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점점 피폐해져갔다. 이곳에 오게 된 이래 줄곧 그랬지만 예전보다 더욱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제이슨이 나를 품에 안았던 그날 이후, 그는 이따금씩 나에게 그때와 같은 일을 했다. 언제나 방에 들어오자마자 난로 앞으로 걸어가서 손을 녹였던 그가 그때만큼은 난로의 불꽃이 아닌 나의 체온으로 자신의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을 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백보 양보해서 내가 자처한 일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사실 육체적인 괴로움보다도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인해 망가져 있었다. 그 괴로움은 오소마츠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이었다. 그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무사한 걸까. 게다가 제이슨이 했던 말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스스로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을 내 주변에서 하나씩, 하나씩 없애 버리겠다는 그 말. 나는 제이슨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시간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다 지쳐 반쯤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나는 이불을 헤치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제이슨이 언제나 드나드는 문 앞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쥐었다. 덜컥—. 문을 열자, 사람의 비명소리가 섞인 바람이 좁은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문을 닫고 돌아섰다. 역시, 나갈 수 없다. … … … 제이슨은 언제나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오래된 피의 검은색이나 그렇지 않은 선명한 붉은색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정말 매일 피에 젖어 돌아왔다. 예전에는 무언가로부터 튀거나 스쳐서 묻은 것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몸에도 곳곳이 베이거나 찢긴 상처가 보인다. 아마도 그가 피를 뚝뚝 흘리며 오소마츠를 언급했던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왜 또 먹지 않는 거야?” “먹기 싫어.” “그럼 하다못해 링거만이라도 꽂고 있어.” “그것도 싫어.” 제이슨이 말을 하지 않을 때, 나는 그가 마스크 너머로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번 죽자고 마음먹으니 두려운 게 없어졌나보지?” 그와 나 사이에 정해져 있는 규칙 속에서 나의 거부권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제 그는 내 행동을 못마땅해하고, 내게 화를 낸다. 딱히 내게 소리를 지르거나 나를 때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나에게 자신이 놓인 상황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방을 나가보지 그랬어. 그럼 괴로운 것도 오늘도 끝날 텐데.” 스스로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수치심에,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만약 내가 죽으면 그땐 다른 사람을 이 방에 데려다놓을 거야?” 제이슨은 난로 위에 널어놓았던 수건으로 대충 피를 닦은 뒤 내게 성큼성큼 걸어와 이불속에 묻혀있던 내 팔을 거칠게 잡아당겨 억지로 링거를 꽂았다. 그런 그에게서 내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아니.” 너무나도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그를 돌아보았다. “왜? 네 말을 듣고 고분고분 행동할 새로운 인형이 필요하잖아.” “그랬다면 네가 싫다고 말한 시점에서 널 죽였겠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제이슨은 나를 안으면서 어떠한 감정도 겉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쾌락을 쫓는 것도, 잔혹함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는 나를 쓰러뜨리고, 그대로 올라타서 내 안으로 들어왔다. 제이슨에게 안길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빼앗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제이슨은 침대 아랫부분의 높게 솟아 있는 뼈대에 등을 기대어 앉았고,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른 헝겊처럼 기운이 빠져서 그의 품에 널브러졌다. 제이슨은 마스크를 벗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나를 감싸안은 그의 팔은 단단하면서도 묵직함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시야 한 구석이 뿌옇게 물들며 담배냄새가 풍겨왔다. 처음에는 갸웃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오소마츠가 피우는 것과 같은 냄새였다. 잠시나마 그리움을 느끼다가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모르겠어. 나라는 존재가 너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게 나아. 그걸 알게 되면 지금보다 더 괴로워질 테니까.” “넌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게 즐거운 거 아니었어?” “지금 내가 즐거워보인다면 결국 너도 미쳐 버린 거야.” “…….” … … … 이제 방안에서 만큼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침대에 속박되어 있을 때보다 더 큰 불안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단 하나의 선택지에 ‘도망친다’, ‘저항한다’라는 다른 선택지가 더해진 뒤로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계속 초조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문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선반에 놓인 고양이 인형 앞에 멈추어섰다. 