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 괜찮다면... 검찰청에 다시 복직하는 게 어떠냐?"
"복직?" "난 네가 힘들게 취득한 공무원자격을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한다. 검찰청의 일이 보수는 적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여느 직업 보다 훨씬 안정적이잖냐." ".........." 내가 평소에 궁상맞은 소리를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요즘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옛 직장에 복직이라니...... "쓸 데 없는 참견이었다면 사과하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지난 한 달 간 나루호도의 사무실에 드나들며 이제 겨우 그의 일을 돕는데 익숙해졌다. 더군다나 그가 무보수로 변호를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복직을 하면 재정적으로 점차 안정이 될 테지만... 까다로운 미츠루기를 상대로 열심히 싸워준 나루호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당분간은 계속 나루호도의 일을 돕고 싶어." "나루호도의 일?" "응. 일단 변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하고, 무엇 보다......" ───문득 사무소에 혼자 두고 온 나루호도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는 지금쯤 저녁을 다 먹었을까? 보나마나 음식이 소화 되기도 전에 책상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여태껏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직도 내가 없을 때는 자기 멋대로이기 때문이다. "내, 내가 옆에서 여러가지로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거든......"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서 시선을 바닥 위로 떨어뜨리며 옆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솔직히 말해서 나루호도는 더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고, 그에게 나의 도움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루호도와... 함께 있고 싶어." 지난 한달 동안 그의 일을 도우면서 깨달았다. 다양한 사정을 갖고서 찾아오는 의뢰인들, 그리고 사소한 것으로 부터 시작해 조금씩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는 것을. 그것은 언제나 어렵지만 즐겁고, 때로는 위험하지만 박진감이 넘친다.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그러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 "재판이 끝난 후 녀석의 사무소에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루호도의 조수로 일했어. 구치소에서 나오던 날 그에게 내가 뭔가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괜찮으면 자기 사무소에 나오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하는 편이 집에서 쉬는 것 보다 일상으로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거라면서." "녀석의 조수라면 확실히 너의 적성에 맞겠군. 넌 옛 부터 조사나 추리를 잘 했으니까." "그게... 내가 하는 건 대부분 사무일이야. 나루호도가 웬만해선 날 현장에 안 데려가거든." "녀석은 주로 살인 같은 강력범죄로 기소 된 자들의 변호를 맡는다. 저번 일도 있고 하니 너에게 험한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난 이제 괜찮은데......" "지난 번 네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사건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냐?" "응. 그때는 내게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적어도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잖아. 무죄로 풀려나긴 했어도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고... 앞으로 계속 조사를 해 봐야지. 검찰청에 있어도 난 수사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나루호도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새로운 사건과 접할 수 있으니까 정보를 모으기 수월할 거야." "그렇군......" "이건 내 감인데, 아무래도 그 사건은 14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동감이다. 그래서 사건의 피해자 쿠로자와 쇼이치를 자세히 조사해봤지. 이것만으로는 아직 단정짓기 어렵다만... 적어도 네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만은 증명할 수 있을 거다." 미츠루기가 서랍 안에서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넨다.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훑어 보니, 14년 전 아버지께서 수사를 맡으셨던 보안마비사건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쿠로자와는 그 때 해킹에 가담한 혐의로 국제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담당수사관이 너의 아버지였지." "역시 그랬구나......" "녀석의 배후에 있는 것은 옛 부터 국제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는 키니기토라는 그룹이다. 정보보안을 주업무로 하는 만큼 수준급 해커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 믿기 어렵지만... 