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름을 헤치며 날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나의 뺨을 잔인하게 때렸다. 자신이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도 얼어붙을 듯한 차가움이 훨씬 두려웠다. 내 손과 발을 묶고 나를 마차에 태운 괴물은 마부석에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가 거칠게 말을 부릴 때 마다 내 안의 공포는 더해져갔다.

 평소와 다름 없이, 단지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향했다. 언제나 오소마츠와 함께였지만 그는 드물게 낮잠을 자고 있었고,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깨울 필요가 있을까 싶어 혼자 집을 나섰다. 그것이 나의 큰 실수였음을 깨달은 것은 갑자기 괴물 같은 생김새의 사내에게 붙잡혀 마차 안으로 내팽겨쳐졌을 때였다.

 마차가 평범하게 육지를 내달렸다면, 그 자가 내게 재갈을 물리지 않았으니 소리라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을 날고 있다면 아무리 비명을 질러대고 도움을 청한다 한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나는 두려움을 필사적으로 억눌러가며 어떻게서든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했다. 마차는 계속 서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속도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알 수는 없었지만, 추후에 탈출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눈물이 나오려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일은 당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마차 안에는 손발을 묶고 있는 단단한 끈을 끊어 버릴 만한 물건이 없었다.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도구가 몇 개 보였지만 전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어서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눈물을 삼켜가며 다른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 마차가 갑자기 직각으로 기울더니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의 벽에 부딪혀 아픔을 호소했고, 여태껏 너무 높아서 이용할 수 없었던 손바닥만한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새까만 어둠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오는 듯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그곳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차는 산 정상의 커다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아래쪽으로 끝없이 하강했다. 우물을 이용할 때와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웅장했고, 그것은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 같았다.

 …

 …

 …

 충격에 정신을 잃어 버린 뒤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느 으리으리한 저택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손과 발은 어느덧 자유로워져 있었고, 고혹적인 향이 방안에 가득 퍼져 있어 머리가 맑고 편안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직감하고나서부터는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대제께서 납시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 저리 서성이던 나는 갑자기 방의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늦었던 건지, 그때 즈음 이미 방으로 들어와 있던 사내가 내 등에 대고 말했다.

 “깨어난 것 이미 알고 있다. 바보 같은 연기는 하지 않아도 되니 앉거라.”

 나는 좀 더 자는 척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화려한 문양의 덮개와 장식품들로 꾸며진 원형 식탁에 앉아 어느새 따라들어온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지만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앉으라는 듯이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주위를 몇 번 둘러보아도 그 방에 사람은 사내와 시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내는 척 봐도 기품이 느껴지는 것이 결코 나 같은 것을 쫓기 위해 달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시녀 역시 걸음걸이가 상당히 느긋해서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무사히 도망칠 가능성이 꽤 높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일단 사내가 시키는대로 탁자 앞에 앉아 시녀가 내어주는 차를 받았다. 분위기상 이상한 약이나 독이 들어 있지 않은지 한 번 쯤은 의심을 할만도 했지만 맞은 편에 앉은 사내가 같은 것을 마시고 있었기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그럴 여유는 없었지만 자신의 심리를 읽히지 않기 위해 조용히 차를 마셨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느냐?”

 사내가 내게 묻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긴 사자(死者)의 나라다. 이쪽 세계에서 마계로 일컬어지는 곳이지. 너희 인간들은 이곳을…… ‘지옥’이라 부른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자기로 만들어진 잔과 단단한 탁자가 닿는 순간 타닥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로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훨씬 전부터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것인지, 사내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딱히 나를 향한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 웃음 하나만으로도 그는 나를 정신적으로 강하게 옥죄고 있었다.

 “나는 마계를 다스리는 자, 염마왕이다. 풍도대제라고도 하지.”

 “풍도대제라면…… 옥황상제의…… 동생…….”

 “그것은 인간계의 설화를 통해서도 전해지지 않은 사실인데, 잘 아는구나. 천선이 가르쳐주었느냐?”

 자신을 염마왕이라고 말한 사내가 잔을 내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문득 그의 얼굴이 가까워져서,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두려움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온갖 요구가 난무했고, 머릿속에서는 그 요구를 따라가지 못한 수만가지 생각들이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천선이라니, 그게 누구의 이름이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내 주변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애당초 내가 평생 동안 알고 지냈던 사내라고는 다섯 손가락이면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무의식 중에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두려움을 누른 것인지, 나는 의문을 품은 채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마주앉아 있는 염마왕의 모습을 온전히 시야에 담았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옅은 푸른색을 띠고, 그의 마른 입술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시체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풍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역하지 못할 힘과 위엄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가 그의 시선을 피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가 두려우냐?”

 나는 대답 없이 차를 마셨다. 손끝이 떨려서 잔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도망치고 싶으냐?”

 그것이 대답을 원하는 질문인지, 나는 그것 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입을 여는 대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도망치거라. 나는 너를 붙잡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천천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대로 눈동자를 이쪽 저쪽 굴리다가 잔에서 손을 떼었다. 도무지 염마왕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그 대신 방 한 켠에 서 있던 시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빈 잔에 차를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붙잡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방을 나가, 빛이 얼굴에 내려앉는 순간 그 자리로부터 빠르게 달아났다. 디귿 자 형태로 지어진 저택은 출구와 안채 사이에 넓은 정원이 있었고, 저택을 빠져나가려면 일단 그 정원을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정원으로 나가려면 난간이 세워져 있는 복도를 쭉 돌아서 가야만 했다. 그대로 난간을 뛰어넘는 방법도 있었지만, 딱히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복도를 내달렸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내 시야를 가로막았고, 머리를 부딪힌 나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덥썩─.

