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 처럼 아주머니를 도와서 저녁식사를 만들다가, 부족한 재료를 사기 위해 외투를 걸치고 현관을 나섰다. 아주머니께서 이치마츠에게 같이 다녀오라고 시키셔서, 그도 함께였다. 아직 노을이 밝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이치마츠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나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길을 걷던중 우리는 우연히 맞은편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오소마츠와 마주쳤고, 종국에는 셋이서 함께 마켓에 다녀오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전부 샀으니, 모두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야 해. 그렇게 생각했는데, 세 사람에게 뜻밖의 상황이 닥쳤다. 오소마츠가 한눈을 팔고 있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어느 남자와 어깨를 부딪혀서 시비가 붙어버린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오소마츠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와 일행들이 일부러 그런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척 봐도 껄렁해보이는 차림새가, 영락없는 불량배들이었다.

 "오소마츠!"

 그는 불량배들에 의해 근처의 골목으로 끌려갔다. 끌려갔다기에는 어째서인가 너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게 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에게 달려가려는 내 팔을 붙잡고 계속 괜찮다고 말할 뿐, 그를 도와주려 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려 하는 행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딱히 두려움이나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주 태평하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이치마츠, 어떻게 좀 해 봐!"

 "괜찮아."

 나는 괜찮다는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의 팔을 붙잡고 흔드는 그 순간까지도 골목 저편에서는 오소마츠가 불량배들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이치마츠의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서 말려야 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던 나는 혼자서 골목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으나 이치마츠의 팔이 뒤에서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는 나를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은 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연기를 후우 내뱉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그는 후미진 바닥에 침을 툭 뱉고는 다 태운 꽁초를 상자 안에 넣고 뽀얀 새 담배를 꺼냈다. 답답함에 미칠 것 같았지만 그의 팔이 나를 붙잡아두고 있었기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퍽─! 경쾌한 타격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휘청 하고 쓰러질 듯하던 오소마츠가 땅에 발을 디디며 중심을 되찾았다. 그는 얼굴과 몸을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곡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아무리 참는 게 이기는 세상이라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속에서 그는 너무나도 태연해보였다. 언뜻 보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뭐야, 이 자식…"

 "뭔가 이상한데?"

 불량배의 무리중 행동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가차없이 발길질을 한 뒤 오소마츠에게서 두어걸음 물러났다. 그는 눈썹을 찌푸린 채 계속 무언가 찝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우…"

 오소마츠는 조금 전에 차였던 복부를 손으로 감싸며 굽었던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때 나는 그의 눈빛이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 했어─?"

 "이제 내 차례네─?"

 그는 손목의 마디에서 뻐근함이 느껴지는 듯 손을 한 번 털고서 눈앞의 무리를 슥 훑어보았다. 문득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까 내가 보았던 희미한 웃음이 내 착각이 아니었음을. 내가 보고 느낀 것 그대로, 오소마츠는 결코 초조해하거나 당황하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그러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후우─. 이치마츠가 내뱉은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라 안개처럼 흩어졌다. 나는 다시 골목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소마츠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버려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사물이 부딪히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 살갗이 에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퍽─. 퍽─. 퍽─. 하고. 그때 문득 빨간 셔츠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오소마츠가 남자에게 번쩍 들린 채로 불쑥 튀어나와서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쾅 부딪혔다. 차체가 흔들릴정도로 강한 충돌이었다.

 "아하하핫─!!!"

 나는 이치마츠의 곁에 우두커니 서서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치마츠에게는 더 이상 날 붙잡을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딱히 당장 오소마츠에게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걱정되지 않아서가 아닌,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소마츠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던 것과는 다른, 전혀 다른 느낌의 두려움. 내 심장이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킬 때 마다 오소마츠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 . . 그 어느때보다 더 선명하게, 묘한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앗하하하하하하하하핫─!!!"

 "완전 신나──!!!"

 내가 무심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을 때, 문득 이치마츠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는 내 어깨에 턱을 기대고서 그대로 오소마츠가 싸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말리지 않으면…"

 나는 이치마츠가 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치마츠의 팔에 힘이 들어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당방위니까 괜찮아."