미국 주요도시에 위치해 있는 검찰청의 보안망을 눈 깜짝할 사이 마비시킬 수 있는 정도라더군. 메이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미국 검찰과 특수수사기관의 가장 큰 요주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츠루기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미국의 도시들은 우리나라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고, 그 만큼 하루에 수 많은 범죄가 일어난다. 그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는 검찰청의 보안망을 마비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야기할 수 있는지, 지금의 나로써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쿠로자와는 키니기토의 비밀요원이었는데, 최근 정보를 빼돌린 것으로 의심 받아 그룹의 이사진들과 마찰을 빚은 모양이다. 1년 전 불법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해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려 했지만 결국 키니기토에서 보낸 청부업자에게 제거당했지." "숨어살려고 했다면 외부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날 만나려고 했던 이유가 뭐였을까? 단순히 협박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텐데......" "키니기토가 노렸던 것은 쿠로자와 쇼이치의 목숨 보다도 그 자가 회사로 부터 빼돌린 정보였다. 쿠로자와가 널 만난 건 아마 그 정보와 관련되어 있을 거다. 혹시 뭔가 기억나는 것 없냐?" 두 눈을 감고서 사건당일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본다. 가로등 하나 없는 뒷골목에 깔린 어둠,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차가운 빗물... 조금씩 두통이 일기 시작하더니 다양한 감각들이 방해를 해온다. 뇌진탕의 후유증인지, 기억이 유리처럼 깨져버렸다. "없는 것 같아......" "그것은 불행임과 동시에 다행이군. 만약 쿠로자와가 네게 정보를 발설했다면... 너도 결코 안전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때 그 청부업자는 지금 검찰에서 추적중이지?" "그래. 지금은 신원파악이 완료된 상태다. 최선을 다 해 붙잡기는 하겠다만... 앞으로 웬만하면 혼자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응......" 그러고보니 지난 달 부터 이상하리 만큼 집이나 법률사무소 앞으로 순찰차가 자주 지나다녔다. 구치소에서 막 나왔을 때는 거의 매일 그랬고, 그로 부터 일주일 후에는 이틀에 한 번, 그리고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쿠로자와살인사건에 가장 크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니까 검찰이 범인을 쫓는다면 내 주변을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미츠루기의 말대로 청부업자의 목적이 쿠로자와가 아닌 그가 나에게 전달하려 했던 어떠한 '정보'를 막는 것이였다면, 그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츠루기의 갑자스런 복직권유가 납득이 된다. 그는 내 재정문제 따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변을 걱정해서 최대한 안전한 장소에 두려 하는 것이다. 검찰청은 일 년 내내 삼엄한 경비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미츠루기의 직장이니 언제든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이유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갈 때는 언제나 나루호도가 데려다주니까. 법률사무소와 우리집은 그다지 멀지 않거든." "........." 미츠루기가 입술을 굳게 닫은 채 묘하게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어째서인가 그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 "왜 그래, 미츠루기?" "...아무것도 아니다. 뭐가 어쨌든 항상 조신하게 행동하도록 해라." "알았어, 알았어. 하여간 어떨 때는 카루마씨랑 똑같이 말한다니까~ 누가 제자 아니랄까 봐." "오늘은 늦었으니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마." 미츠루기가 책상 위의 서류들을 한 데 모아 서랍 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괜찮아, 바쁠 텐데 그냥 있어." "특별히 급한 일은 없다. 한동안 일을 당겨서 했더니 내일 부터 일주일 정도 시간이 비게 되었거든." "그래?" ───미츠루기는 엘레베이터를 싫어하기 때문에 사무실이 12층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계단을 이용한다. 나는 보통 엘레베이터를 타지만, 이렇게 미츠루기와 함께 퇴근 할 때 만큼은 그와 함께 계단을 이용한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12층의 계단 쯤은 아무렇지 않게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 "그럼 다음주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뭔가 먹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냐?" "글쎄, 네가 말해 봐. 사과하는 의미로 내가 쏠 테니까." "아니, 내가 사도록 하마." "나도 식사 한 끼 정도는 사줄 수 있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미츠루기가 실소를 터뜨린다. "딱히 너의 지갑사정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정말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나니까 사겠다는 것이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미츠루기가 나에게 미안해 하는지 모르겠다.