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잃고나서 몇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눈부시게 환하고 고요한 장소에서 눈을 떴다. 더이상 누군가 나를 훔쳐보는 듯 한 기분은 들지 않고, 환청과도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몸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지금 내게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포를 견뎌내는 방법이라고는 두터운 담요 한 장에 몸을 의지하는 것 뿐이다. 지금 이곳은 내 친구의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명패에, '검사 미츠루기 레이지'라는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나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습관 처럼 그를 찾는다. 우수하고 믿음직스러운 그가 곁에 있으면 그저 눈앞에 닥친 모든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일까?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살인이 일어난 현장에 있었고, 아직도 내 몸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스스로도 자신이 대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왜 하필이면 검사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인지 모르겠다. 똑똑똑-. 방 안의 정적을 찢고서 들려오는 선명한 노크소리에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순간 시야가 검은 소용돌이로 뒤덮이고, 사라진 줄만 알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저 여자가 사람을 죽였어...' '피를 뒤집어 쓴 모습 좀 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저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은 경찰일까? 검사일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기껏해야 그 정도다. 어쩌면 저 노크소리는 나의 환청에 지나지 않고, 지금 나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명백한 것은 더이상 나에게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두렵다. '저 여자가 사람을 죽였어...' 두렵고... '피를 뒤집어 쓴 모습 좀 봐...' 두렵고... '살인자...!' 두렵다...... 덜컥-. "-!" 한 남자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나를 향해 다급히 걸어온다. 그리고 나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깔끔하게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과 짙은 눈썹, 선명한 눈동자. ───일순간 머리에 통증이 일더니, 세피아색의 빛바랜 추억이 떠오른다. "나루호도-!" 그는 미츠루기와 마찬가지로 나의 옛 친구이다. 그 동안 간간히 소식을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무려 3년 만이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미츠루기한테 네 변호를 부탁받았어." 그의 가슴 한 켠, 원형의 해바라기 가운데 천칭무늬가 새겨져 있는 금뱃지가 눈에 띈다. 그것은 변호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물건이다. "미츠루기는?" "지금 사건현장에 가 있어." "........." 살인이 일어났던 장소. 그 한 마디에 잠시 희미해져 있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더니, 두려움이 나의 이성을 휘어잡는다. '살인자...' 목각인형 처럼 쓰러져 있는 한 구의 시신과 '살인자...' 바닥 위로 서서히 흩어져가는 피. '살인자...!' 날카로운 천둥소리와 '살인자...!!!' 차가운 빗물──────. ", 나를 똑바로 봐." "..........." 가까스로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멍하니 나루호도의 얼굴을 바라본다. 잔뜩 겁에 질려있는 나의 팔을 그가 강하게 붙잡고 있다. "무섭고 혼란스럽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 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 그래줄 수 있지?" ".........."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머릿속의 끔찍한 기억을 조금씩 더듬어간다. "피해자 쿠로자와 쇼이치를 만난 건 무슨 이유 때문이었어?" "이틀 전... 그 남자가 내게 전화를 걸어 왔어. 14년 전의 사건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면서." "14년 전이라면...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사건 말이야?" "응. 법조계에서는 KL-04호사건이라 하고, 당시 용의자가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무죄로 풀려났어. 그 사람이 쿠로자와였지." "그런 남자와 단둘이 만나다니... 무섭지 않았어?" "무서웠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있는 그 사건에 대해서." "그 남자가 네게 뭐라고 했는데?" "그 당시 경찰들이 찾지 못했던 흉기를 보여주면서 자기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고백했어. 그런 다음 나를 협박했는데... '죽고 싶지 않으면 조사를 그만두라'고 했어. 이대로 KL-04호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도록 조용히 살라면서......" "설마 너, 혼자서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거야?" "응... 미츠루기가 위험하니까 그만두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어쨌든 처음에는 만나서 침착하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그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 화가 났어. 그래서 난......" "괜찮으니까 계속 얘기해 봐." "쿠로자와와 다툼을 벌였고, 그가 나를 밀치는 바람에 벽에 머리를 부딪쳤어. 어찌나 세게 부딪쳤는지 시야가 마구 흔들리더니 일순간 사고가 정지했지......" "그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그가 죽어있었고, 네 손에는 피로 물든 칼이 들려 있었다?" "응......" "그럼 네게는 쿠로자와를 찌른 기억이 없는 거잖아? 어째서 자신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신을 잃기 전, 그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화가 나 있었거든... 더군다나 인적이 드문 장소였던 데다 밤이어서 현장에 그 남자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정말 아무도 없었어? 단순한 인기척이라던가, 이상한 낌새 같은 건?" "음......" 무리하게 기억을 끄집어내려 하자 또다시 두통이 일어난다. 