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옛날, 천계는 옥황상제라고 하는 도교의 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는 신령들을 다스렸고, 그 신령들이 인간과 사자를 다스렸다. 이렇듯 하늘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옥황상제에게는 많은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 중 오로지 여섯 명에게만 황자라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여섯 명의 황자들은 옥황상제와 함께 북두칠성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그 이름이 각각 천선(天璇), 천기(天璣),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이었다.

 옥황상제는 선대 황제인 원시천존의 장남으로서 황권을 계승하였고, 그 자신 역시 천계의 법도에 따라 맏아들 천선을 태자로 삼았다. 천선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면서 위로는 존경할 줄 모르고 아래로는 굽어살필 줄 모르며 틈만 나면 자미궁을 빠져나가 유흥을 즐기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몇몇 대신들이 그에 대해 그저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라고 말하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옥황상제의 고성이 하늘에 울려 퍼지는 날이면 모든 신료들은 바짝 긴장을 해야만 했다. 태자를 향한 분노의 불꽃이 화르륵 타올라 자칫했다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하로서 상제의 심기를 어떻게든 가라앉혀야 했지만 두려움에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네 이놈―!!! 네 놈이 그러고도 태자란 말이더냐―!!!”

 옥황상제가 옥좌를 탁 내리치며 고함치자, 그 소리가 자미궁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닥에는 태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옥좌 옆에는 녹색 의복을 걸친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옥황상제를 달래어 겨우 옥좌에 다시 앉히고는 ‘고정하시옵소서 아바마마…….’ 하며 허리를 굽혔다. 옥황상제의 셋째 아들이자 천국의 대학사인 천권이었다.

 “더 이상 너의 부덕한 행위를 눈감아줄 수 없다―!!! 내 오늘이야말로 너를 태자에서 폐하겠노라―!!!!”

 대소신료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다가 하나둘 씩 천권을 따라 허리를 굽히며 옥황상제의 심기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렇게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틈에 천선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의 근육을 풀고는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꿇고 있던 무릎은 피가 통하지 않아 일찍이 감각이 사라졌고, 줄곧 구부리고 있던 허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주인에게 예를 갖추어야 하는 궁인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날 때부터 귀중한 몸으로 좀처럼 누군가를 우러러보는 일이 없었던 천선은 2각(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부복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그냥 넘어가지 않겠구나.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직무를 내팽겨치고 기록부에 위적을 한 일의 정황이 다 드러난 뒤였다. 발뺌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그저 용서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사옵니다, 아바마마. 소자 반성하고 있사오니 뜻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부디 폐위만은…….”

 딱히 황권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 지금과 마찬가지로 폐위 될 위기에 놓여 있었을 때, 둘째 천기에게 태자의 자리를 넘겨주겠노라고 미련 없이 말했던 천선이었다. 다만 그때와 현재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천기의 권력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만약 천선이 폐위 되고 훗날 천기가 등극하게 된다면 그 누구도 그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태자의 자리는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어떠한 신념보다도 살고자 함에 결코 놓을 수 없는 생명줄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 이 때, 그는 무슨 짓을 해서든지 잘못을 만회해야만 했다.

 “태자의 의무가…… 아니, 천신(天神)의 의무가 무엇이냐? 인간들을 굽어살피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복을, 악을 행하는 자에게 벌을 내려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더냐? 헌데 자신밖에 돌볼 줄 모르는 너에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 그런 자세로 인간의 마음을 헤아릴 수나 있겠느냐? 이 세상에 아직 불을 밝히지 못한 인간들의 간절한 소원이 수십억 개에 달하나, 너는 그 중 단 하나의 불도 밝히지 못할 것이니라!”

 옥황상제는 핏대를 세우고 태자에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소리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가 두통이 이는 듯이 집게손가락으로 미간을 집었다. 천선은 그런 옥황상제 앞에 부복한 채 붉은 양탄자만을 내려다 보았고, 천권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자미궁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옥황상제는 결단을 내리려는 듯이 지그시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때 천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보이겠습니다.”

 그 한 마디에 옥황상제와 천권과 대소신료들의 시선이 모두 천선에게로 향했다. 천선은 옥황상제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마다 겉으로만 반성하는 척 했을 뿐이었고, 그가 스스로 무언가를 실천하고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을 밝혀보이겠습니다.”