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다. 그가 나 때문에 자신의 경력에 상처를 입은 반면, 나는 무죄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풀이 죽어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사과를 하겠다고 하니, 괜스레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맨날 내가 얻어먹기만 했으니까 이번만큼은 내가 살 거야." "그런 건 신경쓸 필요 없대도." "더이상의 반론은 기각합니다!" "나, 원...... 그래, 알았다." 미츠루기의 따뜻한 손이 나의 머리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평소 누군가에게 칭찬 따위를 받을 일이 좀 처럼 없기 때문인지, 이렇게 누군가 머리를 만져주면 묘하게 기분이 좋다. "그럼 나는 너와 다시 만나기 전까지 키니기토와 쿠로자와에 대한 자료를 좀 더 모아 두도록 하마." "고마워, 너 밖에 없다." 미츠루기의 어깨를 툭툭 치고서 계단을 내려가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14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KL04호사건의 범인이었던 쿠로자와 쇼이치. 그는 어째서인가 자신의 배후에 있던 키니기토를 배신하고 정보를 빼돌렸고, 목숨을 노려지는 와중에도 나를 불러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 날 쿠로자와와 다투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 의식을 잃기 전에 그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얼핏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 '너의...............' '너의 아버지는..............' 기억이 너무나도 흐릿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지만, 그 때 그가 했던 말은 아주 중요하다. 무리를 해서라도 떠올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윽!" "!" 일순간 사고가 정지해버린 나머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미츠루기가 잡아준 덕분에 다행히 구르지는 않은 모앙이다. "미안...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 "머리가 아픈 거냐?" "응......" "의사의 소견서에 '뇌진탕으로 인한 기억소실은 30일 정도 지속 된다'고 적혀 있었으니, 지금 당장은 너무 무리하지 마라. 앞으로 조금씩 기억이 돌아올 거다." 그의 말대로, 최근들어 방금 전 처럼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흩어진 유리조각이 모여 점차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날,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쿠로자와의 목소리─── 내가 알고 있던 원래 그의 목소리와는 상당히 달랐다. 왠지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것은 마치─── 마치──────. '네가 구나-.' '안녕하세요, 아저씨!' '받아라,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이게 뭐예요?' '너에게 큰 힘이 되어줄 부적이지.' '부적?' '그래, 나중에 가 어른이 되면 이 펜던트를 열어서... 이렇게 가운데에다 검지손가락을 가져다대렴." '우와! 열리네!' '꼭 어른이 되면 열어야 한다, 알겠지?' '응! 감사합니다, 아저씨!' 어린시절 부터 몸에 지니고 있던 작은 펜던트─── 정확히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에 쥐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서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겨왔다. 이 펜던트가 열리는 것이었다니───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완전히 잊어 버리고 있었다.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져서 떨어지거나 부딪혀도 벌어진 적이 없을 뿐더러, 겉모습만 보면 결코 열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적에는 확실히 여는 법을 알고 있었는데─── 단 한 번이라도 열어 본 적이 있더라면 잊어버리지 않았겠지만, 어른이 되기 전까지 절대로 열어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느라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쿠로자와의 일 때문에... 불안한 거냐?" "응?" "넌 불안할 때 언제나 그 펜던트를 손에 쥐고 있잖냐."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미츠루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는 나와 10년이 넘도록 친구로 지내왔기 때문에 내 사소한 행동이나 표정변화를 금방 알아차리곤 한다. "아... 별 거 아니야. 그냥 어렸을 때 기억이 조금 떠올라서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직 부상으로 인해 뇌가 혼란스러운 모양이니 충분히 쉬도록 해라." "응......" 움직이는 차 안에서 창밖의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목에 건 펜던트를 만지작거린다. 쿠로자와 쇼이치─── 과연 그는 단순한 살인자였을까? 아니면 아직 내가 모르는 비밀이 존재하는 걸까? 지금은 모든 것이 베일에 감춰져 있을 뿐이다.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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