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그거 알아?
 신께서 겨울을 만드신 이유 말이야.
 그건 인간들이 혼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래.
 봐, 날씨가 추우면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게 되잖아?
 사람의 몸은 모두 따뜻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임과 동시에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내게 웃으며 그 말을 했던 여자아이는 눈이 부시도록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모두를 굶주리게 하고 추위에 떨게 하는 혹독한 겨울 조차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어렸을 적 나는 그런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녀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눈을 감았다가 떠보아도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의 풍경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사람의 속도 모르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원망스러웠고, 황량한 설원에 남겨진 짐승의 발자국을 볼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먹이를 찾아 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매년 또 다시 이 밉살스러운 계절이 돌아온다. 새벽에 일어나 미음을 하고서 잠깐 지친 몸을 눕혔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어 몸을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잤다. 깨어날 때는 매서운 한기에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다. 내가 꿈속을 헤매는 사이 모닥불은 꺼졌고,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겨울에는 온종일 모닥불을 쬐고 있어도 괴로울 지경이지만 뗄감이 없으면 이렇게 종종 불을 꺼두는 수밖에 없다.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 옷을 단단히 추려입고 집을 나섰지만 웬만한 것은 사람들이 이미 가져갔을 테니 지금 숲에 가더라도 만족한 기분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가을에 나무를 구할 무렵에는 혼자 살고 있는 내게 그 정도의 양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조금 더 부지런을 떨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니 딱히 안타까운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좋다. 이런 계절에는 자연에서 무언가 얻어갈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해야 한다. 그것을 한 번 더 깨닫게 해주려는 것인지, 아침까지만 해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건만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 한편에 쌓아두었던 뗄감 위에 주워온 가지를 던져놓으니, 타닥타닥 부딪히는 소리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눈보라가 치기 전까지 숲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갑작스러운 폭설에 서까래가 끼익끼익 앓는 소리를 내고, 눈은 여전히 속절없이 내리고 있다. 단지 매섭게 휘몰아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잠시나마 추위를 잊을 수 있을까 싶어 집앞의 눈을 깨끗이 치웠다. 발목을 덮는 정도였으니 과연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땀이 식은 뒤에는 오히려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저녁까지 참아보려다 하는 수 없이 모닥불을 피웠지만 몸살이라도 들려는 것인지 별로 소용이 없었다. 불에 데운 따뜻한 물을 마셔도 마찬가지였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지붕 위에서 눈이 무너져내리거나 고드름이 떨어져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소리는 내가 문간에 이르기까지 계속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문을 열었고, 그곳에 서 있던 사내와 마주했다.

 “갑작스러운 눈에 길을 잃어버려서…… 잠시 쉬었다 갈 수 없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청년이었다. 새하얀 기모노는 그 속이 겉옷과 대조되는 검은색으로 되어 있어 눈에 띄도록 아름답고, 우산 대신 머리에 두른 하오리에는 소나무 무늬가 정갈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장신구는 꽃무릇처럼 새빨갛게 빛나는 보석과 어느 고매한 새의 깃털이 달려 있었는데, 나는 여태껏 그토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슬도 맺히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미풍에 부드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 그저 모든 것이 눈부셔서 나는 사내를 보는 순간 말을 하는 것도 잊어 버리고 반쯤 넋을 잃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그는 마치 전래 동화 속에 나오는 신선 같았다. 자신의 작고 낡은 오두막집이 문득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쪽으로 가면 여관이 있어요. 그곳에 가시는 편이…….”

 “정말 잠시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겉모습만으로도 귀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내가 첩첩산중으로 둘러쌓인 빈촌에 나타난 것부터 의문이었지만, 귀족이 평민에게 공손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놀랍고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낯선 사내를 들일 수는 없어요…….”

 생각해보면 나는 가장 먼저 그 이유를 떠올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서민이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은 당연한 것. 그런 것을 새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내게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그저 혼기가 한참 지난 지금까지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 뿐이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저는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왔습니다.”

