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이 돋아나는 봄과 과실을 수확하는 가을은 사람들이 유난히 바쁘게 움직이는 계절이면서 사람과 사람 간의 교류, 즉 장터가 가장 활발해지는 시기이도 하다. 이제 단촐한 식단으로 계속 연명해야 하는 혹독한 겨울은 잠시 잊어도 된다.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삶에는 변함이 없지만 적어도 봄이 되면 저자거리에서 반찬거리로 사용할 여러 가지 싱그러운 것들을 구할 수 있다.
오소마츠는 그다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일상속에서 그의 습관들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상당히 귀한 신분의 사람이며, 그러한 생활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태껏 내게 이야기한 적은 없어도 분명, 나와 함께 지냄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다. 가사일이 주업무인 내가 오소마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그에게 맛있는 밥을 지어주는 것 뿐이다. 매일은 어려울지라도, 이따금씩 그에게 그럴싸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그래서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며 오소마츠에게 장을 보러 시내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단지 그 뿐, 설마하니 그가 그 길을 따라나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자, 가자.” 나보다 먼저 바깥으로 나갔던 오소마츠가 이제 막 신발을 신고 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약간의 쑥스러움을 느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하면 하늘못을 떠다니는 고고한 뭉게구름이 보이고, 온화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포근하게 감싸오는가 하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자연의 소리가 지천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길을 걷던 중 나에게 문득 의아함을 갖게 했던 것은 오소마츠가 이끄는 방향이 내가 예상하고 있던 길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는 거야?” 오소마츠는 나를 돌아보았다가 잠시 시선을 옆으로 흘기더니, 내게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너랑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하고 대답했다. “집에서 항상 이야기하잖아.”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하는 건 조금 다르달까~ 「연애」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잖아~.” 그의 쓴웃음이 어느덧 평소와 같은 밝은 웃음으로 변하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 옆집 아저씨 일하러 나오셨네. 아저씨!” 오소마츠가 외치자 그 소리가 고요한 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건너편의 논에서 일을 하고 계시던 아저씨께서 끄으응 신음하며 천천히 굽은 허리를 펴고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이셨다. “올해는 농사 게을리 하지 마!” 목에 두르고 있는 천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도, 아까의 외침을 맞받아치기라도 하듯이 ‘시끄러워, 자식아!’ 하는 소리가 논 쪽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건방진 녀석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아저씨의 얼굴에는 곧 웃음이 돌아왔다. “누님들!” 그렇게 길을 걷다가, 우리는 머지않아 길 건너 편으로부터 이웃집 아주머니 두 분과 마주쳤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보니 그곳에 사는 우리들에게 아는 사람들과 여러 번 마주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을에는 젊은 남자가 흔치 않았기에 오소마츠는 이웃집 아주머니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친근하게 ‘누님’이라고 부를 때면, 그녀들은 호호호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나저나 오소마츠! 그녀에게 ‘결혼하자’는 말은 했니?” 아주머니 한 분께서 물으시자, 오소마츠는 두 팔로 뒤통수를 받치고 능청스레 시선을 모로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 안 했어.” 아주머니께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렴!” 그리고 또 한 분의 아주머니께서 오소마츠의 팔을 탁 때리시며 말씀하셨다. “알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괜한 걱정 마.” 두 분과의 대화도 그렇게 지나가고, 우리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마을을 빠져나와 시내에 도착했다. 내가 필요한 물건을 고른 뒤 값을 치르면 오소마츠가 그것들을 모두 들어주었다. 듬직한 사내가 곁에 있다는 것은 역시 좋구나.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음 편히 장을 보았다. 그리고 볼일이 끝난 뒤 오소마츠와 함께 어느 찻집에 들렀다. 상당히 한적한 분위기의 찻집이었으나,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놓인 마루에 앉아 우롱차 두 잔과 당고 한 접시를 주문했다. 차는 적당히 씁쓸하니 깊은 맛이 났고, 당고는 입에 넣으면 금방 사라져 어느새 달콤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둘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서로 당고를 먹여주거나 하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있잖아, 너…… 나와의 혼인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던 중 오소마츠가 내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그것이 나를 꽤나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나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소마츠가 내게 질문을 했던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불안감이 커져갔기 때문이었다. “그야 나는 당연히…… 오소마츠를 좋아하니까…… 응, 생각하고 있어…….” 