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그다지 노을을 보지 못했었는데, 일본으로 건너온 이래 이곳에서는 하늘에 불을 붙여놓은 것 같은 황혼의 태양을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고운 해질녘에 길가를 걷고 있어도 이제는 그 아름다움이 시덥잖게 느껴질 만큼.

 일본(日本)에서 태양이 지는 것을 본다라.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한 머리를 쓸데없는 농담으로 채우며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입안을 씁쓸하게 만드는 한숨을 애써 목으로 넘긴다. 그러나 고목에 붙은 매미와 하천의 개구리가 소리를 높이면, 노력이 무상하게도 다시 마음이 심난해진다.

 터덜터덜, 시곗바늘이 남서쪽을 가리키는 늦은 시간까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쥬시마츠를 찾아 홀로 길을 걷다가, 어느덧 (마츠노가의)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화원에 도착했다.

 "실례합니다."

 청아한 종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퍼지자, 선반의 화분을 정리하고 있던 노신사가 허리를 펴고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 미간으로 끌어올리며 마치 손님을 대하듯이 내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녁이 되어도 쥬시마츠가 돌아오지 않아서 혹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자신이 아직 일본어에 서툴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행여 높임법을 틀릴까봐 조마조마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지나친 걱정이라는 것은 알고있습니다만…"

 철없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는 아내라도 되는 양 모습을 나타낸 내가 어르신의 눈에 좋게 보일 리 만무. 그러나 다행히도 노신사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안쪽에 있으니 가보려무나."

 "감사합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서 화원 안으로 들어간 나는 넝쿨이 휘감고 있는 그랜드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흑과 백의 화려한 건반 위에 엎드린 채 잠이 든 쥬시마츠에게 다가서니, 눈송이처럼 피어난 재스민의 꽃내음 사이로 짙은 술냄새가 풍겨왔다.

 "쥬시마츠─."

 잠든 남자의 어깨를 흔들다 문득 붉은 입술사이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에 주춤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과감히 손을 뻗었다.

 "쥬시마츠─."

 이윽고 나른한 눈덩이를 부비적거리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그가 아직 몽롱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가지고 있는 꽃이 여기에 있네─."

 농담이었든 주정이었든, 나는 그의 말을 듣고서 가슴이 묘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온기가 내게 남자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지게 하고, 애정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고, 내 목소리를 온화하게 만들었다.

 "그만 집에 돌아가자. 늦었어."

 "기다려 봐. 나… 이 꽃 하고도 얘기할 거야─."

 쥬시마츠가 피아노를 치는 이유는 꽃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문득 지난번 그와 함께 가게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그의 연주중 가장 인상깊었던 가락이 떠올랐다. 아주 슬픈, 하지만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이 느껴지는, 마치 쥬시마츠의 첫사랑과도 같은 멜로디.

 "똑똑─." 그는 손을 가볍게 움켜쥐고서 내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렸다.

 "거기 계세요─?" 가슴에 귀를 대고 묻는 그에게, 나는 언제나와 같이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누구세요?" 어린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듯이,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서.

 "쥬시마츠라고 합니다─."

 최근 내게 그런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쥬시마츠 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어른이 되면서 완전히 능구렁이처럼 변해서 언제나 내 머릿꼭대기에 있고, 그 밖의 다른 형제들도 내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를 해댈 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쥬시마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더이상 자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요…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쥬시마츠가 내 두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들여보내주세요─."

 "……."

 내가 뜸을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쥬시마츠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 손이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대답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들어오세요."

 이윽고 쥬시마츠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좁은 곳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그 말을 했을 때는 그의 눈이 사뭇 다른 감정을 띠고 있었다.

 덥썩─. 약해졌던 힘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두 팔을 죄어오는가하면, 그가 나를 홱 끌어당겨 내게 키스를 했다. 평소에 장난처럼 하는 그런 키스가 아닌, 입술이 스칠 때 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아찔할 정도의 달콤한 기분이 느껴지는, 매우 성숙하고도 야릇한 키스였다.

 "하─…"

 그는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는 아직이라는 듯이 내 목에 팔을 두르고 크고 거친 손으로 나의 뒤통수를 감쌌다. 이번에는 입술이 포개질 뿐만 아니라 그 사이로 매끄러운 혀가 들어왔다. 그의 손은 곱게 뻗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가 붉은 스카프에 잠시 머무르다가 이내 멀어졌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모든 게 뜨거워… 너무 뜨거워서 머리가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아."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쥬시마츠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불안정하게 떨리던 내 마음도 곧 가라앉고, 짧지만 달콤했던 화원에서의 일화는 두 사람의 영원한 비밀이 되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네가 데리러와줘서 정말 기뻐─."

 나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는 쥬시마츠의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이 그저 못된 장난이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는 길에 치비타네서 뭐좀 먹고 갈까─?"

 "응."

 어쩌면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쥬시마츠와 나는 이렇게 여전히. . . .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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