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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나 같은 하늘 아래서 추억을 먹고 산다.
따스한 햇살도, 분홍색의 벚꽃이 화려하게 소용돌이치는 향긋한 바람도,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도 모두 그대로.
이렇듯, 이따금씩 추억이 현실로써 되살아날 때면, 소녀는 마음이 그리움으로 촉촉하게 젖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꼭 돌아올게.' 철이 없던 시절 마음가는대로 펜을 끄적여가며 맺은 덧없는 약속.
어쩌면 소년은 진작에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기억속의 그 약속.
우리의 삶이 꽃처럼 시들어버리기 전에, 낙엽처럼 메말라 흙이 되어버리기 전에.
어느순간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젊은날의 게으름을 후회하지 않도록.
소녀는 기억을 더듬어 마을로 돌아왔다.
…
…
…
"저기, 실례합니다. 松野(마츠노)가를 찾고 있는데요.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
한손에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다른 한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넣은 청년은 보라색 후드티 안으로 훤히 드러난 쇄골을 긁적거리며 소녀의 얼굴을 멀뚱이 바라보았다.
"제가 그곳에 살고있는 마츠노입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
소녀는 당황했다. 확실히 그녀의 앞에 서있는 청년은 어린 소년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의 목소리나 말투, 분위기 등이 자신의 기억과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10년이란 세월동안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
그녀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있는 동안 바깥세상에서는 몇 번의 바람이 불고, 몇 번의 비가 내리고, 몇 번의 풍파가 일어났다.
'시간이 멈춰있다' 그것은 삶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낸 자신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혹시 오소마츠?"
"아뇨… 저는 이치마츠입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형제들중에서 낯가림이 가장 심한 그 이치마츠?"
"하?"
비디오의 필름을 확 잡아당기듯이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지나간 기억.
오소마츠가 언제나 해맑은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그의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
어두운 장막으로 뒤덮인 익숙하고도 낯선 땅 위에서 한참을 헤메이던 소녀는 비로소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소마츠의 친구인 (y/n)라고 합니다. 전부터 만나뵙고 싶었어요, 이치마츠씨."
"(y/n)? 아아─. 어렸을 때 형을 버리고 한국에 가버린 그 나쁜년."
"네?"
"아뇨, 아무것도."
소녀는 찰나의 순간에 자신을 비꼬는 말을 확실하게 들었지만 차마 변명을 하지 못하고 머쓱함에 뒷덜미를 긁적였다.
아무리 편지를 남기고 갔다지만 전부 한글로 적어놓은 것을 어린 오소마츠가 읽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어쩌면 평범한 메모나 쓰레기인 줄 알고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놓고 그의 형제에게 염치도 없이 친절함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긴 왜 왔어요?"
"그게…"
"형을 만나고나면 또 한국으로 돌아갈 거죠?"
"네, 네……."
"그럼 괜히 상처 덧나게 하지 말고 돌아가요."
"하지만 당분간은 계속 일본에 머물러 있을 거예요. 이 근처에 방을 구해놨거든요. 그래서…"
소녀는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어 이치마츠에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일본에 도착한 뒤 줄곧 머물고 있는, 그녀의 집이 표시되어 있는 약도였다.
"얼굴만이라도 보게 도와주세요. 다시 친구가 되어달라던가…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때 날카롭기 이를 데 없던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돌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부탁하시죠."
소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당신이 부탁하지 않으면… 보나마나, 그 바보가 당신에게 부탁할 테니까. 그건 불공평하니까. 먼저 부탁하라고요."
"……."
빛바랜 캔버스 위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알록달록한 물감이 한데 어울려 번져나가며 예쁜 꽃을 피운다.
소녀가 기억하는 오소마츠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으면서도 겉으로는 짓궂은 장난을 치는 천역덕꾸러기소년이었다.
만약 어린시절 안타깝게 헤어진 친구가 10여년만에 다시 나타나서 능청스레 웃어보인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의 형제인 이치마츠의 말대로, 그는 분명 그 사람을 다시 친구로 받아들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소녀는 손에 쥐고있던 약도를 가방 안에 되돌려놓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마츠는 지금 어딨나요?"
그녀가 묻자, 이치마츠는 말없이 옆으로 비켜서서 턱으로 자신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아니나다를까 지평선너머로 누군가 그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흰색 티셔츠에 허리까지 올려입은 붉은 점프슈트 차림의 남자였다.
…
…
…
"어─이. 이치마츠, 아까 깜빡했던 두부 사왔어."
"……."
절벽 아래의 파도처럼 가슴이 요동칠 만큼, 남자는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능청스러운 말투도, 특유의 분위기도 소녀가 가진 기억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오소마츠임에 틀림없었다.
…
…
…
"이 귀여운 아가씨는 누구야? 이치마츠의 그녀?"
"아니야. 잘 봐, 멍청아."
"응?"
오소마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전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소녀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았다.
검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적당한 키, 평범한 옷차림, 목에 붉은색의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20대 중반의 오메가.
그는 한동안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개의 감정이 서로 부딪히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소마츠."
마침내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오소마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는 가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고, 머지않아 그것이 짙은 그리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어째서… 여기에……."
"약속했잖아… 다시 오겠다고."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던 오소마츠는 끝내 슬픔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줄곧 그리워했던 소녀를 품에 안았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소녀가 그의 가슴팍에 코를 부딪힐 정도였다. 어깨가 으스러지도록 그녀의 몸을 조여오는 그 힘이 마치 수많은 말을 대신해 지난 날에 대한 원망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침묵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이치마츠가 탄식을 내뱉으며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차마 다른 것들을 신경쓰지 못했다.
"이치마츠형─! 식료품공장에 갔다온 거야? 왜 이렇게 늦어?"
저 멀리 건물이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길목에서 네 명의 남자가 두사람을 향해 걸어온다.
먼저 길을 가고 있던 이치마츠는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꺼내 조용히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언제나 힘없이 반쯤 감겨 있는 그의 두 눈이 그날따라 아주 많은 말들을 하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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