 이치마츠는 상자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문득 귓가에서 '음'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그가 내 앞으로 담배를 내밀었다. 한 번 피워보라는 듯이. 물론 장난이었겠지만, 오소마츠가 이런 모습을 봤다면 분명 이치마츠에게 화를 낼 것이다. 그는 평소부터 간접흡연으로 이치마츠와 자주 다투고 있으니까. 그런데 불량배들과 싸우고 있는 오소마츠는 단 한 번도 이치마츠와 내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야─, 정신차려──. 아까 그 배짱 다 어디갔어──?"

 "넌 아직 할 수 있어─. 힘 내──."

 퍽─! 불량배의 머리를 쥐어잡고 있던 오소마츠는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뒤 바닥에 내팽겨쳐버렸다. 그리고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곳에서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던 남자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이번에는 그 남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하지만 별 볼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머지않아 그로부터 손을 거두었다.

 "아무리 정당방위라고 해도… 너무해…"

 나는 충격에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이치마츠는 아무렇지 않게 내 뺨에 담배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오소마츠가 한눈을 팔고 있을 때 그동안 내게 하지 못 했던 나쁜 짓들을 실컷 하겠다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있잖아, 저 녀석 이쪽 전혀 보고 있지 않은데… 키스할까."

 당시의 상황이 평소와 같았다면 귓가에서 들려오는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중저음의 보이스를 좋아하는 내게 꽤나 유혹적으로 들려왔겠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뒤로 보내서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억…" 그러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그가 얼굴에서 내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상대는 여러명이고 형은 혼자야. 나중에 서에 불려나가도 녀석들은 할말이 없다고. 이참에 스트레스 좀 풀게 냅두고, 걱정하지마."

 이치마츠는 그렇게 말하고서 나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내 목에 키스를 했다.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 마다 짙은 멘솔향이 풍겨왔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변태가 이런 맛있는 상황을 그냥 흘려보낼쏘냐. 분명 오소마츠가 바로 눈앞에 있는 가운데 나를 범하는 것에 흥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성격이나 취향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나는 딱히 쾌감을 느끼지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지도 않았다. 단지 그러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돌아보지 않는 오소마츠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

 …

 …

 노란 태양이 서산에 가려지며 불그스름하던 하늘이 거뭇한 진홍색으로 변했다. 오소마츠는 깍지 낀 두 손으로 뒷덜미를 감싼 채 길을 걸으며 이치마츠와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껄껄 웃었다. 이치마츠도 오소마츠의 농담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얼굴에 상처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연히 마주친 이웃주민이 우리에게 평범하게 장을 보고 오는 길이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나도 얼떨떨한 기분이었으니까.

 "아─. 시원하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져──."

 오소마츠가 두 손을 가슴앞으로 가져가며 외쳤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나는 또 한 번 경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그의 얼굴은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그가 입밖에 낸 말을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믿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오소마츠의 옆으로 다가가 생채기가 난 그의 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오소마츠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집에 가면 약을 발라주겠다는 내 말에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완전 멀쩡해. 이 정도의 상처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나아."

 "내버려두는 게 낫다니… 무슨 소리야?"

 "뜨겁고 욱신욱신한 게 기분 좋거든──."

 나는 행복한 듯이 웃으며 말하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할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치마츠를 보면 과거에도 그러한 일이 빈번히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기가 막혔다.

 "싸우는 게 그렇게 좋으면 격투기라도 배우지 그랬어?"

 이치마츠가 말하자, 오소마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잖아─. 싸우는 데 규칙 따위는 필요없다고──. 급하면 급소를 걷어찰 수도 있는 거지──."

 안 된다. 이런 오소마츠는 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딱 멈추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는 앞으로 몇 보 더 나아가다가 내 기척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후 두 사람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소마츠였다.

 "걱정 마, 아픈 데만 골라 때려서 그렇지 위험한 곳은 하나도 안 건드렸으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이 자식아. 나는 오소마츠의 시선을 외면한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조금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터는 누가 시비를 걸어도 절대 싸우지 않을게."

 나는 끝내 고개를 들어 오소마츠와 얼굴을 마주보았고,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이야."

 "네, 네."

 뭐가 어쨌든 약속은 꼭 지키는 녀석이니까.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적당히 노닥거리고 빨리 와.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이치마츠가 멀리서 성화를 부리자, 오소마츠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응."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두 남자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실 오소마츠에게도 이치마츠에게도 좀 더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유쾌한 오소마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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