 사내는 머리에 덮고 있던 하오리를 내려 어깨에 걸쳤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의 용모에 또 한 번 넋을 잃을 뻔한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모로 돌렸다. 그러나 한 번 크게 뛰어오른 심장은 진정될 줄을 모르고 계속 두근거렸다. 한눈에 반한다는 것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귀족에게 그런 마음을 품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 나랏일을 하는 분이신가요? 이렇게 외진 곳까지 파견을 오시다니 큰일이네요…….”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로 여겨졌던 이곳이 불과 얼마 전에 커다란 현으로 귀속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새로 등극한 왕은 성군이라고 한다. 그러니 도시의 사람이 되면 이런 일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저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마을에는 저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니 다른 집에 가보시지요. 그럼…….”

 “자, 잠깐! 아직 닫지 마! 이렇게 되면, 그래, 뭐, 그냥 톡 까놓고 말할게! 나 학이야, 학! 네가 바로 며칠 전까지 돌봐주었던……!”

 나는 내가 닫으려던 문을 사내가 다시 벌컥 열어 버린 것에 한 번, 그의 말투가 갑자기 변한 것에 한 번,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에 한 번, 세 번을 연달아 놀랐다.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남자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이야. 그때는 잠깐 학으로 변신했었던 것 뿐이었어. 다리를 다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그는 과연 처음 보는 곳이 아닌 듯 익숙한 모습으로 오두막집을 한 번 슥 둘러보고는 그 시선을 내게로 되돌렸다.

 “난 너처럼 선량한 녀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여기에 왔어. 신의 명령을 받고 말이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말해.”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사내는 바깥에 서서 눈을 맞으며 내 대답을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그제서야 왜 그가 집안으로 들어오길 원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에 그 이상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저는 소원 같은 것 없습니다.”

 나는 왠지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해서 그렇게 대답하고는 문을 닫으려 했다.

 “기다려! 소원 없는 인간이라니, 그런 거 있을 수 없잖아!”

 문을 닫으려는 나, 문을 열려는 사내. 그렇게 잠시 웃을 수 없는 공방이 펼쳐졌다.

 “원하는 게 뭐야? 재물? 힘? 뭐든 좋으니까!”

 “없습니다. 없으니까 가주세요.”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눈앞의 사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집은 어때? 궁궐처럼 지어줄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있어봤자 곤란할 뿐입니다.”

 “어째서야! 필요하잖아!”

 “필요없습니다.”

 끼긱끼긱……. 그렇잖아도 낡은 문이 때아닌 몸살을 앓았고, 결국에는 좁은 문틈으로 서로의 목소리만 겨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소원이 없어? 정말? 아니지? 있지?”

 “…….”

 그때 나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나처럼 혼자 사는 여자는 아무리 궂은 일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문일까, 내 손은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볼품이 없었다. 어렸을 때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후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어린 시절 친구에게 들었던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있잖아, 그거 알아?
 신께서 겨울을 만드신 이유 말이야.
 그건 인간들이 혼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래.
 봐, 날씨가 추우면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게 되잖아?
 사람의 몸은 모두 따뜻하니까!

 “굳이 있다고 한다면…….”

 “오, 뭐야?”

 사내는 나의 작은 중얼거림을 듣고, 문에 바짝 다가서서 내게 귀를 기울였다.

 “……이 있었으면 해요.”

 “뭐?”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한 번 그에게 말했다.

 “남편이 있었으면 해요.”

 “…….”

 딱히 정말로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대방이 너무 필사적으로 물어오니까, 사내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고 얼른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을 뿐이었다.

 “하?”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문 너머로 사내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죄송해요……, 못 들은 것으로 해주세요…….”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 나는 문을 닫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때 사내의 목소리가 나를 멈추어세웠다.

 “그게 네 소원이야? 확실해?”

 나는 문 너머의 그에게 대답했다.

 “네, 네…….”

