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그때, 죽는 편이 나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시체들로 가득한 장소에서 죽음 이상의 절망을 느꼈다. 두꺼운 사슬이 발목을 감고 있어 움직일 수 없고, 먹을 수도, 잘 수도, 끝내 생각을 이어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붉은 전등에 의지한 어둠속에서는 모든 시계의 톱니바퀴가 멈추어 버린 듯 정적인 공기가 흘렀다. 그렇게 내가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즈음, 이치마츠가 돌아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남자의 한 쪽 팔을 붙잡고 있었다. 남자는 이치마츠에 의해 내 앞까지 끌려왔다. 줄곧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슴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소마츠…….” 가슴은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나는 자신의 목소리로 그 이름만을 겨우 부를 수 있었다. 다행히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나오고, 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이 카라마츠 못지 않게 참담해서, 역시나 가슴이 무너졌다. 그의 팔에 새겨진 20/20이라는 숫자를 봤을 때는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맘에 들어?” 이치마츠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오소마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가 고개를 들어올리도록 했다. 그는 원래 차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바뀌어 상당히 날카롭게 들려왔다. 조금 흥분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잔인한 짓을 하고서도 평상시와 같은 상태라면 그것도 소름끼치겠지만, 이치마츠의 얼굴을 보면 왠지 그의 입술이 웃고 있는 것 같아 속이 뒤틀렸다. “꽤 아슬아슬했어. 이 녀석도 나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이어서 말이야.” 이치마츠를 죽인다…… 그게 가능한 일인 걸까. 어쩌면 그가 말하는 죽음이란 조금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를 내려다 보며 조소를 짓고는 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칼을 들어 그의 목에 겨누었다. 내 앞에서, 똑똑히 지켜보란듯이. “마침내 여기까지 왔어. 이 녀석의 죽음으로 난 내 삶을 돌려받을 수 있어.” 나는 절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가 말했었지? 이제 그만 이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래, 나도 정말 그러고 싶어.” 그의 칼이 날을 세우고, 천장에 붉은 빛을 반사시켰다. 그 순간 나는 가슴까지 차오른 외침을 내뱉었다. “그만둬!” “…….” 잠깐의 침묵. 이윽고 이치마츠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렇게 슬퍼할 것 없어. 어차피 이 녀석은 나로부터 널 다시 빼앗기 위해 온 거잖아. 말로는 사랑이니 뭐니 해도, 결국엔 다 자기 욕심 때문이라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야. 원하면 욕심내는 게 당연해. 딱 한 사람, 너만 달랐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이치마츠가 내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내 곁에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마저도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디엘 가든지, 누구와 만나든지, 그는 내게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외면하든, 얼마나 밀어내든, 다만 나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었다. 정신적인 것, 육체적인 것, 모두. 어쩌면 나는 당시에 이치마츠의 그런 점을 이용하려 했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동안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남자는 자신이 원했던 것을 모두 얻었고, 난 모든 걸 잃었어. 아이러니 하게도 말야. 이제, 녀석이 잃을 차례야.” 이윽고 칼을 쥔 이치마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나를 죽여!” 그는 조금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네 삶을 돌려받고 싶은 것 뿐이잖아? 누가 마지막 희생자가 되던 상관없잖아? 오소마츠는 그때 너와 내 관계에 대해서 잘 몰랐어. 그냥 내가 너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거야. 잘못이 있다면 어느 쪽에게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나한테 있어. 그러니까 꼭 해야만 한다면 나로 해. 날 죽이라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머지않아 그 사이로 오소마츠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나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끼며 그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이치마츠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모르는 척했지만…… 실은 나…… 전부 알고 있었어…….” 오소마츠는 힘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몇 번이나 봤고…… 키스하는 것도 봤어……. 나…… 자신이 녀석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너한테 고백했어……. 네가 받아줘서 기뻤고…… 한 번도…… 후회 같은 거…… 한 적 없어……. 지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일을 할 거야…….” 이윽고 이치마츠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욕심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지 않아?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형제에게서 여자를 빼앗다니, 해도 너무하잖아. 안 그래, 형?”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이치마츠는 어렸을 때 사고로 죽었어……. 다른 한 명은 너한테 죽었지……. 나에게 더 이상 남아 있는 형제는 없어……. 갖잖은 연기는 그만둬……. 지금 당장 그 가죽을 벗고 지옥으로 돌아가, 악마 자식아…….” 나는 두 남자의 말을 듣고 혼란에 빠졌다. 오소마츠가 이치마츠의 형……? 처음부터 굉장히 닮았다고는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성에, 이름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라던가, 친척이라던가, 그런 것은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거의 흑과 백이나 다름없을 만큼, 서로 상반 된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치마츠가 어렸을 때 죽었다니, 그와 나는 신장이 지금의 반도 못 미치던 시절에 처음 만났고, 나는 그가 성장하는 모습을 쭉 지켜봐왔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난 옛날에 난간에서 떨어져 이미 한 번 죽었어. 한 다섯 살 즈음이었나? 때로는 인간으로부터 악마가 탄생하고, 악마로부터 인간이 탄생하기도 해. 뭐가 어찌 되든 간에 내가 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런데 너는 이제와서 나를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거야? 정말 끝까지 최악의 형이네.” 이치마츠는 손에 움켜쥔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오소마츠가 자신을 올려다 보도록 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가장 중요한 말을 빼먹으실까? 혹시 아직도 그녀에게 경멸당하는 것이 무서워? 이제 곧 죽을 텐데, 뭐 어때? 그냥 말해. 네가 마음속으로 진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녀에게 들려주라고.” “좋아…….” 오소마츠는 흘러내린 피와 함께 괴로움을 삼켰고, 이치마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네가 어떻게 죽었던지 간에……, 난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을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그것이 단순히 분노나 원망에 의해 내뱉은 말이 아닌, 가슴속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나온 본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도 나 만큼이나 오랫동안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있었어. 그리고 이제는, 마치 운명처럼 그걸 나와 동시에 벗게 되었네. 