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이 벽으로 둘러쌓여 밤낮을 알 수는 없지만, 이치마츠가 떠난 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목걸이가 끊어지고, 오소마츠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두려움 위에 불안감이 점점 더해져갔다.
나는 자신이 언젠가 문을 열고 방을 나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간 용기를 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려왔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나를 움직인 것은 용기가 아닌 불안감이었다. 무서운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찬 시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덜컥─. 손잡이를 쥐고 문을 여는 순간까지는 이전과 같았다. 날카로운 바람이 좁은 틈새를 파고들었고, 그 사이로 온갖 불미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사람의 비명과 비슷한 바람 소리,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닥과 부대끼는 소리, 벽을 긁어대는 소리……. 나는 마른 침을 삼킨 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문을 활짝 열었다. 어두컴컴한 복도. 방의 불빛이 닿는 곳을 제외하고는 온통 어둠 뿐이었다. 좌우로 펼쳐진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곳곳에 붙어 있는 붉은 전등으로 겨우 앞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 방을 나가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어.” 복도에 발을 딛는 순간, 지난 날 이치마츠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잠시 주춤했지만, 나는 끝내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는 그 말처럼, 방의 문을 닫아 버렸다. 길을 알 방법이 없으니, 일단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보기로 했다. 나는 붉은 등을 따라 몇 번인가 모퉁이를 돌았고, 어느 순간 넓은 장소에 이르렀다. 금속의 벽과 난간이 피와 녹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변함이 없고, 단지 다른 곳보다 조명이 조금 밝은 곳이었다.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형상의 사람을 보았다. 가시 돋힌 철사에 속박된 채 피를 모두 쏟아버리고 하얗게 가죽만 남은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서는 비명을 지르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가슴이 턱 막혀서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무서운 순간에는 목소리 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러한 시체가 한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넓은 장소는, 비슷한 모습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나는 몸의 방향을 돌려 장소를 빠져나가려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와서 외면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지만, 때로는 눈앞의 공포와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나는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시체들의 몸에는 각각 다른 부위에 날카로운 무언가로 그은 듯한 다섯 개의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의미를 몰랐다. 너무 끔찍해서 오랫 동안 고민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 장소에 줄곧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시체의 수를 셌다. 죽은 사람의 몸이 열 셋, 아니 총 열 네 구였다. 도대체 이들은 왜, 무엇을 위해 죽어야만 했을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에 신음하는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도.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내 시선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 어둠과 불빛의 경계선에 고정되었다. 이윽고 어둠속에서 무언가 툭 튀어나왔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 팔, 그리고 어깨. 그 모든 곳에서 선명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일단 도망쳐야 할까, 아니면 근처의 부러진 쇠파이프라도 손에 쥐어야 할까. 자신이 그런 것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나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문득 지난 날 병원에서 보았던 괴물이 떠올랐다. 괴물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을 뿐이지만 나를 죽이려 했음에 분명했다.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두려웠다. 그런데, 어둠속에서 신음하던 목소리가 문득 나를 불렀다.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가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아까보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목소리의 정체도 빛이 있는 쪽으로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것은, 그 남자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친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깨닫고 보면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귀에 익었다. “카라마츠!” 나는 급하게 달려갔고, 그의 앞에서 털썩 넘어졌다. 온몸을 부딪혔지만 아픔 따위를 느낄 새는 없었다. 카라마츠의 상태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관절 마다 부숴지고 깨진 듯이 몸이 삐그덕거리고, 피부와 머리카락과 옷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신음하며 내게 손을 뻗고, 내 앞섬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보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잡아당기기에, 나는 그 힘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보았다. 그의 팔에도, 커다랗게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5120 역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바들바들 떨다가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데, 따뜻한데, 점점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올려다보았고,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움직여 내게 말했다. “도망쳐라…….” 그리고 행여 내가 듣지 못했을까, 피를 토하며 한 번 더 말했다. “빨리…… 여기서…… 도망쳐라…….” 나는 차마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뒤…….” 그는 내게──. “뒤……에…….” 내게, 마지막까지 알려주려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를. 하지만 나는 바보 같이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나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바닥 위로 툭 떨어짐과 동시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고, 쌔한 기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두려웠지만 원치 않아도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그리고 마주쳤다. “마지막 숨을 마신다.” 이치마츠. 그는 쓰러진 카라마츠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쉰다.” 그 말과 함께 카라마츠의 손끝이 떨렸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끝.” 이치마츠는 가슴 높이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얼굴에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눈을 감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금 전의 충격으로 넋이 나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개의치 않고 벗은 마스크를 땅 위에 던졌다. 우리는 곧 눈이 마주쳤고,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얼굴에 있던 화상자국이 깨끗하게 사라진 상태였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기억속의 그가 밖으로 걸어나와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널 보게 되면 바로 목을 잘라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는 고민하듯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었다. “보다시피, 지금은 내가 기분이 좋거든.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목숨만은 살려줄게.” 어째서였을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카라마츠를…….” 그 중얼거림을 듣고, 이치마츠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그는 나를 지나쳐 카라마츠에게 갔다. 그리고 엎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그의 몸을 발로 밀어내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아무리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도무지 사람 취급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원래는 19번째로 정해져 있던 것을, 녀석이 자처해서 15번째로 앞당긴 것 뿐이야.” 15번째……? 나는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가슴의 소란이 일순간 잦아들고, 고요함 속에 매몰되어 있던 의식이 깨어나 무언가를 쫓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카라마츠의 팔에 새겨져 있는 숫자를 보았다. 15120.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 세었던 시체의 수가 14구. 혹시 이치마츠는……, 이치마츠가 하려는 일은……. 죽은 사람들의 몸에 새겨진 다섯 개의 문자 중, 가운데 1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15/20 전체 20 중에 15라는 뜻이었다.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지. 그건 잃은 것을 돌려받을 때도 마찬가지야. 내 삶을 보관하고 있는 관리인은 내게 그것을 내어주는 대신 더 많은 것을 원해. 인간의 피, 제물을 말이야.”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피부는 정말이지 깨끗했고, 어둠속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두꺼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제이슨은 더 이상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한때 나의 친구였던, 연인이었던, 그리고 멍에였던, 마츠노 이치마츠였다. “이제 다섯 명 남았어. 그들도 여기 이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죽게 될 거야. 나를 위해서.” 나는 충격에 빠져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바들바들 떨었다. 이윽고 이치마츠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마지막 20번째는 누가 될 것 같아?” 그의 목소리에 조소가 섞여 들려왔다. 하지만 내가 진짜 살벌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그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의 숨결에서 이전에 없었던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치마츠는 전부터 조금씩 자신을 돌려받고 있었다. 단지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내게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마치 지난 날 방을 찾아왔던 검은 고양이 처럼, 그는 내게 몸을 맡기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를 할퀼 수 있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맴돌고, 문득 이치마츠의 입술이 뺨에 닿아왔다. 언제나 바짝 말라 있었는데, 그것이 굉장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는 그대로 키스를 하지도, 내게서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게 내가 녀석을 아직 살려두고 있는 이유야.” 나는 줄곧 마음속에 억류 되어 있던 것이 마구 쏟아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인지, 슬픔인지, 둘 다 인지, 알 수 없었지만, 결국 그것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리게 될 감정이었다. “누구보다 더 고통스럽게, 더러운 누더기처럼 갈가리 찢어 버리겠어.” 그러나 이치마츠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마음이 몸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었다. 눈물 조차 흘리지 못하고, 그것은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그쳤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만나게 될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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