혼자 있는 것이 무섭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고, 제이슨 마저 언제나 방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혼자 있을 때 습관적으로 그 인형을 한 번씩 쳐다보곤 했다. 비록 소통의 대상은 아니지만, 인형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방안에서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끼기기긱——. 문득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불규칙한 텀을 두며 계속 들려왔다. 무언가 단단한 금속의 문을 긁어대는 소리였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가고자 하는 욕구가 일순간 솟구쳐올랐던 것일까, 나는 인형을 선반 위에 돌려놓은 뒤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이윽고 무언가 검은 물체가 열린 문틈 사이로 불쑥 나타났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깨닫고 보니 그것은 이치마츠가 종종 털을 쓰다듬어주곤 하는 검은 고양이었다. 고양이는 내 주변을 한 번 빙글 돌고서 바닥에 앉았다. 에메랄드빛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야옹 하고 우는데, 내게 무엇을 전하고 싶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단지 이치마츠가 내게 주었던 자루를 열어 빵을 조금 떼어주었다. 고양이는 그것을 먹지 않았지만 내가 꽤나 마음에 드는 듯, 내 발에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딱히 고양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조금 불편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는 동네 고양이들을 학교 친구들과 똑같이 여길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고양이는 내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내가 문을 열어주었을 때 방을 나가 버렸다. 아마 처음부터 내가 아닌 이치마츠를 만나러 왔을 것이다. 나는 자신이 어쩌다 고양이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고민하다가 문득 고양이 인형을 돌아보았다. 그때 무언가 흐릿한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와! 이게 뭐예요?” “너의 새로운 친구가 될 귀여운 녀석이란다.” “푹신푹신한 느낌이 나요! 헤헷—. 감사합니다!” 그 기억과 함께, 내 발은 생각보다 먼저 인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선반 위의 인형을 손에 쥐고서 이리저리 만져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감촉……. 왠지……. 그리고 입술 틈으로 새어나간 한 마디. “아…….” 덜컥—. 문이 열리고, 방안으로 들어선 제이슨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평소처럼 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그는 내게 말했다. “거기 서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얌전히 앉아 있어.” 내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의 목소리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내 말 안 들려? 그거 내려놓고 그만 침대로 돌아가.” 나는 그의 말을 듣고도 계속 가만히 서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인형, 선물받은 거라고 했었지?” “그런데, 왜.” “누구한테 받았는지 물어도 될까?” “…….” 피를 닦고 있던 제이슨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지 수건을 난로 위에 던져놓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놀라거나, 당황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기억났나보구나.” 오히려 그는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치마츠?” 대답은 없었다. “이치마츠, 너야?” 손을 뻗어 마스크를 벗기려는 순간, 그가 나를 저지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목소리, 말투, 눈매…… 너무 똑같아서…….”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얼굴, 보여줘…….” 마스크를 벗기고 싶었지만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안 돼, 아직은.” 그 말에 확신을 하게 된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가 말했잖아, 알게 되면 더 괴로워질 거라고.”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바닥에 한 쪽 무릎을 대고 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멍청해. 예나 지금이나, 너는.” “이치마츠…….” 이윽고 강한 힘이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이제 내 모습이 어떻게 보여?” 그는 뒤돌아서 나로부터 두어 걸음 멀어졌다. “너에게는 여전히 괴물로 보이려나?” 걸음을 멈추고,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가 말했다. “넌 괴물이 아니야.” 나는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아니, 맞아. 모든 일들이 그래. 내가 해왔던 것, 하고 있는 것, 하게 될 것…….” “무엇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데? 그것으로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야?” “…….” 이치마츠는 침묵속에서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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