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른 가자─."
"응, 잠깐만. 거울 한 번만 더 보고." "글쎄 예쁘다니까는─." "됐어. 그럼 가볼까. 후우─…" 커다란 거울 앞에서 쉼호흡을 한 뒤, 쥬시마츠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현관을 나선다. 오늘은 그와 약속했던대로, 형제들의 할아버지께서 운영하고 계시는 화원에 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나름대로 몸단장을 한다고 했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부분은 없는지 계속 불안하고 초조하다. 아무리 쥬시마츠가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둠어주어도 긴장이 되는 것은 별 수 없다. 딱히 내가 마츠노가의 남자와 사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시댁에 처음 방문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 … … "할아버지─! 쥬시마츠 왔어요─!" 입구에서부터 알록달록한 색과 다양한 모양의 꽃과 나무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는 예쁜 가게. 문이 열리고, 청아한 종소리가 울린다. 온갖 철조물로 가득한 도시 한 가운데 이와 같이 향기가 넘치는 장소가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넋을 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천장에 덩굴 째 자라고 있는 마삭줄의 이파리가 얼굴에 닿아 잠시 멈칫 한다. 이미 몇 번이나 한 생각이지만, 정말 아름답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이런, 이런. 큰 소리를 내면 꽃들이 놀란다고 하지 않았니." "아… 맞다. 죄송해요─." 계단 식으로 만들어진 받침대에 나란히 놓인 흰색과 베이지색의 사기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 사이에서 조금 전까지 분재의 가지를 치고 있던 어느 말끔한 용모의 노신사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쥬시마츠를 반겨준다. 자신의 손자에게 향해 있는 따뜻한 눈길은 곧 내게로, 이전과 사뭇 다른 기쁨과 놀라움으로 변한다. "이 예쁜 숙녀 분은 누구니?" "제 친구예요─. 색시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받침대에서부터 바닥까지 늘어져 있는 아이비를 해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 쥬시마츠의 할아버지께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하얗게 샌 머리칼, 세월이 느껴지는 점잖은 얼굴, 그 위에 씌어진 동그란 안경. 그 모든 것에서 중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는 말 그대로 노신사였다. "아, 안녕하세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버렸다고 속으로 탄식하며, 나는 구부렸던 허리를 곧추세우고 키가 훤칠한 노신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도 그의 눈에는 나의 첫인상이 그다지 나쁘게 비치지 않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 피아노 쳐도 되죠─?" "얼마든지."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어색한 분위기를 얼른 무마하려는 듯, 쥬시마츠가 서둘러 가게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나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문턱을 지나자 전혀 다른 공간이 나타나며 시야가 확 트인다. 가게보다 훨씬 높고 넓은 장소.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눈부신 빛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 하얀 그랜드피아노가 보인다. 낮은 두어 개의 계단을 올라, 다양한 꽃과 나무들에 눈을 빼앗긴다. 또다시 넋을 잃고 만 내게, 쥬시마츠가 빨리 오라며 손짓한다. 쥬시마츠에게 다가가 그를 따라서 피아노 앞에 앉는다. 문득 피아노 윗쪽에 펼쳐져 있는 색이 바랜 악보가 눈에 띈다. -Chopin / Nocturne No.02- 아무리 음악에 무지한 나라도 쇼팽의 곡이 얼마나 높은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지는 알고 있다. 쥬시마츠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잘 치시는구나─ 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그 정도가 아닌 것 같다. "저기… 쥬시마츠…" "응─?" "미안한데, 같이 치기로 했던 거 그만두자." "에─. 어째서─?" 내 서툰 연주를 듣고 할아버지께서 웃음을 터뜨리실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건반 위에 손을 올려 둘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옛부터 그랜드피아노에 로망을 가지고 있던 나이기에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는 쥬시마츠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럼─, 특별히 듣고 싶은 곡 있어─?"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쥬시마츠가 좋아하는 곡으로 해줘." "알았어─." 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운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로로 줄을 선 건반을 지휘하듯 연주하기 시작한다. 의외로 슬픈 선율이라고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 온화한 가락 안에서도 밝은 기운, 따뜻한 기운 등의 다향한 힘이 느껴진다. 비록 악기를 연주하는 능력은 없지만,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고 무언가를 그릴 수 있는 감수성이 자신에게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 … 템포가 점점 느려짐과 동시에 클라이막스를 화려하게 뽐내던 멜로디가 잔잔한 여운으로 바뀐다. 연주가 끝나자 마자 쥬시마츠가 고개를 확 들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별안간 뒷통수를 긁적이며 몇 번인가 음이탈을 해버렸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어느 부분이 잘못 됐던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내게는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연주였다. "그동안 좀처럼 피아노 앞에 앉질 않더니, 안 하던 실수를 다 하는구나." 쥬시마츠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 그의 연주를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흘러내린 안경을 끌어올리며 나지막이 말씀하신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쥬시마츠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사람은 아무래도 할아버지이신 것 같다. "천 번도 더 친 곡이라 괜찮을 줄 알았어요─… 하하핫─." "그래도 오랜만에 웃으며 연주하는 너를 봐서 할아버지는 기쁘단다." "이제 괜찮아요─. 어떤 일도 금방 털고 일어나는 게 제 장점이잖아요─." "?" 다정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제 괜찮다니, 그게 무슨 의미일까. 혹시 쥬시마츠의 마음에 내가 모르는 상처가 있는 걸까. 그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 쯤은 그런 상처를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이 쓰인다. … … … 할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물망초 화분을 소중히 끌어안고, 저녁 노을이 은은하게 비추는 인도 위를 걷는다. 쥬시마츠는 휘적휘적 두 팔을 저으며 다소 산만한 발걸음으로 내 앞을 걷고 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러나 아까부터 그다지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생각이 많은 것 같다. "쥬시마츠." "응─?" 늘 그렇듯, 그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천진난만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또다른 그가 있음을 알고 있다. 밝고 명랑한 성격은 쥬시마츠라는 남자를 화려하게 꾸며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 뿐이다. 그의 내면에는 이 물망초처럼 소박하고, 가녀린 구석이 있다. 아까 들었던 대화가 줄곧 신경 쓰였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쥬시마츠가 홀로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어째서 한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던 거야? 무슨 이유라도…" "지극히 평범한 실연의 아픔이야─." 첫사랑이란 지극히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것이었던가. 확실히 그것은 홍역처럼 살아가면서 한 번씩 치르게 되는 병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니까.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나한테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일이었거든─. 가사가 없는 멜로디는 자신과 꽃 외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니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잖아─. 그러다보니 어느새 건반에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우울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더라고─. 이럴 바에는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어─." "오늘은 싫은데 억지로 친 거야? 나 때문에…" "아니─, 정말 즐거웠어─. 오랜만에─."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된다. "고마워─." "나야 말로…" 남들과 다름없이 아픔을 느끼면서, 언제나 웃는 얼굴만을 보여줘서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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