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은 뒤 줄곧 자신의 방에서 한국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던 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어서 불을 켜지 않으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캄캄해졌기 때문이었다. 거센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편지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어째서인지 모르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쏴아아아아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작은 빗방울이 방안으로 들어와 내 이마와 뺨에 떨어졌다. 마치 샤워기를 틀어놓은 듯한 시원한 소리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여 창문을 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지만 선명하게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사람에게 안정제가 따로 필요할까. 벽에 기대어서서 두 눈을 지그시 감으니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

 …

 …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닥에 주저앉아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나는 인기척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느덧 창문이 닫혀서 빗소리가 한결 잔잔해지고, 차가웠던 공기가 미지근해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녹색의 티셔츠와 그 안으로 보이는 깔끔한 흰색 와이셔츠. 내게 담요를 둘러주고 있던 쵸로마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직임을 멈추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미간이 좁혀진 것을 보아, 굳게 닫혀진 입안에 내게 하고 싶은 잔소리가 가득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약간 찌푸린 채 내게 담요를 마저 덮어준 뒤 조용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 방을 나가려 했다.

 “쵸로마츠.”

 나는 그를 불러세웠다. 딱히 할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구태여 잔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츳코미담당에 잔소리대마왕인 쵸로마츠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그의 시야에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존재로 비치는 내게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들게 했다.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말 해도 돼.”

 쵸로마츠는 이전보다 눈썹을 강하게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후 또 한 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그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감싸고 있는 담요 속으로 살며시 손을 집어넣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정갈하고, 손톱이 바짝 깎여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세워 두피를 살살 만져주니 기분이 좋아서 두 눈이 절로 감겼다. 그러나 머지않아 날카로운 잔소리가 들려와, 나는 감았던 눈을 번뜩 떴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이 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너 열날 때 약 먹어도 소용없고, 한 번 기침하기 시작하면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잖아. 자신의 몸이니까 네가 가장 잘 알 거 아냐. 그럼 항상 조심해야지, 왜 이렇게 경각심이 없어? 왜 매번 주변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드냐는 말이야.”

 그는 말을 하고나서 끝이 아니라는 듯이 집게손가락으로 내 볼을 잡아당겼다. 평소에는 꼬집는 시늉만 할 뿐 그다지 아프지 않은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아아 하고 아픔을 호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가 쵸로마츠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뺨을 감쌌다.

 “난 그냥 비오는 소리가 듣고 싶었어.”

 “요즘 툭하면 내리는 비인데 질리지도 않아?”

 “질리지 않아. 자주 내린다고 해도 빗소리는 언제나 다른걸.”

 “감수성에 젖어드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몸을 생각해야 할 거 아니야.”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하여간.”

 나는 멋쩍음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고는 두 팔을 확 벌려 쵸로마츠를 끌어안았다.

 “뭐하자는 거야?”

 사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친구에게 그런 진지한 말을 하는 것은 쑥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능청스럽게 장난을 치며 웃어넘기는 것을 택했다.

 “담요보다 쵸로마츠가 더 따뜻해.”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끌어안으면 곤란합니다만? 애당초 애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이런 짓을 하는 건 이상…”

 “오소마츠는 내 애인이 아니야.”

 저도 모르게 쵸로마츠의 말을 끊어버린 나는 그의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최근들어서는……. 나를 그다지 안아주지도 않고.”

 나는 쵸로마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뒤통수를 어루만져주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가슴을 열어서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누군가는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진심에 가까울수록 더 망설이고, 조심스러워지는 법이야. 형은 널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불안해할 것 없어. 너만 변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돼.”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형제이자 파트너니까 그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나도 딱히 오소마츠의 진심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로부터 ‘좋아해’, ‘사귀자’ 같은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그가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주고 아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항상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다만……. 다만 나는 불안했다. 이상한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도무지 정상이 아닌 나 자신 때문에 불안했다. 오소마츠를 좋아하면서 다른 남자에게 끌리다니,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불안정한 감정을 끌어안은 채 언제까지고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오소마츠와 사귀길 원했던 것은 그를 속박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를 붙잡아주길 바랐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고민하지 않도록, 한시라도 빨리 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나약한 생각인지 알고 있었기에, 오소마츠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 조차 확실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여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최악이었다. 이따금씩 머릿속에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널 줄곧 기다려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데……. 너는 어때? 너는 나를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야?’

 …

 …

 …

 “오소마츠…….”

 두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괴로움에 눈썹을 찌푸렸다. 녹색 셔츠를 꽉 움켜쥐자 뒤통수에 머물러 있던 손이 어깨로 옮겨와 차갑게 식은 팔을 어루만져주었다. 그의 체온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문득 머리맡에서 실소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일이 아니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변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조금 후회된다.”

 나는 고개를 들어 쵸로마츠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단지 시선을 모로 향하고 있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편이 나을 텐데, 이젠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 너희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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