 뿐이었다.

"비유하자면 싹에서 바로 꽃이 핀 거다. 형님은 카인의 그릇이었으니 등장하는 순간부터 모두의 주목을 받았겠지. 지금은 입지가 꽤 굳어졌는지, 웬만한 고위급 악마들도 그를 무서워해."

그동안 어떻게든 외면하고 살아왔었는데, 이렇게 엑소시스트로부터 직접 오소마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싫어도 그가 악마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딱히 악마라는 존재를 이제와서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특별히 좋은 구석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한때 인간이었다고 해도, 내 친구였다고 해도, 악마는 악마이다. 그들은 우리와 삶의 방식이 다르다. 나는 그 다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소마츠와 만날 수 없는 것보다도, 그와 내가 다르다는 것이 나를 더욱 아프게 했다. 그래서 여태껏 그에 대해서 카라마츠에게 일절 묻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 . . . 더이상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곧 오소마츠와 만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니까.

"오소마츠는 인간의 영혼이나 피 등을 제물로 받을까?"

"형님 뿐만 아니라, 악마라면 누구나 제물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만 힘을 유지할 수 있거든."

"그에게 엑소시즘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나는 그 질문을 할 때 카라마츠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도그럴것이 오소마츠는 그의 친형이다. 다만 그가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니, 엑소시스트라는 직위를 두고 생각하자면 카라마츠에게 오소마츠는 엄연히 적이 된다. 그와 싸우고, 그를 무너뜨려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세례를 받을 때 모든 악을 증오하겠다고 신에게 맹세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카라마츠라면 오소마츠를 저버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게 예상 밖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주 솔직하게. 그것은 아마도 카라마츠가 그 만큼 강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힘으로는 형님의 머리털 하나 건드릴 수 없어. 아무리 수행을 한다 해도 그건 일생 불가능한 일이다."

카라마츠는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 검푸른 색으로 물든 도시를 향해 길게 내뱉었다. 후우─ 하고.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라 하늘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 연기처럼, 나도 잊으면 되는 걸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 걸까.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들... 옛날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아무도 방법을 모르는 이상."

카라마츠는 덤덤하게 대답하면서도 내가 신경쓰였는지 곧 담배를 눌러끄고 내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

이윽고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싸왔다.

"네가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되돌릴 수 있어."

나는 카라마츠의 눈동자를 보고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더이상 아프고 괴로운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웃어라. 예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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