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분명 오늘 아침도 평소와 다름없이 맑은 하늘 아래 귀여운 참새가 지저귀고 있었을 터인데, 집안에서도 밖에서도, 어째서인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공기 마저 찢어버릴 듯한 짙은 적막감속에서 두 다리가 묵직한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허리를 조금 넘는 높이의 딱딱한 선반에 등을 부딪힌 나는 손으로 벽을 더듬거리며 도망칠 곳을 찾았다. 그러나 두 발을 바닥에 딛고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나 지나다니는 복도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남자의 커다란 두 손이 내 허리를 강하게 붙잡았다. “미안하다…….” 나 같은 힘없는 여자가 거스르기에는 카라마츠의 손은 너무 강했다. 그는 나를 번쩍 들어 선반 위에 앉혀놓고는 그대로 내게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나라도 너는 믿어주었는데……. 믿음을 저버리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다…….” 그는 나와 이마를 마주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번인가 더 사과를 하고서 내 목에 키스를 했다. 그의 손이 내 오른팔을 천천히 쓸어내리는가 하면, 어깨와 팔이 이어지는 곳에서 묵직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문 것이었다. “아… 아파…”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카라마츠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봤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아픔이 뼈까지 전해지는 느낌. 너무 아파서 눈물이 다 났다. 그래도 참아보겠노라고 입술을 꽉 깨물었건만, 머지않아 훌쩍이는 소리가 작은 틈으로 새어나갔다. 그로부터 잠시후 마침내 카라마츠가 내게서 멀어졌다. 그의 숨이 거칠고, 뜨거웠다. “아직 부족해…….” 그는 내 목에 잠시 뺨을 부비적거리다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 말이다……. 너를……. 좋아한다…….” 아침 안개가 피부에 스며드는 느낌. 그 순간 내가 느낀 기분은 그랬다.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가리고, 차갑지만 왠지 모르게 매력적으로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몸이 강하게 죄어왔다. “그러니까……. 여기서 좀 더……. 괜찮겠지?” 그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나와 마주보았다. 조금 전까지 슬픔과 답답함 등을 내비추고 있던 그의 얼굴에 어느덧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가 하면, 그의 입가에 묘한 살벌함이 느껴지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짐과 동시에 덜컥 겁을 먹고 그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내 어깨를 한 번 더 물었다. 이번에는 반대쪽이었다. 오소마츠……. 나는 옅은 의식으로 선반 위를 더듬거려 아까 손에서 놓쳐버린 자신의 휴대전화기를 움켜쥐었다. 이치마츠……. 빨리 돌아와……. 그러나 내가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카라마츠가 내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그는 곧 내게 가하는 힘을 뺐지만 그대로 내 손을 자신의 가슴앞으로 가져갔다. 쪽─. 손가락 끝에 그의 입술이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뜨거운 혀가 감싸왔다. 아찔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을 하는 찰나 내게 그런 여유를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엄청난 아픔이 나를 찔러왔다. 그는 내 손가락을 무는 데 일부러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를 썼다. “아파! 아파!!! 카라마츠!!!”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살갗이 뚫리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것은 강한 아픔이었다. 관절이 욱씬거려서 손가락을 구부릴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괴로운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가 그동안 얼마나 필사적으로 욕구를 눌러참아왔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아파서 화를 낼 수도, 더 심하게 저항을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는… 싫은가?” 그는 크고 거친 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 살살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계속 너를 원할 테니까 말이야.” 내게서 시선을 거둔 그는 내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위에 두고 가볍게 키스를 하듯이 물려다가 그만두기를 몇 번인가 반복했다. 날카로운 이빨이 피부에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의 숨이 이전보다 더욱 뜨거워지는가 하면, 그가 내 손에 코를 묻고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괴로움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 내 휴대전화기의 진동이 울렸다. 다행이다……. 이치마츠야……. 나는 카라마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집인데…….” 「누구랑 같이 있는데?」 “카라마츠랑…….” 「…….」 수화기 너머로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마음이 초조해진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이치마츠, 언제 돌아와?” 「지금 가는 중이야.」 “그래……. 알았어…….” 오는 중이라고 해도 대체 언제쯤 도착하는 걸까……. 카라마츠의 앞에서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노라면 점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으려는데, 돌연 이치마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와 나를 멈추게 했다. 「끊지 마.」 “어째서?” 「끊지 말라면 끊지 마. 내가 갈 때까지 전화기 꽉 붙잡고 있어.」 “으, 응…….” 혹시 이치마츠가 내 목소리를 듣고 무언가 눈치챈 것일까?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대로 있으면 카라마츠가 더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카라마츠는 아직 통화가 끊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와 내 목에 키스를 했다. 일부러라는 것을 알게하려는 듯이 더욱 진하고, 야릇하게. 쪽 쪽 소리가 들려올 때 마다 나는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서 입술을 깨물고 숨을 참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소리가 새어나갔다. “읏…….”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거칠게 움직이면 그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질까 봐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필사적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을 벽에 대고서 전력을 다하고 있는 기분.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게 느껴지고,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라마츠는 내가 들고 있던 전화기(마이크가 달린 부분)을 손으로 감싸쥐고는 내게 속삭였다. “너, 이치마츠를 좋아하는군?”