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세탁, 그 밖의 집안일은 다 했다. 어제 장을 봐놔서 냉장고도 꽉 차 있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한가로운 시간 뿐인데, 이렇다할 일이 없다는 것이 내 기분을 조금 우울하게 만든다. 오늘따라 유독 조용한 집에는 이치마츠만이 남아 있다. 아까부터 혼자 방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재밌는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나는 미리 말도 하지 않고 형제들 방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이치마츠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의 머리맡에 다소 낡은 느낌의 종이가 몇 장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편지인 것 같았다.
이치마츠에게.

 하고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는데 막상 펜을 잡으니 어떤 말부터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 잘 지내고 있어? 학교 생활은 어때? 혹시 얼굴이 수척해지지는 않았어? 너는 점심을 먹는 대신 잠을 자는 걸 선택할 때가 많으니까 걱정 돼. 난 어제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 다녀왔어.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 내가 있는 베네치아는 지금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있어. 어젯밤에 잠깐 산책을 나갔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옷이 다 젖어버렸지 뭐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일본이었다면 분명 이치마츠가 우산을 씌워줬을 텐데. 너는 내가 비 때문에 곤란해 하고 있을 때마다 언제나 어딘가에서 나타나서 날 도와줬지. 처음 몇 번은 깜짝 놀랐지만 조금씩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어. 이치마츠가 나를 소중히 하고, 언제나 지켜주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나도 깨달았어. 일주일 동안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 그립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치마츠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소중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너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줄곧 너를 좋아했고,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 더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까. 좋아해, 이치마츠. 정말 보고싶어.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여기 있어야 하는 걸까? 지금으로써는 1주가 될지, 2주가 될지 알 수 없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될 때까지 내가 쓸쓸하지 않도록 소식을 전해줘. 답장 기다리고 있을게.

 아즈사가.


 …

 …

 조용히 숨을 내쉬며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작고 아담한 여자아이의 글씨. 내가 쓴 편지가 아닌데도 어째서인가 가슴이 뭉클해진다. 대체 누가 이런 절절한 편지를 보낸 것일까. 문득 이치마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또다른 편지가 눈에 띈다. 그가 깨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그것은 이치마츠의 글씨체였다. 몰래 훔쳐보는 것은 좋지 않지만 앞서 그런 내용의 편지를 읽었기 때문인지 좀처럼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비도 내리지 않고, 이곳의 하늘은 매일매일이 맑아.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선생님에게 혼나고… 예전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아. 네가 없다는 것만 빼고. 얼마 전에 수학테스트가 있었는데, 스스로도 놀랐을 정도로 점수가 많이 올랐어. 수업에 집중하고 열심히 했더니, 정말 네 말대로 되더라. 솔직히 말해서 학교에 있을 때는 이리저리 신경쓸 것이 많아서 널 생각할 여유가 없어. 그래서 혼자 남았을 때 그렇게 네가 보고싶은 건가봐. 이곳의 생활이 그립다면 빨리 돌아와. 모두 널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제발 일기예보 좀 보고 다녀. 낯선 곳에서 감기까지 걸려서 더 고생하지 말고. 이탈리아는 치안이 별로 좋지 않다던데 밤에 산책은 왜 해? 설마 혼자 나간 거야? 그런다고 시간이 빨리 가는 거 아니니까 방에 얌전히 있어. 돌아오면 또 게임센터에 같이 가줄게. 지난번에 귀엽다고 했던 고양이마스코트 갖게 해줄 테니까 눈물이 날 것 같다던가 그런 생각은 이제 하지 마. 길고양이들도 나 혼자서 잘 돌보고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모두 건강하고, 여전히 귀여워. 다만 마롱이가 최근 밥을 안 먹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계속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울기만 해. 이제와서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걸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흐릿해서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었어. 위에서 말했듯이, 나에게 달라진 건 네가 없다는 것 뿐이야. 어쩌면 내가 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야. 돌아오는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줘. 카라마츠가 안부 전해달래. 그럼 이만 줄일게.


 …

 …

 무의식중에 작게 한숨을 내쉰다. 하아……. 이것은 탄식이 아닌, 타인의 가슴 마저 묘한 그리움으로 젖어들게 만드는 두 사람의 추억에 대한 감탄사이다. 그 소리에 이치마츠가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아차, 아직 편지를 책상 위에 돌려놓지 않았다. 이치마츠가 몽롱함을 떨쳐내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응시한다. 허락도 없이 읽어버렸으니 분명 화를 내겠지. 가족이나 친구에게 쓴 편지도 아니고 연애편지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에게 보여주어도 별로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딱히 부끄러운 내용도 아니고, 서로의 진심이 담긴 감동적인 편지다. 잘못을 저질러놓고서 뻔뻔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중학교시절에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다면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치마츠는 평소 말수가 별로 없지만 일단 입을 열면 화법이 꽤나 고상한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명하지만 무게가 실린 느낌이랄까. 이 편지가 그 느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누가 멋대로 읽으래?"

 "아니, 그게… 참 잘 쓴 편지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

 "나한테 글을 보는 눈 같은 건 없지만… 마음이 따뜻해진달까… 나는 편지든 소설이든 글을 쓸 때 자신의 감정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이치마츠는 나랑 정반대인 것 같아. 어떡하면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하면서 자기 감정을 전달할 수가 있지? 이치마츠답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대단…"

 덥썩─.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이치마츠가 돌연 내 팔을 붙잡았다. 그는 이리 내, 하고 편지를 거두어 서로 다른 종류의 종이가 가득 담겨 있는 상자 안에 넣고 덮개를 닫았다.

 "미안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자를 선반 위로 돌려놓은 그는 나를 슥 돌아보는 듯하다가도 차갑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지나쳐서 방을 나가버렸다.

 화를 낼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이치마츠의 반응을 보니, 내가 그에게 생각보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아서 죄책감이 밀려온다. 나중에 한 번 더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그런데 이치마츠는 왜 답장을 쓰고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던 것일까? 본인에게 물어봐도 화만 돋우게 될 테니 지금은 모르는 채로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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