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교정의 근처에 있는 까페. 건물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을 애워싸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유독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몇몇은 불이 난 건물의 직원들 같았다. 그들의 대화로부터 얼핏 ‘아직 안에 사람이 있어’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하며 생각보다 늦어지는 소방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단지 그 뿐, 누구도 위험을 무릅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넌 여기 있어.” “나도 갈래.” “안 돼, 위험해.” 오소마츠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날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나 때문에 나오지 않는 거라고.”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잖아.”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오소마츠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가려는 거야.” 나는 두 손을 꽉 쥐고서 건물로 향했다. 그런 내 앞으로 오소마츠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나를 지나쳐갔다. 주변의 사람들이 위험하다며 소리쳤지만 우리는 묵묵히 안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고, 검은 연기가 쏟아져나오는 입구를 지나 까페 내부에 들어섰다. 벽과 천장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오소마츠의 팔이 몸을 감싸오는가 하면 그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곧바로 불타는 잔해가 떨어졌다. 그로부터 몇 번이나 나는 오소마츠의 도움을 받아가며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아갔다. 그리고 이치마츠를 발견했다. “이치마츠!” 그는 작은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자. 여긴 위험해.”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자 아무런 미동이 없던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날 내버려둬.”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위를 향하고 있었다. “주변을 봐, 불이 근처까지 왔어.” “알고 있어.”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난 나가지 않을 거야.” “어째서?” “아까 문자를 받았어. 여기서 기다리라고. 나중에 왜 자리에 없었냐는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건물 전체가 곧 잿더미로 변할 거고, 넌 죽게 될 거야! 그럼 두 번 다시 못 만난다고!”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이치마츠의 팔을 안고서 그를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딱히 힘을 주고 버티는 게 아닌데, 어째서인지 그의 몸이 동상처럼 딱딱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만나지 못해도 상관없어. 설령 그녀가 나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해도 나는 아직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과 한 약속은 지키는 게 당연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이윽고 오소마츠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해.”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그런 내 팔을 붙잡았다. “널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잖아.” “놔!” 그의 손은 더 이상 날 놓아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어. 이대로는 우리도 위험해. 얼른 끝내고 나가자.” “윽…….” 나는 오소마츠에 의해 잡아당겨져 손에 꼭 쥐고 있던 옷깃을 놓쳤고, 그대로 소리쳤다. “이치마츠! 나야! 내가 왔어! 여기 봐!” “…….” “이치마츠─!” 마침내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며 여기저기서 크고, 거칠고, 날카로운 잔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크큭…….” 그 사이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웃겨서 못 봐주겠네. 이제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의 등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고, 주변의 불꽃이 그 가장자리에 선명한 붉은 색을 그리고 있었다. “난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있는 게 없는 것만 못하다는 주의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치마츠는 천천히 일어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너의 갖잖은 동정 따위, 더는 필요 없어.” 그 말을 신호탄으로, 또다시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전보다 더욱 강한 그 힘에 주변의 불꽃이 갈라지고, 찢겨졌다. 이치마츠는 그 소란 속에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돌연 커다란 그림자가 그의 등으로부터 뻗쳐나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는 자신의 눈동자를 모두 갉아먹을 듯한 날카로운 잔해들로인해 질끈 감았던 눈을 떴고, 그것이 그림자가 아닌 날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심해, 너를 불에 타서 죽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아는데, 그거 무지 아프거든.” 이치마츠로부터 흘러나오는 위험이 고요하면서도 두려울정도로 빠르게 주변의 공기를 잠식시켰다. 