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정을 끝내고 두 시간 남짓 되는 비교적 한가로운 시간 동안 간단한 사무를 보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오늘 오전에 형사과로 부터 넘겨받은 서류를 손에 쥐고 일을 시작하려 해보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조용한 사무실에 홀로 앉아있으니 머릿속이 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차라리 정신없이 바쁘면 업무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으니 지금처럼 심경이 복잡해질 일도 없을 것이다. 일부러 다음주의 스케쥴을 이번주로 앞당긴 것은 그 때문이었고, 실로 효과가 있었지만 그로 인해 다음주에 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이런 상태로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기만 하다. 뻔뻔한 줄은 알지만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해볼까? 이렇게 한심한 모습으로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전화기에 손을 가져가보지만 쉽사리 수화기를 들 수 없다. 전화를 받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충 예상이 가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녀라면 나와의 대화를 상당히 어색해 할 것이다. 그도그럴것이 그녀가 구치소에서 나오던 날, 나는 불필요한 자존심 때문에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자신을 정말 범인이라 생각했냐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나의 친구라는 것은 구치소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검사는 사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때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대답했다면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내가 일부러 재판에서 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 대답을 회피했던 이유가 정말 그 뿐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그날 나는 자신의 커리어에 지울 수 없는 스크래치를 남겼다. 가뜩이나 심경이 복잡한 와중에 한 사람의 검사로서 사적인 감정에 얽매인 채로 재판에 임했다는 오해만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토록 그녀를 차갑게 지나쳤던 것이다. 결국 나는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을 뿐 그녀의 입장이나 기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터무니없는 사건에 휘말려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낯선 사람들에게 질타와 멸시를 받는 것도 모자라,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 차가운 구치소바닥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면서도, 그녀에게 단 한 번도 '괜찮다'고 말해 준 적이 없다. 왜냐면 나는 그녀의 담당검사였으니까. 모든 것을 나루호도에게 맡긴 채 자신의 의무에 전념했을 뿐이다. 가뜩이나 의지할 곳 하나 없는데 10년이 넘도록 의지해온 친구라는 녀석이 무서운 증거품들을 내밀며 심문을 해대니 그녀가 얼마나 쓸쓸했을까. 아니라고, 모른다고, 그녀는 몇 번이고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 믿어줄 수 없었다. 재판관과 배심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루호도가 그녀를 어떻게든 보호하려 애쓸 때, 그런 그와 싸워가며 끝까지 그녀의 유죄를 주장했다. 그녀는 나루호도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기에 줄곧 의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끝없이 이의가 오고가는 상황에서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만약 그때 그녀의 혐의가 인정됐더라면 그녀에게 주어지는 형벌은 최소 징역 7년, 계획살인이 인정 되면 무기징역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녀도 사람인 이상 두려웠을 것이고, 검사석의 내가 끔찍하리 만큼 미웠을 것이다. 검사란 원래 그런 식으로 많은 이들의 미움을 사는 직업이다. 보통 사람 같았다면 구치소에서 나오는 순간 내게 따귀를 날려도 시원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그저 슬픈 목소리로 자신을 정말 범인이라 생각했냐고 물어보았을 뿐이다. 당시 그녀의 질문은 '아직도 나를 의심하냐'는 현재형의문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끝까지 믿으려 했던 그녀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이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어보아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좀처럼 답답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삐익-... "?" 문득 손에 닿아 있는 전화기에서 소리가 나더니 빨간 불빛이 깜빡인다. 이는 누군가 나를 호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츠루기 검사님, 1층 보안팀의 야마다입니다." 수화기를 귓가에 가져다 대자, 한 남성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씨께서 뵙고 싶어하십니다." "...?" "예." 그녀가 먼저 나를 찾아오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벌써 나를 용서한 건가? 아니면 정말 따귀라도 때리러 온 건가? 어느쪽이 되었던 간에 더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있는 그대로의 내 심정을 전해야만 한다. "어서 들여보내주지 않고 뭐 하는가?" "지금은 시간이 늦은지라 검사님의 동의가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해서 말입니다." "...그렇군." 일반인이 출입증을 발급받을 수 있는 것은 검찰청의 본래 업무시간인 6시까지다.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니 어느덧 시곗바늘이 6시 12분을 가리키고 있다. "출입을 허가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해주게." "알겠습니다. 이제 지나가셔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스피커로부터 희미하게나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업무시간에 맞추려고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다소 숨이 거칠다. 나와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다른 날을 기약하거나 간단히 전화로 해도 될 텐데...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급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이런 시간에 검찰청을 직접 찾아온 걸까. 그녀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점점 초조해진다. 똑똑똑 - . "미츠루기, 나야." "들어와라." 덜컥-. 그녀가 문을 열고 나의 앞으로 걸어온다. 단정한 머리와 꾸밈없는 옷차림─── 조금 야윈 것을 제외하면 변함없는 모습이다. "저기... 지금 바빠? 그런 거면 나중에 다시 올게." "아니, 괜찮으니 거기 앉아라." 그녀와 사무실 가운데 위치한 소파에 마주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제법 심하게 달렸는지 창백한 얼굴이 홍조를 띠고 있고, 호흡이 아직 거칠다. "최근들어 연락을 하지 못했군. 일이 바빠서... 미안하다." "괜찮아, 나도 마찬가지인걸......" 서로 변명을 하고 있지만 연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다. 마지막에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한 달이 지났으니 갑작스러운 대면에 서로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은 내가 그녀 보다 먼저 솔직해져야만 한다. "저기, . 이전의 재판 말이다만..." "알아, 넌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거." "?" 내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그녀가 대답한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솔직히 말하면 나... 미츠루기 네가 그 사건의 담당검사를 맡았던 것에 대해서 너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어." "........." 당시의 상황이었다면 그녀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억울한 누명을 쓴 상태에서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던 인간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리 없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검사가 용의자를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 "지금은 오히려 네가 그 사건을 맡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왜냐면 미츠루기 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완벽한 검사이고... 그런 네가 상대였기 때문에 나루호도가 더욱 필사적이었던 거니까." 어째서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하게 내가 밉다 말해도 딱히 따질 생각은 없고, 사과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줄 텐데. 어째서 나를 탓하지 않는 걸까. "내가 잠시 잊고 있었어... 고마워, 미츠루기. 넌 정말 좋은 친구야." "........." "미, 미츠루기?" "미안하다......" 미안함과 답답함, 그 밖의 복잡한 감정이 한 데 뒤얽혀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비로소 가슴에 묻어두고 있던 진심어린 사과를 내뱉는다. "뭐가?" "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진작 널 찾아갔어야 했다. 너에게 찾아가서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내가 나쁜 놈이다." "........." 차라리 시원하게 뺨을 맞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미안함이 줄어들었을까? 나는 지난 한 달간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므로써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 억지로 사과를 받아냈다. 정말이지 철없고 어리석은 방법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하마." "미츠루기......."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과를 하지 못했던 이유는 나에게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천재검사도, 뭣도 아니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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