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잠깐 소일거리를 하는 사이에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두 눈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졸린 것은 분명한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한 시간 째 누워서 눈만 깜빡거리다 결국에는 이불을 제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괜스레 초조한 기분이 들어서 차가운 바람을 쐬어 잠을 깨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잠들었는지 집안은 조용했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고 있노라면 자신의 발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1층에 다다르자 마침 현관문이 열리며 이제 막 외출에서 돌아온 카라마츠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어두웠지만 가로등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졌다.

 "시스터, 아직 일어나 있었나."

 "카라마츠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걱정 돼서.“

 “치비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늦었다. 그녀석 사람의 고민을 잘 들어주거든. 간만에 밤바람도 좀 쐬고…….”

 “그럼 난 그만 방으로 돌아갈 테니까 카라마츠도 푹 쉬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에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걱정이 사라져서일까, 왠지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뒤돌아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시스터.”

 “?”

 그때 카라마츠가 나를 불러세웠다.

 “간만에 둘이서 얘기를 하게 됐는데, 너는 벌써 충분한가?”

 “…….”

 “나 혼자 바라왔던 것 같아서 쓸쓸하다만.”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방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카라마츠에게 말했다.

 “냉장고에 맥주 있는데 딱 한 캔만 더 할래?”

 “아아, 그러지.”

 당연한 것이지만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맥주를 카라마츠에게 건네주고서 그의 옆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어째서 너는 우롱차인 거냐?” 그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캔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알잖아, 나 술 안 마시는 거.”

 내가 대답하자, 그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안 마시는 게 아니라 형님 때문에 못 마시는 거겠지.”

 딱─. 치이익─. 캔뚜껑이 열리며 탄산이 솟구쳐나왔다. 그 소리만 들어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카라마츠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내 앞으로 캔을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괜찮다. 아무리 오소마츠가 눈치가 빨라도 몇 모금 마신 정도로는 들키지 않아.”

 “그래도……. 왠지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가끔은 애인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필요하다. 안 그럼 숨이 막히지 않겠냐?”

 “딱히 숨이 막힌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카라마츠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이제 애인이라는 말은 부정하지 않는군. 드디어 사귀기 시작한 건가?”

 “아니…….”

 아직이라는 내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그래, 뭐, 조금이라면 괜찮겠지. 나는 카라마츠가 손에 쥐고 있는 캔을 두 손으로 붙잡고 그대로 캔을 기울였다. ‘옳지, 옳지.’ 카라마츠가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는 한편, 술이 지나가는 부위에서 차례로 뜨거움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잠시후. 정말 몇 모금만 더 마실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우리 앞에는 빈깡통이 나뒹굴고 있었다.

 “괜찮은 거냐, 시스터?”

 “으응……. 얼굴이 뜨겁고 머리가 어질어질해…….”

 “평소 전혀 마시지 않는 탓인가……. 역시 약하군.”

 “카라마츠도 만만찮게 빨개. 술냄새도 엄청 나고.”

 나는 아직 반 정도 술이 남은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카라마츠도 나를 따라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일 오소마츠에게 들키면 나 정말 큰일날지도…….”

 “내가 권한 것이니 나 혼자서 책임지겠다. 걱정 마라.”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솔직히 말해서 나도 마시고 싶었는걸.”

 “어째서 마시고 싶었냐?”

 “그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카라마츠에게 향했던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취해서 웃고 떠들면 가슴의 답답함이 좀 사라질까 해서.”

 “답답함?”

 그 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도대체 얼마나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는지 모르겠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을 생각하고 있나?”

 “에? 으, 응. 미안. 얘기하는 도중에 갑자기 입을 다물고…….”

 “사과할 것 없다. 소중한 사람으로 머리가 가득해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

 나는 카라마츠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술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우롱차를 한 모금 마시려고 했을 때 카라마츠의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아왔다. 그 차가움에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카라마츠…?”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와서, 어느 순간 너무 가까워져서, 옆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저… 카라마츠…?”

 나는 일단 그로부터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카라마츠가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 머리맡의 벽에 내질렀다. 몸을 옆으로 빼려다가 돌연 귓가에 들려오는 탁─! 소리에 흠칫 놀란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역시 조금 불쾌하군.”

 나는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카라마츠가 그다지 상냥하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차가운 몸에 비해 언제나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의 목소리가 상당히 차갑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단지 친구가 불쾌하다는 말을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어째서인가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마도 그가 방의 불빛을 가리며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그에게 물렸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자처한 일이라 해도, 그때는 내가 지난 날 오소마츠와 이치마츠에게 물렸던 그 어느 때보다 더 괴로웠다. 그러니 다시 물린다면,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후훗……."

 "?"

 "겁먹지 마라."

 카라마츠는 내 뺨을 장난스레 툭 건드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어 캔을 기울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잠들어 버렸지만, 나는 자신이 느꼈던 긴장감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빠르게 뛰어대는 가슴을 움켜쥐는 대신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잠든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상당히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나 때문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술로 인해 달떴던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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