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두와 사이 좋게 지내긴 해도 마음은 줄곧 오소마츠 한 사람에게 향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거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냉소를 지었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이, 뭐하는 거야?」 카라마츠에게도 소리가 들리고 있는지, 그는 내가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전화기에서 손을 거두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이치마츠에게 별 것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차마 숨길 수는 없었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떨려? 괜찮은 거야? 너……. 뭔가 당하고 있는 거 아ㄴ…….」 뚝─. 내게서 전화기를 빼앗은 카라마츠는 멋대로 통화를 끊고 전원을 꺼버렸다. “이런, 배터리는 미리미리 충전해놔야지, 시스터.” 뻔한 것이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액정을 확인했을 때 내 전화기의 배터리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나중에 이치마츠에게 잘 얘기해라.”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전화기를 선반 위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내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키스를 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나의 두 눈을 향해 있었다. “언제나 망설이기만 하던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당황스럽나?” “…….”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면이 있지. 너는 여태껏 내 한 쪽 면만 보고 있었던 거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웃음, 친절, 상냥함을 말이야. 어차피 위선적으로 보일 뿐일 테니, 앞으로는 이런 일로 일일이 사과하지 않겠다.” 그는 내 손을 붙잡은 채로 내게 다가왔다. “너는 이따금씩 나에게 신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농담처럼 했었지. 실은 나도 다른 남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한 여자를 좋아하고, 심심하면 그녀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하지. 아니,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하게 된다. 인간이란 그런 거잖냐. 네가 마음속으로 누군가와 사귀게 되기를 바라는 것, 그에게 좀 더 닿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야.” 나는 얼이 빠졌다. 조금 전에 보았던 카라마츠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태껏 카라마츠와 함께 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그가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최근 카라마츠의 내면적인 모습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형상과 달랐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그때 내가 보았던 그의 표정은 그러한 깨달음을 부정하려 하고 있던 자신에게 제법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딱히 내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내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카라마츠는 한숨을 쉬듯이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고, 꽤나 관능적으로 내 목을 핥았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내게 속삭였다. “네 사랑……. 내게도 달라고…….” “오소마츠가 아니여도 상관없잖아?” “이치마츠보다 즐겁게 해줄 자신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점점 차갑게 변하고, 나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서야 비로소 그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브라더가 돌아왔나보군. 그럼 방으로 돌아갈까.” “…….” 나는 조금 전과 사뭇 다른 이유로 충격에 빠졌다. 그 순간 눈 앞의 남자가 어느덧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평상시의 그, 누구보다 상냥한 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라마츠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내가 그 손을 잡자 나를 선반 위에서 내려주었다. 그때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에서 쿵쿵쿵 소리가 울리더니 이치마츠가 나타났다. 그는 우리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카라마츠의 멱살을 낚아챘다. “뭐, 뭐하는 거냐, 이치마츠!!!” “너, 이 녀석한테 무슨 짓 했어?”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X 까, 이 싸이코패스새끼야. 내가 널 모르냐? 아아?” “정말이다!!! 내가 시스터에게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어엇!!!” 이치마츠가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카라마츠는 습관처럼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카라마츠와 이치마츠가 투닥거리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고, 그 이상으로 분위기가 살벌한 경우도 지난 날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나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때리지 마라!!! 아직 전에 생긴 멍도 낫지 않았다고!!!” 복도 한 가운데, 두 남자의 곁에 우두커니 선 채 그대로 굳어버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죽여버린다, 쿠소마츠.” “귀, 귀여운 리틀브라더가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잖냐……. 나, 알고 있다고? 이치마츠 넌 착한 녀석이다. 겉보기와 다르게 말이야. 언제까지고 그렇게 계속 사납게 굴면…….” 이윽고 카라마츠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내가 그와 단둘이 있을 때 보았던 차가운 눈빛이었다. “언젠가 호되게 당할 거다.” 그의 목소리도 겁에 질린 듯했던 이전과는 달랐다. “형의 말이니까 믿어라.” “…….” 그 순간에는 이치마츠도 상당히 놀란 듯, 충격을 먹은 듯 보였다. “너…….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어렸을 때와 똑같아.” “그건 이치마츠 너도 마찬가지잖냐.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POOR BROTHER?” 이치마츠는 말없이 카라마츠를 노려보았다. 카라마츠의 멱살을 붙잡은 그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두려움이나 불안함보다는 분노에 가깝고, 분노보다는 혐오에 가까웠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카라마츠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치마츠에게 팔을 붙잡혀 그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고, 겨우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날이 저물고 다시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내가 다시 카라마츠와 단둘이 남게 되는 일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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