 이윽고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럼 됐어. 그거라도.”

 사내는 나를 바라보며 이전과 다른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신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라서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소원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됐어.”

 그는 내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서 내 팔을 붙잡았다.

 “네 소원, 내가 이뤄줄게! 아니, 이루어지게 해줄게! 그러니까…….”

 사내를 전혀 모르는 나는 그에게 팔을 잡힌 것만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말야…….”

 사내는 나를 붙잡은 채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 당분간 여기서 좀 재워주라!”

 그렇게 말했다.

 “네?”

 나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며칠 동안 나무에 기대어서 잤더니 삭신이 쑤셔서 말이야. 이제 더는 못하겠어.”

 “아까는 잠시만 쉬어가겠다고…….”

 “그야, 네가 당연히 재물을 원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돈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만들어줄 수 있지만 네 소원은 그렇게 금방 해치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걸 이루게 될 때까지만 여기서 자게 해줘. 부.탁.이.야.”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기로 가면 여관이…….”

 “제멋대로 들리겠지만, 나 낯선 데는 싫어…….”

 그는 정말 싫은 듯이 눈썹을 찌푸리고는 뺨을 살짝 부풀렸다.

 “저희 집은 작아서 방이 하나 뿐이에요…….”

 “으응, 알아. 나도 그 방에서 보름을 지냈으니까.”

 그는 언제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펴고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때 내가 돌봐주었던 학이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사내와 같은 방에서 함께 먹고 자고 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속으로 경악했다.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비록 학의 모습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구면이고, 괜찮지?”

 팔을 붙잡고 있던 사내의 손이 손목으로 옮겨가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홱 빼 버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나로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내는 내 반응에 잠시 당황하는 듯하다가도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능청스레 웃으며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수려한 금실로 만들어진 얇은 끈에 달린 형형색색의 옥구슬. 문득 그것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매우 청아하게 들려왔다.

 “이걸 줄게.”

 “뭐예요……?”

 “천녀의 팔찌. 이걸 차고 있으면 아무도 너에게 험한 짓을 할 수 없어. 물론 나를 포함해서.”

 “그, 그런 말을 어떻게 믿어요…….”

 “이쯤 되면 못 믿을 것도 없지 않아? 믿어도 돼. 너에 대해서 더러운 생각을 하는 순간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진다고.”

 사내는 내 팔을 덥썩 붙잡아 내게 직접 팔찌를 채워주었다. 역시나 서슴없는 행동이었다.

 “그치만 나중에 돌려줘야 된다? 이거 우리 엄마의 물건이거든.”

 “아…….”

 나는 서둘러 팔찌를 사내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그럼 실례합니다! 아~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네~.”

 하지만 사내는 그렇게 외치며 나를 휙-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시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천ㅅ…… 아니, 마, 마츠노 오소마츠라고 해. 너는?”

 “…….”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내게 다가왔다.

 “너는? 이름이 뭐야?”

 그가 물었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를 경계하는 건 이해하는데, 이름을 가르쳐주는 정도는 상관없잖아. 자, 이름.”

 끈질긴 침묵. 기다리는 것이 지쳤는지, 그가 상체를 숙여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널 어떻게 부르면 돼?”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모로 돌렸다. 가슴속에서 두근두근 울려 퍼지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정신이 없는데도, 어째서인가 사내의 목소리 만큼은 매우 선명하게 들려왔다. 일생 큰 소리를 내 본 적이 없는 것일까. 그는 귀족스러운 용모 만큼이나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저는…….”

 그때 나는 아마도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본명?”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이름이네. 숨기기에는 아까워.”

 “…….”

 가슴이 턱 막혔다. 줄곧 모로 향하고 있던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리는 순간, 자신을 오소마츠라고 말했던 사내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크게 뛰었다. 누군가 나를 향해 그토록 상냥한 웃음을 보여준 것은 처음이었다. 아름다웠다. 밖에서는 아직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데 어째서인가 온화한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겨우내 추위를 견뎌내며 애타게 기다려왔던 그 계절이 마치 나에게 다가오는 듯했다. 모든 것이 그저 꿈인 것만 같고, 기분이 몽롱했다.