 내 팔을 조여오는 강한 힘. 그것은 사내의 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보고 크게 안도했다가 곧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일순간 오소마츠라고 생각했던 그 사내는 오소마츠가 아닌 그의 동생 카라마츠씨였다. 그가 어째서 그런 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방에서 나온 염마왕이 맞은편의 복도에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느냐.”

 염마왕의 말에 카라마츠씨는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방에 있었던 시녀처럼 무릎을 꿇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위치에 맞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보였다.

 “2황자 천기가 숙부님을 뵈옵니다.”

 나는 카라마츠씨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에게 팔을 붙잡힌 채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저 염마왕과 마주선 채 시선을 모로 향하고 있어야만 했다. 어째서 카라마츠씨는 자신을 천기라고 일컫는 걸까. 그 이전에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머릿속이 온통 의문 뿐이었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 다른 누구에게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었다. 카라마츠씨, 아니, 천기라는 남자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던 수하들에게 나를 넘겨 어딘가로 끌고 가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하들에게 양쪽 팔을 붙잡혀 끌려가며 염마왕과 천기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천기가 귓속말로 무어라 말을 하자, 염마왕의 얼굴에 잠시 놀라움이 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염마왕은 여유로이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천기는 그의 뒤를 따랐다.

 …

 …

 …

 “이거 놔요!”

 병사들에게 끌려가 어느 방 안에 강제로 들어가게 된 나는 다시 홱 돌아서 방을 나가려 했다가 쾅! 하고 닫히는 그 기세에 주춤 하며 뒤로 물러났다. 당연히 굳게 잠긴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한 번 슥 둘러보고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려웠지만 계속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방은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고, 기억 자 모양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다른 공간이 나왔다. 나는 모퉁이를 도는 순간 어느 익숙한 차림새의 사내와 마주쳤다. 탁자에 앉아 내 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그는 오소마츠의 동생 중 한 명인 이치마츠씨였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앉아라.”

 카라마츠씨를 봤을 때는 몸에 바짝 긴장이 들어갔었는데, 어째서인지 이치마츠씨의 앞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다. 나는 별다른 경계심 없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앉았다. 그 방에는 시녀가 한 명도 없었고, 이치마츠씨가 직접 잔을 꺼내어 내게 차를 따라주었다. 그에게 여러 가지로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일단 나는 그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

 …

 …

 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내 마음에 폭풍과도 같이 시끄럽고 어수선한 소란이 일어났을 뿐. 나는 이치마츠씨의 말을 끝까지 듣고난 뒤로도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어서 한동안 멍하니 사념의 벙어리가 된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천국의 태자든 무엇이든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숨겼던 걸까. 만약 이치마츠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잘못 되어 있었다. ‘마츠노 오소마츠’라는 이름은 그가 어렸을 적 인간인 어머니에게 불렸던 별명으로,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그의 본명은 천선(天璇). 북두칠성의 두 번째 별이 가진 이름과 같았다. 나는 여태껏 그의 이름을 불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별명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신선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고나니 말문이 막혔다. 놀라움, 당혹스러움, 그리고 그 사이로 끓어오르는 어두운 감정 「원망」.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안의 그를 사랑했다. 그 마음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괴로움을 참아가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그때 이치마츠씨에게 어떤 말을 했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저는 오소마츠를 믿어요.‘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 그 뒤에도, 이치마츠씨는 계속 나에게 현실이 자신의 생각대로 그리 녹녹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뼈아프게 알려주었다.

 “태자마마시다. 한낱 인간을 진심으로 연모할 리가 없잖느냐.”

 이치마츠씨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내뱉었다. 내 마음은 모든 것을 거짓이라 믿고 싶어했으나, 그 웃음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로 인해 수치심이 느껴졌다.

 “단지 적당한 짝을 찾아주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더니…… 웬걸, 너는 형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 외의 사내에게는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 되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하고 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니, 그것이 네 소원이라면 들어주는 수밖에.”

 그는 청색 빛깔 주전자의 덮개에 살며시 손을 얹고서 빈 잔에 차를 따르며 비수 같은 말로 또 한 번 내 가슴을 찔렀다.

 “황실에서 태어나 귀부인들과 그의 자식인 규수들만 보며 자랐으니, 처음에는 뭐, 네가 신선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네가 생각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꿈 같은 이야기를 믿어봤자 너만 상처입을 뿐이야.”

 이 사람의 말을 믿어선 안 된다. 나중에 오소마츠와 이야기를 해보자. 그에게 물어보자. 흔들리지 말자.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속으로 끝없이 중얼거리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분노와 원망과 슬픔의 증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줄곧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불안감이었으니까.

 “괴로우냐?”

 오소마츠와 나는 다르다.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 그 생각에 앓고 앓아서, 닳고 닳아서, 내 마음은 진작부터 망가져 있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외면하려 해도, 그것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으로 내 발을 끌어당겼다. 그것이 나라는 사람, 내가 결코 행복해질수 없는 이유였다.

 “나는 너의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없지만, 적어도 잊어 버리게 해줄 수 있다.”

 이치마츠씨는 소매 안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것을 마시면 괴로운 기억은 사라진다. 천국에 대한 것, 신선에 대한 것, 형님에 대한 것, 전부. 나는 그저 도망칠 방법을 알려준 것 뿐이니, 이 다음부터는 네가 원하는대로 하거라.”

 그는 말을 끝마친 뒤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탁자 위의 소병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았다. 머리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마음은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졌다. 그저 너무나도 지치고, 피곤할 뿐이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치마츠씨는 내게 도망칠 방법을 알려주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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