 천선도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소신료들이 자신에 대해 숙덕이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딱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옥황상제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자신이 천신으로서 단 하나의 불도 밝히지 못할 것이라는, 그 매정한 사실 만큼은 쉽게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해야만 했지만 그러한 생각보다는 일순간의 오기가 그를 움직였다.

 “제가 이 일을 해낸다면 저를 폐하고자 하시는 뜻을 거두어주십시오.”

 옥황상제는 천선에게서 이전에 없던 결의를 느꼈다. 그로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던 중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그는 천선이 부복을 하고 있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만약 해내지 못한다면?”

 천선은 머리를 조아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웅성웅성……. 대소신료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옥황상제는 작은 손짓으로 그들을 저지시켰다.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아바마마와 셋째 아우,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들었사옵니다. 어찌 번복할 수 있겠사옵니까.”

 쾅! 옥황상제가 옥좌를 내리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네놈이 아주 자신만만하구나.”

 천선은 고개를 들어 비로소 옥황상제의 용안과 마주했다.

 “소자,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호랑이의 얼굴에 사자 같은 숨결을 내뱉는 옥황상제는 천선을 긴장케 했으나 그는 애써 경건함을 유지했다. 이윽고 천선을 말 없이 응시하고 있던 옥황상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을 내려가더니 천선의 두 팔을 꽉 붙잡았다. 천선은 줄곧 굽어져 있던 허리가 곧추세워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니라. 알겠느냐?”

 “예, 아바마마…….”

 천선의 팔을 놓은 옥황상제가 뒷짐을 쥐며 옥좌를 향해 돌아섰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지.”

 천선은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옥황상제가 한쪽 팔을 옆으로 뻗고서 다섯 손가락을 폈다가 꽉 움켜쥐자, 천선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의 오른발에 냉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발목의 뼈마디가 서로 엇갈리고 뒤틀어졌다. 그는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문득 바닥이 파르르 진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천선의 발밑에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고 그의 몸을 안쪽으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 구멍은 인간계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몸이 완전히 빨려들어가기 전, 천선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옥황상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천선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을 터였다.

 ‘두고보십시오. 저는 반드시 태자로서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

 …

 …

 천선이 인간계로 떠난 뒤 옥황상제는 천권과 대소신료들을 돌려보낸 뒤 둘째 아들 천기, 넷째 아들 옥형을 자미궁으로 불러들였다. 천권이 인간들에게 학문의 재능을 내려주는 문신(文神)이라면, 천기와 옥형은 무운을 관장하는 무신(武神)으로서 궁의 안팎을 지키는 일을 했다. 그러나 태자의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갑자기 궁으로 불려온 것이 그러한 일들과는 사뭇 다른 이유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소자 천기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청색의 도포를 걸친 천기가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오른팔을 가슴앞으로 들어 올리며 옥황상제에게 예를 취했다.

 “소자 옥형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이번에는 보라색 도포를 걸친 옥형이 같은 방식으로 예를 취했다.

 “일어나라.”

 옥황상제는 옥좌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손짓하고는 뒷짐을 쥐고서 단상 위를 거닐었다.

 “내 너희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고자 한다.”

 “하명하시옵소서, 아바마마.”

 천기는 단상 끝에 이르러 다시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하는 옥황상제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눈으로 쫓았다.

 “너희가 천선이 있는 곳에 가야겠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천기와 옥형이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옥황상제는 방향을 틀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냐?”

 옥황상제의 뜻밖의 물음에 천기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태자마마를 도우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물은 것은 천기의 옆에 선 옥형이었다.

 “아니, 그 반대다.”

 “예?”

 옥황상제는 단상 위로 돌아가 다시 옥좌에 앉았다.

 “너희는 지금부터 인간계에 내려가 천선을 방해하거라.”

 천기는 옥황상제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소자 아바마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사옵니다. 어찌 그런…….”

 옥형 역시 한층 더 숙연해졌다.

 “설마……. 태자마마를 저버리시려는 것이옵니까?”

