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흐릿했던 영상이 점점 선명해지는가하면, 어딘가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내가 대학생 때 겪었던 일이다. 학과 모임이 있던 날, 술을 잘 마시지 못했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자리를 떴다. 다른 과에서도 나온 것인지, 거리에는 나와 같은 학생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을 빠져나가던 중 두 명의 남학생에게 붙잡혔다. 캠퍼스 내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여느 불량배들처럼 나를 어딘가로 끌고가려 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그 골목 만큼은 인적이 상당히 드물었기에 아무리 도와달라고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는 행여나 험한 짓을 당할까 두려워 그것 조차 하지 못했다. 어지간히 술에 취한 듯, 나를 다루는 남자들의 손길이 점점 거칠어져갔다.

 그때, 건너편의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말야, 경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면서 뭐하는 짓이야? 부끄럽지도 않아?”

 목소리의 정체가 가로등의 불빛 아래로 들어섰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오소마츠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따금씩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당시의 오소마츠는 아직 학생이었으니, 그에게 나를 도와줄 의무 같은 것은 없었다.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대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곤란에 처한 나를 외면하지 않았고, 남자들이 나를 놓아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단지 그가 옳은 말을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남자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생각해보면 당시에 오소마츠가 과대표를 맡고 있었으니, 행여 그가 담당교수에게 그 일을 알리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안, 우리 애들이 장난이 좀 심했지? 원래 좋은 녀석들인데, 오늘은 술이 과했나 봐. 나중에 내가 단단히 주의해둘게. 아까 일은 잊어줄 수 없을까?”

 “오소마츠가 도와줬으니까, 널 봐서 잊어줄게.”

 “고마워─.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지─? 혹시 모르니까 역 앞에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은데…….”

 그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역에 도착할 때까지 오소마츠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일이 훗날 우리에게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로부터 1년 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연인이라고 해도 내가 입학을 늦게 한 탓에 동갑인 오소마츠는 나보다 한 학년이 높았고, 그가 졸업을 하면서 그다지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여느 친구들보다 뜨거운 연애를 했다. 만날 때 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져서, 서로에게 질린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한 번도 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오소마츠도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 믿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 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음…….”

 문득 차가운 공기가 내 몸을 흔들어 깨웠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소마츠…….”

 잠시나마 그와 함께 지냈던 방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기에, 금속으로 지어진 천장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이슨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깨어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기 싫다는 거 알아. 싫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현실이 뭐가 그리 좋아? 돌아간다고 해도 너는 계속 너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일들과 마주하게 될 뿐이야. 주변이 온통 위험으로 가득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도 이곳과 전혀 다를 바 없어.”

 나는 침묵속에서 제이슨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

 제이슨은 실소를 내뱉었다.

 “사랑인지 뭔지 대단한 듯이 말하지만 그런 건 가운데 블록을 하나씩 빼기 시작하면 금방 무너져내리는 모형탑이나 마찬가지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어지지 못하고 갑자기 찾아온 가슴의 통증과 함께 내 안에 가라앉았다. 그러자 제이슨이 말을 이었다.

 “너무 시시해서 농담거리도 되지 않아. 만약 그게 널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넌 지금 속고 있는…….”

 그때, 마치 천둥이 내리치듯이 무언가 내 시야에서 번쩍하고 빛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제이슨의 두꺼운 마스크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마스크속에서 새빨간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줄기, 두 줄기, 세 줄기……. 겉잡을 수 없이 쏟아졌고, 제이슨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제, 제이슨……?”

 그는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다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내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뒤로 제이슨은 나를 속박해두지 않았고, 자신으로부터 그의 몸을 만지면 안 되는 것이 우리 사이에 정해져 있는 규칙이었지만 나는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를 걱정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없을 때 자신이 놓이게 될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겠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제이슨은 시트 위에 팔을 딛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문득 마스크 안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방 먹은 것 같아.”

 “누, 누구에게?”

 “네 애인.”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래, 내가 틀렸다. 농담도 안 된다는 말은 취소할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이슨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이 왔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 이건 내 악몽이잖아.”

 내가 물었다.

 “아니, ‘내’ 악몽이지. 넌 그걸 보고 있을 뿐이고.”

 그는 걸음을 멈추고서 내게 등을 보인 채 대답하고는 난로에 세워두었던 칼을 손에 쥐었다.

 “너를 데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녀석을 불렀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꿈 밖으로 나갈 수 없잖아.”

 나갈 수 없으니까 불렀다……? 그 순간 나는 불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기다려, 오소마츠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찾아내서 죽여야지. 당연한 걸 왜 물어?”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지고, 나의 불안함은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만둬, 그를 다치게 하지 마!”

 “녀석이 내게 도발을 해왔어. 왜 내가 참아야 하지?”

 “부탁할게…….”

 “부탁?”

 나는 그 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만약 제이슨의 말대로 그것이 ‘그의 악몽’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지 않을까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가 제이슨을 멈춰세운 것은 생각보다 앞선 행동이었고,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달리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맞아. 서두를 필요는 없지.”

 다행히 제이슨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칼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보복을 하는 데 굳이 힘을 쓸 필요도 없어.”

 그는 칼을 바닥에 내던진 뒤 돌아서서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녀석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여기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수납장을 덮는 작은 천을 가지고서 침대에 올랐다. 그의 손이 뺨에 닿아오는 순간 나는 움찔- 하고 어깨에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를 피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시트 위로 쓰러졌다. 제이슨은 내게 올라타서 작은 천으로 내 눈을 가렸다. 뚝, 뚝. 그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슴 위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와 맞닿은 감각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만 했다.

 제이슨은 얼굴에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내 목에 키스를 했다. 한 번 강제로 안겼던 적이 있었지만 키스는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강제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때처럼 온몸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 대신 아픔으로 가릴 수 없는 큰 수치심이 나를 괴롭게 했다. 아마도 제이슨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악몽은 모든 것이 미쳐 있어……. 그래, 미친 정도가 딱 좋아…….”

 “왜냐면…… 널 가둔 내 마음도 진작에 미쳐 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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