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근래의 계절 치고 빨래를 말리기 아주 좋은 날이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빨래가 뽀송뽀송하게 마른 것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고 콧노래가 나왔다. 이런 것을 일상속의 소소한 행복이라고 하는 걸까. 나는 두 팔에 한아름 마른 빨래를 안고서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내 팔을 덥썩 붙잡았다. 내가 형제들의 방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안으로 끌려들어간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토도마츠였다. 별다른 일 없이 여유를 즐기고 있던 내가 당황을 한 것은, 그에게 뜻 밖에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 미팅?”

 “응.”

 “전에 얘기했던 아츠시란 사람이랑? 내가?”

 “응.”

 “농담이지?”

 그렇다면 분명 평소처럼 웃으며 능청을 떨었을 텐데, 토도마츠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서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모로 돌릴 뿐이었다.

 “정말 그 사람이 날 만나고 싶대? 다른 여자하고 착각한 거 아니야?”

 “아니야. 전화로 직접 네 얘기를 했어.”

 나는 놀라움과 당혹감 속에서 지난 날의 일을 떠올렸다. 노을이 내려앉은 저녁, 조용하던 마츠노가 앞에서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라 떠들기도 하고, 얼핏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침 현관에 있던 나는 외출했던 누군가 돌아온 것인가 싶어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문 바로 건너편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을 활짝 열자 그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토도마츠의 모습도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어휴, 술냄새!”


 토도마츠가 내 어깨 위로 쓰러지는 순간 나는 그가 대단히 과음을 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술이 세서 좀처럼 취하지 않는 토도마츠치고는 드물게, 그로부터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토도마츠의 무게에 뒤로 넘어질 뻔했다가 겨우 중심을 되찾았다. 그때 내 시야에 낯선 남자의 얼굴이 비추었다. 키가 훤칠할 뿐만 아니라 꽤나 곱상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죄송합니다. 적당히 마신다는 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어서…….”

 “아, 아뇨…….”


 남자는 정중한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핏 피곤해보이기도 하는 것이, 누군가 그 표정을 보면 점잖을 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 남자의 원래 성격이라는 것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아마도 내가 이치마츠를 통해 그러한 표정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치마츠처럼 약간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신지…….”

 “토도마츠군의 친구입니다. 아츠시라고 합니다.”

 “네……. 저는…….”


 나는 그와 가볍게 통성명을 한 뒤 비단이불처럼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토도마츠를 감싸안았다. 내 어깨를 베개 삼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정신차리라는 말을 해보았지만 그는 우웅- 하고 입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1층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카라마츠를 불러서 그에게 토도마츠를 넘겨주었다. 그를 보내고나니 몸무게가 반절은 줄어든 것 같았지만 이마에서 진땀이 났다.

“안에 들어오세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아츠시라고 말한 남자는 굉장히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계속 붙잡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집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네?”


 그로부터 잠시 후. 나는 마침 과자와 함께 먹기 위해 우려놓았던 차를 일회용 컵에 담아 가지고는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츠시군에게 돌아갔다. 밤이 점점 다가오면서 그새 찬 바람이 지나가기라도 했는지, 그의 입주변에 하얗게 김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께서 중국에 출장을 가셨다가 사오신 고산차인데, 추우니까 돌아가는 길에 마시세요. 몸이 따뜻해질 거에요.”

 아츠시군은 반쯤 감겨 있던 눈을 추켜올린 채 나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내가 내민 컵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문득 그의 손이 딱 멈추고,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추졌다. 아직 컵을 건네주지 못한 채였다.

“저…….”

 침묵이 어색함으로 변할 때 즈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얼마 전부터 토도마츠의 형인 쥬시마츠에게 다도를 배우고 있어요. 이번에는 정말 맛있게 우려져서……. 그게…….”

 아츠시군은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 그제서야 무언가로부터 깨어난 듯이 내게 사과하며 컵을 건네받았다.

“죄송합니다. 잠깐 멍해졌었네요.”

 나는 왠지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


 그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멋쩍은 기분이 든 나는 괜스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대로 방향을 틀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 날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해가 안 돼……. 왜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딱히 싫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딱 한 번 봤을 뿐이었지만 그는 좋은 사람 같았다. 단순히 싫다는 이유로, 결코 나 같은 여자에게 거절을 당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내가 ‘않지만……’ 하고 말끝을 흐렸던 것은 설령 토도마츠를 통해서 거절을 하더라도 최대한 정중하게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미팅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지금 딱히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라서…….”

 “그럼 대답은 NO지? 그렇게 전해둘게.”

 “으, 응…….”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났지만 나는 계속 고민을 했다. ‘왜?’라는 의문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여태껏 그런 일을 겪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궁금증들을 풀리지 않은 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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