그의 목소리도, 그 무거운 공기와 함께 바닥으로 내려앉아 갈라지고 거칠게 들려왔다. “허세 집어치워. 더 이상 널 보호해줄 육체는 없고, 이대로 퇴마되면 앞으로 영원히 회생하지 못해.” 오소마츠가 말하자, 이치마츠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너, 이 뻔뻔한 자식! 잘도 지금까지 숨겨왔구나. 처음부터 수상쩍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는 오소마츠를 노려보며 또 말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했던 거였나? 보나마나 위에서 시덥잖은 명령을 받고 왔겠지?” 그 물음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소마츠, 이치마츠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번에는 내가 물었지만, 여전히 그는 입을 다문 채였다. “너도 참 가엾게 됐어. 터무니 없는 것들로부터 사랑받게 되어서 말야.” 이치마츠는 말을 이었다. “내 말 똑똑이 잘 들어. 네 애인은 너와 달라. 나와도 다르지. 녀석은…….” 그때, 오소마츠가 이치마츠의 말을 가로막듯이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이치마츠가 말했다. “뭐해? 안 쏴?” 오소마츠는 대답을 하지 않고 총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어차피 그게 네가 받은 명령일 거 아냐, 나를 죽이는 거. 이제 그만 임무를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야지. 구름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천사답게.” 이치마츠가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난 천사가 아냐!” 그는 뜸을 들이며 시선을 모로 돌렸다. “……이제 곧 아니게 될 거야.” “그게 뭔 빌어먹을 소리야?” “아버지와 약속했어. 이번 임무만 수행하면 인간이 되게 해주겠다고. 그러면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나를 숨기지 않아도 돼. 난 너와 달라. 누구도 죽이지 않고, 다치게 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부여받을 수 있어. 그녀와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고.” 이윽고 이치마츠가 입꼬리를 휘어뜨리며 웃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그리고 그는 말했다. “위에 사는 녀석들은 불만 따위 가질래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곳에서는 행복이 부족했나?”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나도 그리 녹녹치만은 않았어. 무엇보다…….” 오소마츠는 말끝을 흐렸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슬프고도 안타까운 감정을 띠고 있었으나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난 반드시 인간이 되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 너를 쓰러뜨리고, 임무를 완수할 거야.” “어라, 조금 전에 누구도 죽이지 않고,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죄없는 인간을 19명이나 죽인 너에게 변명의 여지 따윈 없어. 하늘의 처벌이 남아 있을 뿐이야.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고문을 해도 시원찮지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에 참는 거야. 고통없이 가는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치마츠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의자를 테이블에 집어넣고서 그 방향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새카만 잔해가 그의 발에 밟혀 부숴졌다. “재판 없이 바로 사형인가? 아쉽네, 꼭 벌을 받아야만 한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도 천계에 발을 들여보고 싶었는데. 그곳에 가면 난 신의 앞에서 당당히 이렇게 물을 거야. 왜 당신은 죄없는 인간에게 벌을 내려도 되고, 나는 안 되는지.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태어나자마자 벌을 받았잖아, 망할 하늘로부터.” 그는 고개를 살며시 뒤로 젖히며 실소를 터뜨렸다. 문득 그의 시선이 커다란 쇼윈도 너머의 하늘로 향하는 듯했다. 매마른 하늘은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맑았고, 불타오르는 처참한 광경의 건물 내부와 상당히 대조되어 보였다. “인간이 되게 해주기로 약속을 했다고? 신은 여전히 편애가 심하네. 그렇게 간단히 허락해줄 것이라면, 어째서 내 기도는 듣지 않았던 거야? 내가 어떻게 해야 했던 거야?” 그는 오소마츠를 홱 돌아보았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어.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고, 상처입히고, 그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그가 소리치자, 오소마츠가 말했다. “그래서 너는 끝까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단 거야? 잘 봐, 네가 그녀에게 한 짓을 보라고.” “…….” 이치마츠는 그 눈빛에 날카로움을 띠었다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말 한 번 잘 했어.” 하지만 이번의 웃음은 이전과 사뭇 다른, 그의 무거운 마음을 내비추고 있었다. “계속 평범하게 살았다면 행복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상처입히고, 상처입혀서, 결국에는 그녀를 망가뜨렸지.” 아니나 다를까, 웃음은 곧 사라지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뜨려졌다. “있잖아, 기왕 상처투성이가 된 것, 차라리 그대로 커다란 흉터가 되어 버려. 흉터가 되어서, 내 일부가 되어. 그럼 적어도 아픔은 내 몫이 될 테니까.” 그가 나지막이 말하며 나를 향해 손을 뻗자, 갑자기 가슴에서 살갗을 지지는 듯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나는 아픔을 호소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윽고 나의 가슴 위에 붉은 상처로 20/20이라는 숫자가 새겨졌다. 