 옥황상제는 두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선은 어려서 태자의 자리에 올라 그에 대한 모든 권위를 누리며 자라왔다. 그저 원하기만 하면 시종들이 모든 것을 가져다 바쳤지. 그런 녀석이기에 결코 이번 만큼은 쉽게 일을 성사해내서는 안 되느니라. 때로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의 뜻을 잘 알겠사옵니다.”

 그가 말하자,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던 옥형이 끼어들었다.

 “헌데 태자마마께서 만나게 될 인간의 소원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라면 어찌해야 합니까? 인간들 중에는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부(富)나 힘을 원하는 경우가 많사옵니다. 재물 혹은 재능을 내리는 것은 방해가 무의미할 정도로 간단한 일이 아니옵니까.”

 옥황상제는 옥좌의 팔걸이 위에 살포시 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 정도도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겠느냐. 사람과 사람 간의 연(緣)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내 일이니라.”

 천기와 옥형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옥황상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 한 번 예를 갖추었다.

 “아바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더 이상 여쭐 것은 없사옵니다. 소자 명을 받잡겠나이다.”

 “그래, 너희만 믿겠다.”

 천기와 옥형이 천선의 뒤를 쫓아 인간계로 떠난 뒤, 옥황상제는 드넓은 자미궁에 홀로 남아 탁 트인 전망을 통해 흘러가는 구름을 넌지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천선, 네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네가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옥황상제는 자신의 맏아들인 천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파릇파릇한 청춘 무렵에 한 번쯤 연모의 아픔을 겪었지만, 천선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말 그대로 예부터 자기 자신 외에는 돌볼 줄 모르는 사내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남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옥황상제는 자신이 천선을 위해서 옳은 판단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함을 느꼈다. 과연 두 형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진실된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

 …

 …

 “윽―!!!”

 끝이 보이지 않던 시공의 통로를 지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천선은 어느 드넓은 설원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매서운 눈보라가 나무를 뒤덮은 것처럼 그에게 휘몰아치고, 가녀린 피부가 지독한 추위와 아픔을 호소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새하얗게 뒤덮인 들판, 그리고 안개에 둘러쌓인 황량한 숲 뿐이었다.

 천선은 상처입은 발목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피에 의해 눈이 녹아 어느새 땅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준비라니, 뭐야―!!! 아무것도 발목을 부러뜨릴 필요는 없잖아―!!! 이 망할 노친내가―!!!”

 저 멀리 산 정상의 바위를 어루만지고 돌아온 자신의 메아리를 들으며 천선은 이른 좌절감을 느꼈다. 반드시 돌아가리라 다짐했고 제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지만 막상 쫓겨나듯이 인간계로 떨어지고나니 그 비참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일단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선량한 사람을 찾아내는 게 우선이겠지. 천선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생각했다. 그때 언덕 아래로부터 자박자박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뿌옇게 흐려진 지평선너머로 누군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멀어서 확실치는 않았지만 차림새나 걸음걸이가 매우 순박해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는 옳다커니 하고 서둘러 자신의 몸을 다시 설원에 눕혔다. 마침 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동물로 변하자. 그리고 저 여인이 날 도와준다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그런데 어떤 동물로 변하지? 뭘로 변해야 제일 불쌍해보일까? 털이 짧고 빼빼 마른…… 그래, 학이다! 학으로 변하자!

 천선은 학의 모습으로 변한 뒤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눈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조금 전 그 여인이 천선의 머리맡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그녀는 두터운 천을 머리에 썼을 뿐만 아니라 목에 휘감고 있었기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눈밖에 보이지 았다. 천선은 그 눈동자가 참으로 서글서글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여인이 손등을 덮고 있던 기다란 소매를 살며시 거두어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천선의 머리를 감싸는가 하면, 그를 끌어안은 뒤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설원에 쓰러져 있다가 여인의 풍만한 가슴에 안긴 천선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여인이 다시 눈길을 걷기 시작하자 조금 전까지 언덕을 오르며 약간 거칠어진 숨결이 입과 코를 덮고 있는 천에 부딪히는 소리가 천선의 귀에 들려왔다. 지쳐 있던 것일까. 천선은 그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져 곧 잠에 빠져들었다.

