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럼 1분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형제들의 방에서 평소와 같이 빨래를 개고 있노라면, 라디오의 스피커에서 DJ의 목소리를 대신해 CM송이 들려온다. 어째서인가 아까부터 카라마츠가 탁상에 턱을 괸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처음에는 그의 시선이 조금 신경쓰였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다. 애당초 나는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관심받는 것을 '부담'으로 여길 만큼 이성관계에 있어서 그리 여유가 넘치는 여자가 아니다. 어쩌면 조금 기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중에 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몇 편의 CM은 금방 지나간다. 「네, 쌀쌀한 가을 오후의 추억속으로 8090코너입니다. 첫 사연은…」 이맘때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하면 아주 뻔하다. 가을을 맞이하여 낙엽색으로 물든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라던가, 서늘한 바람이 가져다주는 고독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그런 흔한 이야기들중에서 그나마 독특하고 재밌는 사연을 많이 들려주는 편이다. DJ가 읽어주는 사연을 들으며 넋을 잃고 있던 중 문득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의 밴드명이 들려왔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확- 들었다. 깨닫고보면 카라마츠도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청곡은 에어로스미스의 크라잉입니다.」 우리는 같은 표정에 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쾌한 기타음의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나서야,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라디오로 시선을 돌렸다. ──────♪ "사연을 들을 때는 왠지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듣는 귀가 있군." "카라마츠도 에어로스미스 좋아해?" "가장- 까지는 아니다만… 꽤 좋아한다." "그렇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80-90년대 락 같은 거에 전혀 흥미가 없으니까 분명 외톨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네가 이런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반주에 비해 잔잔한 멜로디의 파트가 지나가고 잠시 잦아들었던 드럼소리의 볼륨이 다시 커지면, 이어서 보컬의 감성이 극에 달한 클라이막스가 들려온다. 카라마츠와 나는 그 부분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노래를 따라불렀다. I was cryin' when I met you (널 만났을때 나는 울고 있었어) Now I'm tryin' to forget you (지금은 널 잊으려 하고 있어) Love is sweet misery (사랑은 달콤한 비극) I was cryin' just to get you (널 얻기 위해 울었어) Now i'm dyin' 'cause I let you (지금은 널 떠나 보냈다는 사실에 죽을것만 같아) Do what you do-down on me (네가 하는대로 그렇게 날 잊어)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연스레 옆을 돌아보았다. 이치마츠가 눈썹을 찌푸리고서 셔츠 안에 집어넣은 손으로 배를 긁적이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 노래? 에어로스미스?" 그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치마츠도 락을 자주 들었었지……. 몇 번인가 그에게 휴대전화기를 빌려서 음악을 들은 적이 있기에 알고 있었다. 대부분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재패니즈락이라 나와는 상당히 취향이 다르지만 그도 에어로스미스를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뭐, 시대가 다르다고 해도 일단은 같은 장르에 속해 있으니까. "좋지 않아?" "구려. 대체 언제적 노래냐?" "옛날 거라고 해서 무시하지 마. 시간이 흐를 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게 고전 락의 매력이라고. 그치, 카라마츠?" "아아. 다른 장르는 몰라도 락에 있어서는 고전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추억이라는 선율로 매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보지 않겠나, 브라더." 2절이 시작되면서 나와 카라마츠는 흥이 돋아서 고개를 까딱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치마츠는 그런 우리를 이전보다 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기타사운드에서 구수한 청국장냄새가 아주 풀풀 나는구만. 난 됐으니까 구닥다리끼리 실컷 들으셔." 탁─. "구닥다리라니…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잖아… 정말이지…" 드륵─. 내가 노래에 집중하려는 찰나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좁은 틈으로 문에 반쯤 가려진 이치마츠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어둠속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쿠소마츠." "?" "어쩌다 한 번 취향이 맞았다고 오버하지 마. 분위기 타서 이상한 짓 하면 죽여 버린다." "네, 네…" 탁─. 문이 닫혔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이치마츠의 눈은 끝까지 카라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살벌한 눈빛은 곁에 있는 내 등골이 다 오싹해질 정도였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딱히 그가 음악에 있어서 어느 한 장르만 편애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노래와 상관없이 그냥 질투가 나서 심술을 부렸던 것 뿐. "난 또 소중한 브라더를 화나게 했군…" "카라마츠는 나쁘지 않아. 이치마츠가 바보라서 그래." "듣고 있거든?" 의기소침한 카라마츠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데 대뜸 밖에서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도 카라마츠도 흠칫- 놀랐다. 그는 아직 문앞에 서있었다. 저기서 뭐하는 거야…….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앞으로 카라마츠와 서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뻐." 내가 말하자 카라마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시스터…' 하고 중얼거리며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 그때 또 방의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려온 소리는 '드르륵─'이 아닌 '쾅!'이었다. 이윽고 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들어온 이치마츠는 내게 안겨 있던 카라마츠의 멱살을 낚아챈 뒤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쿠소마츠." "이, 이이이치마츠! 진정해라!" 그의 눈은 내가 아닌 카라마츠를 향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치마츠의 등에서 검은 오오라가 뿜어져나오는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만졌냐? 아아? 만졌냐고? 껴안은 다음에 뭐하려고 했어? 바른대로 불어, 새끼야." 이치마츠는 이처럼 나와 카라마츠가 붙어 있을 때 유독 화를 잘 낸다. 오소마츠가 내게 들러붙을 때는 그걸 보면서 흥분이 되네 어쩌네 하면서 어째서 카라마츠의 경우에만 그런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카라마츠에 대한 단순한 심술일 수도, 어쩌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진실이던 간에 신경쓰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만 둬, 이치마츠!" "가슴에 얼굴 부비부비 하려고 했습니다아! 죄송합니다아!" "무얼 진짜로 솔직하게 말하고 있어, 카라마츠!!!" "죽어!!!!!!" 노래 두 번 듣다간 난리 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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