이치마츠는 손을 거두고 오소마츠를 보며 씨익 웃더니 그에게 말했다. “자, 천사님. 누구의 날개가 더 큰지 한 번 볼까?” 폭풍이 지나가는 듯한 강한 바람. 그 힘에 의해 모든 꿈의 형상이 깨지고, 부숴지고, 마치 피를 흘리듯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마치 빛이 사라진 장소를 집어삼키는 어둠처럼, 이치마츠의 검은 날개가 무거운 대기를 찢으며 거칠게 뻗어나갔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소란이 잦아들어 있었고, 마치 눈 내리는 밤처럼 고요했다. 주변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이치마츠의 모습만이 보였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그는 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내가 아닌 허공을 향해 있었다. 딱히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상처의 통증과 함께,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어렸을 때 난 언제나 꿈을 꿨어. 가족에게, 연인에게 사랑받는 꿈. 하지만 그건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구덩이속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어.” “난 나의 주인에게 빌고, 또 빌었어. 구덩이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하겠다고.”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바람을 이뤄주는 대신, 그는 내게 아주 간단한 일을 해달라고 했어. 20명의 인간을 죽이는 일.” “처음에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용기가 나지 않더라. 시간이 지날 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썩어가고, 저 밑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어. 돌아와, 돌아와, 하고. 그래서 결국 난…….”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문득 애처롭게 들려와, 내 가슴에도 물결이 일었다. “나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어. 싫어도 하는 수밖에 없었지.” 이치마츠는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을 아래로 내렸다. “우리가 11살이었을 때, 너를 괴롭혔었던 남자아이가 있었잖아. 기억나? 그는 학교 아이들에게 너에 대한 악담을 퍼뜨려서 널 외톨이로 만들려고 했어. 난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고, 할 수만 있다면 널 지켜주고 싶었어……. 그래서 녀석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서 죽였어. 그게 첫번째 살인이었지.” 그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고 해도, 두 번째부터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아. 나도 점점 망설임이 없어졌어.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단 걸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어.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이 가르치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당시의 나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는 걸.” 나는 지난 날 그에게 들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가끔은 나도 내가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 말은, 나로 하여금 상당히 우울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이치마츠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서, 그것이 그 자신에게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그의 어둡고 흐릿한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몸이 성장하면서 난 어떻게 하면 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 어떻게 하면 가족에게, 연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내게도 가족이 있었지만 그건 내가 선택한 가족이 아니잖아. 내가 선택한 가족, 답은 그거였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가족이 되면 돼. 그래서 너에게 집착했던 거야.”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이치마츠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자신이 몰랐던 그의 이야기가 그토록 많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치마츠가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일까. 어느 쪽도 가슴이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너의 주변에 다른 남자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녀석이 나타났을 땐, 마치 내 꿈을 잃어 버린 것 같았어. 그날도 난 불과 연기 따위에 죽은 게 아냐.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널 붙잡지 못하는 나, 녀석에게 이길 수 없는 나였어. 난 자신이 미워. 네가 아니라.”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은 말야, 삶을 다시 돌려받으면, 그래서 악몽에서 깨어나면, 너와 행복해지고 싶었어…….” 그의 시선이 비로소 내게로 향하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알고 있어. 널 잃었던 그 순간부터 내게는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은 여전히 안개처럼 흐릿했다. 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 마치 점점 멀어져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미련도 없어.