 …

 …

 …

 ‘네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네가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천선은 꿈속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흐릿한 시야를 서서히 되찾았다.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집의 높게 솟은 천장이 황량해보였고, 바닥 한 가운데 아궁이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작은 불에 의지해 집안을 밝히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것인가. 천선은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묵묵이 뗄나무를 불에 집어넣고 있었다. 문득 부러진 발목에서 욱씬거림이 느껴져 깨닫고 보니 상처가 깨끗한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역시 선량한 인간이다. 굳이 찾아낼 필요가 없게 되었어. 천선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존망이 걸려 있는 만큼 최대한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천선은 확신을 위해서 여인을 계속 관찰했다. 하지만 한 시간 정도가 지나도 그녀는 같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불쏘시개로 나무만 열심히 떼고 있을 뿐이었다. 천선은 하는 수 없이 여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화로운 자미궁에서 살아왔던 그에게 낡은 오두막집은 상당히 비좁게 느껴졌지만 여인 혼자 살기에는 넉넉해보였다. 아직 옛날 방식대로 불을 떼는 점이나 가구가 작은 수납장 하나 뿐인 점은 그로 하여금 여인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재물일 것이다.

 돈은 얼마나 주기로 할까. 겨울에는 돈으로도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테니 일단 곳간을 가득 채워주어야 하겠지. 새로운 집을 지어준다면 어떤 집이 좋을까. 자미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마을에서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집이어야 한다. 천선은 몸이 성치 않은 와중에도 미리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비록 보잘 것 없는 풀 한 포기 인명(人命)일지라도 일이 잘 성사되면 그에게 있어서 여인은 말 그대로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천선은 그런 여인에게 확실하게 보답을 해주고 싶었다. 모든 것이 질릴 만큼 넘쳐나는 그에게는 오로지 베푸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는 여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세상은 변함없이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갔다. 천선이 작은 오두막집에 오게 된 이래 어느덧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새해가 밝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으나 얼어붙은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아 여전히 숲과 들판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처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었을 때, 천선은 저 설원 아래 묻힌 새 생명들이 봄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조금씩 꿈틀대는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여인의 웃는 얼굴이, 그녀의 함박꽃 같은 웃음이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동안 천선은 여인의 삶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으나 단 한 번도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진정 선량한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랬던 그에게 마침내 확신의 순간이 찾아왔다. 천선의 상처가 깨끗하게 나았음을 확인한 여인의, 그녀의 진실된 웃음을 보았던 순간이었다.

 천선은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서 그녀의 내면을 보았다. 태양, 달, 그리고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그 안에 있었다. 자신을 상징하는 천선성(天璇星)이 매우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 그것을 깨달았을 때 천선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어찌 한낱 인간의 내면에 우주가 있고 세상이 있단 말인가. 미루어보건대 그것은 천선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 엄청난 일이기도 했다. 한때는 아버지의 것이었던 북두의 두 번째 별, 천선이란 이름을 계승한 이래 처음으로 자기 자신 외의 존재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이었다.

 “이제 다시는 혼자가 되지 말고, 아프지 말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

 천선은 구름을 향해 높이 솟아올라 아침의 눈부신 햇살을 가르며 웅장하게 날았다. 앞으로는 조금씩 푸른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천산이 보였고 아래로는 점점 멀어져가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적당히 보내고 들어가면 될 텐데, 그녀는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시나마 가슴이 뭉클해졌던 것은 그 짧았던 만남 조차 인연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천선은 자기 때문에 겨우내 사용할 뗄감을 거의 다 써 버린 여인을 걱정하다가도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뗄감은 하물며 저 숲의 모든 나무를 그녀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곧 돌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게 해 줄 터이니.

 천선은 용의 비늘 같은 거친 바람을 헤치고 더욱 빠르게 날아 구름이 연꽃처럼 피어 있는 하늘못을 지나서 천산의 어느 바위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의 날개가 하얀 옷자락으로 변하고 그의 얼굴과 모든 것이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자신이 머물렀던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인간사(人間事)를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노라면 문득 그의 가슴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감정이 나무의 잎사귀처럼 파릇파릇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여태껏 몇 번이고 인간계에 내려와서 이 광경을 보았다.

 헌데 어찌하여 이제와서 그 진가를 깨닫게 되었는가.

 혹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혹 드디어 찾아낸 것인가.

 나의 꺼진 불(소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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