자신의 마음은 이미 좋아하는 수준을 진작에 넘어섰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나는 오소마츠를 사랑했고, 그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어느 날 이상형의 남자가 나타나서 줄곧 텅 비어있던 내 마음속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사랑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소마츠는? 나는 그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다. 솔직히 아직까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조차 모른다. 단지 이것만은 알 수 있다. 설령 오소마츠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 해도 그것은 결코 나와 비슷한 정도의 호의가 아닐 것이다. 오소마츠는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내 곁에서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관계에 한계가 찾아오면 그때는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지금도 속으로는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 “거짓말.” 그의 한 마디는 나의 의식을 두드렸고, 일순간 나를 복잡한 사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거짓말이라니, 무슨 소리야?” 어째서 오소마츠가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시선을 모로 돌린 오소마츠는 얼굴을 약간 찡그린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치 상처를 입었다는 듯이.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소마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는 마루 위에 올려두었던 나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단지 그 뿐이었다. … … … “어라, 아저씨 아직도 일하고 있네. 아저씨!” 오소마츠가 짐을 들고 있지 않은 쪽의 손을 들어보이며 논둑을 향해 외치자, 모를 심고 계시던 아저씨께서 오만상을 쓰며 천천히 허리를 펴셨다. 이번에 들려온 끄으응 소리는 낮에 들었던 소리보다 더욱 컸다. 오소마츠는 잠시 둑으로 내려가서 아저씨와 그 주변에 계시던 아주머니께 장터에서 사온 과일을 조금 나눠드린 뒤 언덕길에 서 있는 내게로 돌아왔다. 언제나 투닥거리기는 해도 그는 이웃들을 좋아했고, 그들 모두와 잘 어울려 지냈다. 원래부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좀처럼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나를 오소마츠가 대신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마을 사람들과 평범하게 인사를 나누는 일도 없었으니까. 만약 오소마츠가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오소마츠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그에게 집착하는 감정을 갖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언젠가 헤어지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이제와서는 그가 없는 삶을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정말 오래 걸었네. 다리 아프지 않아? 역시 올 때는 우물을 이용하는 편이 좋았나.” 은은한 주홍빛의 석양으로 물든 오소마츠의 웃는 얼굴. 나는 그 순간을 여지없이 가슴에 새긴다. 내가 그동안 가슴에 새겨왔던 오소마츠의 모습은 모두 비슷해보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각각의 추억이 담겨 있는 소중한 그림들이다. 그 그림들을 한 장씩 꺼내어 볼 때마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사랑은 점점 더 커져간다. 그 뒤에 숨겨진 작은 욕심도. 나는 자신의 이 가엾은 감정들을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다. 설령 언젠가 그가 나에게 등을 보이며 떠나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제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업어줄까?” 괜찮다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오소마츠가 내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구부리고 앉는다. 미안한 마음에 망설이면서도 나는 늘 그렇듯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응석을 부린다. 그것이 이 관계의 흐름, 나의 사랑이 가엾은 이유다. “언제나 생각했던 거지만 오소마츠는 가느다란 몸을 가지고 있는데도 의외로 힘이 좋구나…….” “남자는 사실 여자들처럼 모두 약해. 단지 지켜야할 것이 있기 때문에 무리 해서라도 힘을 내는 것 뿐이지.” “지금 무리하고 있어?” “아니. 하지만 네가 생각보다 가벼워서 앞으로 좀 더 신경을 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 나의 사랑은 가엾은 것이다. 빛이 나면 빛이 날 수록, 아름다워지면 아름다워질수록, 나의 사랑은 더욱 가엾어진다. 어느것 하나 온전히 손에 넣어본 적이 없는, 어느 것 하나 온전히 가슴에 품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그것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오소마츠를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지금 나는 그것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오소마츠라면 괜찮아. 믿을 수 있어. 또 다시 이 사랑이── “그러니까 너는 나를 좀 더 의지해줘.” “지금보다 좀 더 말이야…… 나를……” “좋아해줘…….” 이 사랑이, 아련한 꿈의 연장선이 되어 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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