마치 나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처음 나루호도를 보았을 때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깨닫지 못했던 것 처럼. "실은... 내가 그곳을 떠나려 할 때, 등 뒤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어." "이상한 기운?" "소름끼치는 살의... 같은 거라고나 할까......" "살의? 왜 진작 그 얘기를 하지 않았어?" "뒤를 돌아 봤을 때 아무도 없었거든. 그래서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확실히 느낀 거지?" "응. 그래서 머리를 다친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그 장소를 벗어나려 했던 거야. 생명에 위협을 느껴서......" "그건 아주 중요한 정보니까 조금이라도 더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즉시 내게 얘기해 줘. 지금 당장이 아니여도 좋아. 내 말 잘 들어, 이제 곧 검찰에서 나온 사람들이 널 구치소로 데려 갈 텐데..." "구치소라니......" 나루호도가 나의 떨리는 손을 꼭 붙잡는다.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는 그의 선명한 눈동자가 마치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검찰측에서 확실한 증거를 얻기 전 까지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너에게 불리할 것 같은 증언은 하면 안 돼. 알았지?" "응......" "네가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나는 끝까지 너의 결백을 믿을 거야. 그러니 너도 나를 믿어줘." 나루호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짧은 시간 동안 나의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이렇게나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던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변호사란 원래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가 나의 친구이기 때문인 걸까. 어쨌든 나는 그를 믿었고, 덕분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한달 후 나는 범죄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항목인 '살인죄'로 법정 한 가운데 서게 됐다. 나루호도는 나와 3년이란 시간을 떨어져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심없이 나를 믿어주었고, 나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밤낮을 지새우며 사건현장을 뛰어다녔다. 구치소에서 생활하는 한 달동안 그가 곁에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검찰측은 언제나 내가 유죄라는 전제하에 수사를 진행했고, 나를 여느 범죄자들과 똑같이 취급했다. 내가 있었던 구치소는 강력범죄만을 다루는 곳이었기에 그만큼 규율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고,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이번 사건의 담당검사이자 나루호도가 싸워야만 했던 상대, 즉 나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법정에 선 인물이 다른 누구도 아닌 미츠루기라는 사실이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쿠로자와 쇼이치는 과거 피고의 친부를 살해했다. 피고인은 이에 앙심을 품고 피해자를 사건현장으로 불러들여 살해, 즉 복수를 한 것이다." "잠깐! 먼저 사건현장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것은 피고인이 아닌 피해자였습니다." "누가 먼저 불러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살해동기가 확실한 이상 사건당일 피해자를 보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피고인은 피해자와 다투다 벽으로 떠밀려 머리를 부딪혔으며, 2도 뇌진탕 상태였습니다! 여기 담당의사의 증언서가 있으니 확인해 주십시오. 2도 뇌진탕에 걸리면 약 5분 간의 의식소실과 30분 간의 혼돈상태를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사건 당시 자신의 몸 조차 가누기 어려웠던 피고인이 성인남자인 피해자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쯧쯧... 피해자의 부검결과를 봐라, 나루호도. 피해자는 즉사하지 않았다. 흉기에 찔린 후에도 얼마 간 의식이 남아있었지. 설령 피고인이 사건당시 뇌진탕에 걸린 상태였다 해도, 피해자가 흉기에 찔린 후 피고인을 밀친 거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흉기의 지문이 깨끗하게 닦여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만약 검사측의 주장대로 피고인이 피해자를 찌른 후 벽으로 밀쳐진 것이라면 피고인에게 흉기의 지문을 닦을 겨를은 없었을 것입니다." "피고인은 혼돈상태에서도 50m가량의 거리를 이동했다. 지문을 닦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지. 그리고 피고인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지문을 닦았다는 거냐? 피해자 자신일 리는 없으니, 남는 것은 피고인 뿐이다." "변호측은 사건 당시 현장에 피고인과 피해자를 제외한 제 3자가 존재했음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있겠지? "물론입니다!" 나는 나루호도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그 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마침내 지독한 의심의 눈초리로 부터 벗어나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재판이 끝나던 날 승소한 나루호도와 누명을 벗은 나를 축하해주기 위해 모두가 모였지만, 딱 한 명 사건의 담당검사였던 미츠루기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미츠루기는 본래 습관처럼 무서운 표정을 짓고 내게 쓴소리를 자주 하곤 했지만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마다 도움을 주던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재판이 이뤄지던 지난 한 달 간 나의 머릿속에는 구치소에서 나를 심문하고 법정에서 나를 유죄로 몰아가며 싸우던 미츠루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 되었다. 나는 검사와 용의자로서 미츠루기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마다 늘 비참한 기분을 느꼈고, 서로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는 그를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시 나의 눈에 비치던 미츠루기의 모습은 원래 내가 알고있던 그가 아니었다. 마치 녹지 않는 얼음과 같은, 깨지지 않는 철과 같은 '완벽한 검사'였다. |
<제작> Copyright ⓒ 공갈이 All Rights Reserved. <소스> Copyright ⓒ 카라하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