기분이 어때?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널 보고 있는데.” 이치마츠를 향해 오소마츠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눈앞의 남자 못지 않은, 차가운 냉소였다. “넌 내 동생이 아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렇게라도……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오소마츠의 말에, 그를 응시하던 이치마츠가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그가 물었다. “글쎄…… 잘 생각해 봐…….” 오소마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카라마츠가 그녀의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어서 널 화나게 만들었을까……? 네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신을 악몽속으로 불러들이도록, 일부러 했던 거야……. 설마 녀석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 “지금 너를 움직이게 하는 힘, 네가 끝까지 감추려고 했던 네 가장 큰 약점……. 미안하지만 녀석과 내가 결국 찾아냈어……. 나머지 하나는 아직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부숴 버리면 넌 꽤 아프겠지……?” 이윽고 이치마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신부가, 설마…….” “그냥 신부가 아니야……. 엑소시스트라고……. 너 같은 녀석들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오소마츠의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벽과 천장, 바닥이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곧 강한 떨림으로 이어졌고, 넓은 장소가 전부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지진이 일어났다. 잠시 멈추었던 바람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지고 강해져서 우리에게 다시 휘몰아쳤다. 겨우 감았던 눈을 뜨고 시야를 되찾노라면,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이치마츠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하고 계속 기침을 하며 검은 액체를 토해냈다. 액체가 전부 쏟아져나온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연기가 조금씩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다만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악마에게도 피가 있다면 검은 액체는 그들의 피일 것이고, 만약 악마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그 검은 연기는 분명 그들의 영혼일 거라고. “아아아아아아악——!!!” 이치마츠의 입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던 연기는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빠르게 솟구쳤다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연기가 빠져나간 뒤 그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고, 모든 소란은 잦아들었다. “…….” 이치마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긴 정적이 지나간 뒤 겨우 몸을 추스린 오소마츠가 내게 다가와 어깨를 붙잡을 때까지, 나는 넋을 놓은 채 단지 쓰러져 있는 이치마츠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나를 속박하고 있던 사슬을 쏘아 부숴뜨렸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소마츠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나를 품에 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딱딱한 굳은살이 배어서, 부드러웠던 그의 손이 상당히 거칠게 느껴졌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것은 그의 몸 곳곳에 난 크고 작은 상처와 그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오소마츠의 모습을 보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이치마츠는 어떻게 된 거야?” “아직 살아있어.” 그는 가슴에 달린 주머니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손에 쥐고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수건은 피가 조금 묻어 있긴 했지만 매우 깨끗했고, 그 만큼 그가 입고 있는 검은색 옷과 대조되어 보였다. 그때, 어째서였을까. 나는 줄곧 검은색 경찰복이 오소마츠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에는 달랐다. 정말 그에게 어울리는 색은 옷의 검은색이 아닌, 손수건의 하얀색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내가 중얼거리자, 오소마츠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것이 이 녀석의 악몽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꿈은 이치마츠의 정신, 마음, 기억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야. 이를 테면 내면 세계 같은 거지.” 그는 내 뺨을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곳에 나타나는 괴물이나 온갖 험악한 것들은 녀석의 혐오감을 나타내. 유독 여자의 형상을 한 괴물이 많은 건, 녀석에게 여자에 대한 혐오가 있다는 뜻이야.” “그 말대로라면, 나도 그런 모습이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난 여자이고, 이치마츠는 나를 미워하잖아…….” “…….” 오소마츠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내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고서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말했다.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이 녀석의 육체를 완전히 부숴뜨려야 해. 그런 다음에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마 이 꿈속의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것 마저 사라지면, 우리는 깨어날 수 있어.” “부숴뜨린다니, 꼭 그렇게 해야만 해? 다른 방법은 없어?” 나는 저도 모르게 오소마츠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내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그대로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말했었지? 녀석은 오래 전에 죽었고, 죽은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무엇도 돌려받을 수 없어. 아무리 슬퍼도, 화가 나도, 억울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알겠어?” 내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나를 붙잡은 그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알겠냐고.” 나는 망설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오소마츠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더니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여기서 나가자.” “카라마츠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그는 다친 몸을 힘겹게 일으켰고,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까지 해주었다. 그렇잖아도 고단한 그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걷지 않은 탓에 다리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정말 괴롭게 했던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의 통증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동생을 잃은 오소마츠는 정작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어쩌면 스스로 아픔을 잊기 위해 애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묵묵히 이끌었고, 이따금씩 위협적인 것들이 나타나면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는 머지않아 어두운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바깥으로 나온 것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하늘, 그리고 태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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