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는데, 그걸 하나도 못 해줘서…….” 그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몰라. 신이 미워하는 나를 누가 사랑하겠어? 너도 앞으로 계속 날 미워해. 죽을 때까지 내가 너에게 한 짓을 잊지 마. 그렇게 해준다면 난……” 그리고 “난…….” 유리가 바람에 부딪혀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온갖 소란이 두 사람을 애워싸기 시작했다. 주변의 하얀 심연이 무너져내렸고, 이치마츠의 몸이 새카만 연기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나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는 높은 하늘과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광월한 갈대밭이었다. 내 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갈대들 사이, 커다란 바위 위에 눕혀져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꿈만 같은 굉장한 광경이었다. 다만 어둠과 두려움, 아픔 등이 없을 뿐이었다. 나는 그러한 편안함으로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거든.”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천사의 날개가 나의 시선을 이끌었다. 날개는 강한 바람과 함께 펼쳐졌다가 다시 곧게 접히더니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높은 갈대 사이로 오소마츠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이고 서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 형제들과 신나게 뛰어놀다보면 곧 내 머릿속에서 떠나갔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목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난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 천사의 언어를 말이야.” 문득 바람이 불어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갈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는 왠지 모르게 쓸쓸하게 들려왔다. “그들이 내게 가르쳐준 건 어렸던 나에게 너무나도 무섭고 충격적인 사실이었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선과 악을 지니게 되는데, 가끔 여럿에게 주어져야 할 악이 어느 하나에게 전부 몰려가 버리는 경우가 있어. 그 하나가 쌍둥이로 태어나면 진정 재난이지.” 오소마츠는 바람에 의식을 맡기듯이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형제는 세 쌍둥이로 태어났어. 천사들이 말하길, 세 사람이 가진 악을 한 명에게 몰아주면 나머지 두 명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대. 그렇게 해서 원래는 태어날 운명이 아니었던 이치마츠가 우리 곁으로 오게 된 거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녀석은 언젠가 죽어야만 했어. 나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 왜냐면 천사들이 나를 그렇게 가르쳤거든. 그들은 내게 이치마츠를 사랑하지 말라고 했어. 할 수만 있다면 미워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말야.” 오소마츠는 고개를 모로 돌려 얼굴을 내 쪽으로 향했다. 그는 생각보다 이성적으로 냉정해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차마 감추기 힘든 오랜 괴로움이 비치고 있었다. “난 천사가 이치마츠를 난간에서 밀어 버리는 걸 봤어. 그때 바로 병원으로 옮겼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어. 나에게 있어서 내 둘째 동생은 거기까지였던 거야.”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치마츠가 죽은 뒤, 천사는 내게 말했어. 원한을 가지고 죽은 녀석에게 힘이 생기면 반드시 복수를 하러 온다. 그때는 내가 그를 막아야 한다. 그것이 희생으로부터 제외되어 살아남은 나의 의무다……. 그렇게 해서 천사가 되었지만, 나도 원래는 인간이었어. 천사는 언제나 모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하고, 어느 한 명만 사랑하거나 원하면 안 되는데, 난 태어나던 순간에 이미 그 감정을 알고 있었어. 아무리 애를 써도 억눌러지지가 않아. 오히려 점점 더 커져서, 내 전부가 되어 버렸어.” 하늘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그는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게 인간이라는 거잖아. 사랑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거.” 그리고 그는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난 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이런 날개, 아무런 의미도 없어. 신비한 힘 같은 거 필요없고, 네가 없는 영생은 끝나지 않는 지옥일 뿐이야. 그러니까 네가 원한다면 나, 기꺼이 인간이 될게. 인간이 되어서, 평범하게 살고, 평범하게 늙고, 평범하게 죽고, 그렇게 계속 같이…….” 줄곧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가슴 위로 손을 가져가며 뜸을 들이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위해서 해준 일,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다는 거 알아. 만약 이치마츠와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방금 전의 네 말을 듣고 굉장히 기뻤을 거야. 네가 바라는대로,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 맹세컨대, 나도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랐어. 그런데, 이제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어. 내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감정을 깨닫기 전으로는, 절대로.” “…….” 