 “있잖아, 나무라면 내가 산에서 얼마든지 가져다 줄 테니까, 오늘은 모닥불 활활 피우자. 응?”

 그가 한 쪽 팔을 가로 뻗자, 숯이 쌓여 있던 자리에 갑자기 불꽃이 화르륵 피어 올랐다. 그로 인해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했던 주변이 밝아지고, 정말 봄이 온 것처럼 따뜻해졌다.

 “정말 미안했어. 이제 더는 나 때문에 바들바들 떨면서 자지 마.”

 그날 내가 느꼈던 기분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모닥불 앞에 나란히 앉아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녹이며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버지와 다툼을 해서 쫓겨나듯 집을 나왔던 이야기, 학의 모습으로 나무에 기대어 자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이야기, 나무를 너무 많이 베어가서 산신령과 투닥거렸던 이야기, 나와 만나기 전에 여인으로 변신하려 했으나 사자(死者)들에게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아서 그만두었다는 이야기, 내게 지어줄 새로운 집의 설계도를 완벽하게 그려놓았는데 필요없다고 해서 무지 허무했었다는 이야기, 다시 만나고 싶었다는 이야기…….

 나는 지금까지도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와 함께하는 것이 어느덧 일상처럼 되었지만 좀처럼 믿기지 않고, 이따금씩 그때처럼 기분이 몽롱해지곤 한다. 봄이 오면서 눈이 녹고 새하얬던 설원이 파랗게 물들었듯이, 내 삶에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결국 그 이후 오소마츠가 내 소원을 이루어주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매일 아침 무엇보다 먼저 그 사람의 얼굴을 본다. 그 사람과 껴안거나, 입을 맞추거나, 그 이상으로 뜨거운 열을 나누기도 한다.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엄밀히 말해서 남편이 생긴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상 욕심을 내는 것이 두렵다. 다친 학을 치료해주었던 일에 대한 보답은 내가 바랐던 것 그 이상이었다.

 “아저씨! 또 우리 집 곳간에서 쌀 퍼갔지?”

 “시끄러!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사는 거야, 자식아!”

 “자꾸 이러면 진짜 자물쇠 채워놓는다?”

 “어린 놈의 자슥이 말버릇 하고는!”

 투닥투닥…….

 “오소마츠, 그만해!”

 “어, 왜 나왔어? 아직 추운데.”

 “죄송해요, 아저씨. 저흰 괜찮으니까 필요하시면 언제든 가져가세요.”

 “아가씨는 어쩌다 이런 좀팽이 같은 놈을 만났어! 아가씨가 백 배 천 배 아깝네, 그려!”

 “뭐, 좀팽이? 애당초 아저씨네 식량이 부족해진 건 아저씨가 작년에 농사를 게을리 해서 그런 거잖아!”

 “너희 아직 혼인 전이지? 아가씨, 내 사촌 중에 괜찮은 녀석이 있어. 이런 녀석은 그만두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 어때?”

 “어이, 아저씨!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동안 야금야금 우리 집 쌀 축내는 거 눈감아줬더니만 정말 이럴래!”

 “싫으면 네가 얼른 거두어 버리면 될 것 아니냐! 다 큰 처녀 고생시키지 말고 그만 편하게 살게 해주라고!”

 “아저씨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나도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답답해 미치겠다고!”

 “어른한테 한 마디도 안 지고 빡빡 대드는 거 봐라, 이거! 에라이, 벼락 맞을 놈아!”

 “이미 몇 번이나 맞았고, 하나도 안 무섭거든!”

 “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너!”

 “그래! 이 녀석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되어 버렸어!”

 “오, 오소마츠……!”

 나의 변화는 현재진행중.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그 변화가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인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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