나는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잠시후, 갑자기 내 앞에서 자박자박 갈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날개로 빠르게 날아온 것처럼, 오소마츠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네 기분 이해해. 하지만 슬픔은 잠시 뿐이야. 너에겐 너의 삶이 있고, 머지않아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나, 기다릴게. 네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이치마츠를 잊어 버릴 때까지.” “아니, 안 돼, 더는 못해.” 손을 빼자, 오소마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정도 아파했으면 됐잖아! 이제 그만 잊어 버려! 너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자격 따위, 녀석에겐 없어! 네 삶을 망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도대체 왜 그런 녀석을 미워하지 않는 건데? 모두가 미워하는데도!” 그가 소리치는 순간 날카롭고도 묵직한 바람이 불어닥쳤고, 그의 주변으로 자란 갈대가 정확히 원을 그리며 쓰러졌다. 그것은 천사인 오소마츠에게 있어서 어떤 감정이었을까.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사랑해.” 내가 말하자, 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말하지 마.” 그의 목소리도, 두려울 정도로 차가웠다. “나, 이치마츠를 사랑해.” 하지만 나는 말해야만 했다. “내 앞에서, 나한테, 그런 잔인한 말 하지 마!” 또 다시 불어닥치는 바람에, 주변의 갈대가 일제히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강한 만큼이나 불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갈대가 무더기로 꺾이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오소마츠에게로 향했다. 그 짧은 사이, 그의 무덤덤했던 얼굴이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난 최선을 다했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고! 이제 행복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결국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천사의 눈물은, 그것에 담긴 슬픔 마저도 무색하게 만드는, 이를테면 저녁 노을과도 같은, 은은하고도 아름다운 금빛으로 빛났다. 바람이 잦아들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오소마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무덤덤하게 느껴질 정도로 의연해보였던 그의 모습은 한 번 무너져내린 뒤 결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마음은 잘 알겠어. 단지 이 말만은 해둘게. 천사는 원래 인간과 함께할 수 없어. 내가 지금까지 네 곁에 있었던 건, 이치마츠가 나타날 때까지 은거해야만 한다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대로 헤어지면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어. 그래도 괜찮아?”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오소마츠는 그런 내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바람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침묵이 이미 대답해주었기 때문에. “…….”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네 뜻 받아들일게.” 그는 두어걸음 뒤로 물러나 내게서 멀어졌다. 이윽고 그의 등으로부터 커다란 날개가 뻗쳐나왔다. “안녕.”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잘 있어.”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떨리던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오소마츠니까, 그것이 서로를 위한 것이니까, 더 이상 약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내게 작별을 고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그가 말했던 대로, 나는 자신이 두 번다시 그와 만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잦아든 뒤, 내 뺨에도 끝내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내가 여태껏 느껴왔던 온갖 괴로운 감정들, 슬픔, 두려움, 죄책감, 그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는 사랑했던 두 남자를 잃음으로써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것은 단지, 커다란 상실감이었다. … … …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집의 풍경은 내가 마지막으로 머물렀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자신이 곧 평범한 일상 생활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의미했다. 누군가 곁에 없어도, 아픔을 끌어안은 채라고 해도, 나는 삶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이어나가야만 했다. 방에 들어섰을 때, 나는 책상 위의 상자와 그 안의 편지들을 보았다. 내가 읽고서 그냥 내버려두었던 하나는 펼쳐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렸을 적 이치마츠에게 받은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던 종이가 어째서인가 깨끗해졌고, 그 자리에 대신 다른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편지를 읽었다. 단 두 줄의 짧은 편지였다. 난 줄곧 잃어버린 안식을 찾고 있었어. 이제 괜찮아. 내 마지막 안식처는 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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